프랑스 극우의 얼굴인 마린 르펜(56) 국민연합(RN) 전 대표가 유럽의회 자금 횡령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아 차기 대선 출마가 금지됐지만, 지난해 미국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유죄 판결을 받은 뒤 오히려 사법부를 공격해 법치 신뢰를 흔든 탓에 프랑스 또한 유사한 수순을 밟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 일론 머스크 등 미 정부 인사들은 이번 판결 관련 부정적 의견을 표명하며 불을 지폈다.
<로이터> 통신, 영국 일간 <가디언> 등을 보면 지난달 31일(이하 현지시간) 프랑스 법원은 르펜이 2004~2016년 유럽의회에 가짜 보좌관 직책을 만들어 유럽연합(EU) 기금 약 400만 유로(약 64억 원)를 소속 극우 정당 활동비로 횡령한 혐의로 4년형을 선고했다. 법원은 10년 이상 유럽의회 공금을 당으로 빼돌린 "시스템"에서 르펜이 "핵심적 역할"을 했다고 판단했다.
다만 4년형 중 2년에 대해선 집행유예, 2년에 대해선 가택연금이 선고돼 르펜이 당장 수감되진 않는다. 이날 관련 혐의로 르펜 외에도 전현직 유럽의회 의원들을 포함한 국민연합 간부, 당직자 20여 명에 유죄가 선고됐다.
르펜은 이번 유죄 판결로 인해 5년 간 공직 출마가 즉시 금지됐다. 2027년에 치러질 프랑스 차기 대선에 출마할 수 없다는 의미다. 항소심에서도 법원의 판단이 바뀔 것으로 보장할 수 없고 대선 전까지 판결이 내려지지 않을 수 있어 사실상 출마가 막혔다는 평가다.
법원은 출마 즉시 금지를 결정하며 이미 형이 선고된 사람이 대선에 출마하는 것이 허용될 경우 재범 위험 및 "공공질서에 중대한 교란"이 일어날 수 있다는 점, 반성의 기미가 없는 점 등을 고려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출마 즉시 금지 결정과 관련, 법원은 르펜이 대통령에 당선될 경우 선고를 유지하기 어려워 "법치주의가 훼손될 우려"가 있고 "모든 프랑스 유권자가 부패하지 않은 선거를 할 권리를 특정 후보에게 투표할 부분적 유권자들의 권리보다 크게 본 것"이라고 짚었다.
유럽의회의 프랑스 의원인 발레리 아예는 성명을 통해 "사법 체계 독립과 권력 분립은 우리 민주주의의 심장"이라며 "아무도 법 위에 있지 않다"고 판결을 환영했다.
르펜도 일단 차기 대선 출마 자격이 "박탈됐다"고 인정했다. 르펜은 프랑스 TF1 방송에 "분명히 하자. 나는 (대선 출마 자격이) 박탈됐다. 하지만 실제론 수백 만 프랑스인의 목소리가 박탈된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다만 법원이 "정치적 결정"을 했다고 주장하고 "나는 무죄이기 때문에 항소할 것"이라고 밝혔다.
당의 얼굴인 르펜의 출마 금지로 국민연합이 타격을 받을 것은 분명해 보인다. 르펜은 2022년 조던 바르델라(29)에 당대표를 넘겼지만 경험이 부족한 바르델라가 르펜을 대체하긴 이르다는 관측이 나오는 상황이다. 31일 발표된 프랑스 여론조사기관 IFOP 조사에 따르면 차기 대선에서 르펜 지지율은 34~37%로 유력 후보들 중 가장 높았다.
미 CNN 방송은 앙투안 브리스티엘 여론조사 분석원이 국민연합 지지자들 사이 "르펜의 이름에 대한 충성도가 있다"며 "르펜 없이 바르델라가 대선에서 이길 능력이 있을까?"라고 의문을 제기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지난해 트럼프 대통령이 유죄 평결을 받고도 이를 이용해 사법 체계에 대한 신뢰를 흔들고 지지자를 결집시키는 데 성공해 당선되며 프랑스 민주주의 또한 혼란으로 접어들 수 있다는 우려도 크다. 유죄가 횡령 혐의에 관한 것인데도 바르델라는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오늘 마린 르펜만 부당하게 비난 받은 게 아니다. 프랑스 민주주의가 살해당했다"고 주장했다.
트럼프 대통령, 머스크 등 미 정부 인사들도 법원 판결에 부정적 반응을 보이며 혼란을 조장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31일 백악관에서 취재진에 이번 판결이 "매우 큰일"이라며 유죄 판결을 받고도 지난 대선에 출마한 자신의 경험과 유사점을 강조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르펜)는 5년간 출마가 금지됐다. 그리고 그는 유력 후보다. 이는 이 나라(미국)와 매우 비슷하게 들린다"고 말했다.
CNN은 "국민연합 지지자들에게 이 판결은 시스템이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조작됐다는 믿음으로 작용"하고 있고 르펜 또한 "사법 시스템이 무기화됐다고 주장한다"며 이는 트럼프 대통령 주장과 매우 유사하다고 짚었다.
머스크 또한 소셜미디어를 통해 "급진 좌파가 민주적 투표를 통해 승리할 수 없을 때 그들은 사법 체계를 남용해 반대자들을 옥에 가둔다. 이는 전세계 표준 각본"이라는 근거 없는 비방을 쏟아냈다. 태미 브루스 미 국무부 대변인도 31일 언론 브리핑에서 르펜 판결 관련 질문을 받고 "정치 과정에서 사람들을 배제하는 것은 미국에서 트럼프 대통령을 상대로 벌어진 공격적이고 부패한 법률전을 고려할 때 특히 우려스럽다"고 밝혔다.
<뉴욕타임스>(NYT)는 저명한 정치학자 알랭 뒤아멜이 "정치적 대전의 다음 직접적 목표물은 법치가 될 것"이라며 "국민연합뿐 아니라 중도 우파도 최고 법원을 공격할 것"이라고 우려했다고 전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정치적 결정을 내리는 것은 법원의 일이 아니다"라며 "이런 비난이 제기되는 것은 민주주의의 근본 원리인 법치에 대한 존중이 서방 전역에서 얼마나 약화됐는지 보여준다"고 개탄했다.
러시아 및 유럽 극우도 프랑스 법원 공격에 가담하며 유럽 극우 결집이 심화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러시아 크렘린(대통령궁) 대변인은 "물론 우린 프랑스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다"면서도 "점점 더 많은 유럽 수도들이 민주주의 규범을 위반하는 길로 가고 있다"고 근거 없는 주장을 펼쳤다.
극우 성향의 이탈리아 부총리 마테오 살비니는 "유권자의 판단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종종 법원의 판결에 안심한다. 파리에서 그들은 마린 르펜을 비난하고 정치 생활에서 배제하고자 한다"고 주장했다.
이번 판결을 계기로 프랑스 극우가 아버지 장 마리 르펜에서 마린 르펜으로 이어진 극단적 이미지에서 벗어나 저변을 넓힐 수 있을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정치 분석가 도미니크 모이시는 CNN에 국민연합 일부가 이번 판결을 은밀히 환영하고 있을 수 있다고 추측했다. 모이시는 판결이 "르펜의 이름"에 얽매이지 않는 "더 젊고 더 넓은 대중에 구애할 수 있는 후보"인 바르델라로의 권력 이동을 촉진할 수 있다고 봤다.
<AP> 통신은 이러한 상황을 종합하면 이번 판결이 프랑스 유권자들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단정하는 것은 아직 이르다고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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