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발 대혼란, 윤석열발 내란이 던지는 동일한 물음

[장석준 칼럼] 문명 차원의 전환으로 시작되고 끝나가는 신자유주의 시대

헌법재판소의 시간이 너무 길어지고 있다. 탄핵심판 선고가 늦어질수록 민심은 흉흉해지고 시민들의 가슴은 타들어간다. 얼마 전만 해도 "이러다 나라가 망하는 것 아니냐"는 탄식은 과장이나 기우쯤으로 취급됐지만, 지금은 아무도 그럴 수 없다.

2025년 봄, 대한민국의 시간은 이토록 팽팽히 긴장되어 있다. 하루하루 살아가기 벅찰 정도다. 다만 한 가지 위안거리가 있다면, 지금 한국인들만 이런 시간을 살고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전 세계가 들썩이고 있다.

무엇보다도 미합중국 새 행정부가 임기 시작하자마 쏟아내는 기상천외한 발언과 결정들이 온 세상을 뒤흔들고 있다. 덩달아 팔레스타인에서는 다시 불꽃이 치솟고, 유럽에서는 몇 세대만에 처음 듣는 핏발 선 격문이 나돌며, 곳곳에서 민주주의 후퇴 조짐과 이에 맞서는 저항의 소식이 잇따라 들려온다.

2025년 봄, 인류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살아온 풍경과는 확연히 다른 미지의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 어쩌면 작년 말에 시작된 한국 사회의 혼란도 이런 전 지구적 공통 운명의 한 변주일지 모른다.

▲24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정문 앞에서 열린 헌재의 윤석열 대통령 탄핵 심판 선고 기일 신속 지정 촉구 소추단 기자회견 도중 헌재 깃발이 펄럭이고 있다. ⓒ연합뉴스

문명 차원의 전환으로 시작되고 끝나가는 신자유주의 시대

2기 트럼프 정부가 쏟아내는 충격적인 성명과 정책들은 집권 1기의 연속선에 있지만 그 폭과 깊이가 과거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 2기 트럼프 정부는 단순히 유럽연합 지도자들과 충돌하는 게 아니라 유럽 국가들이 아예 새로운 동맹을 찾아 헤매도록 내몰고 있다. 익숙한 감세 정책을 반복하는 차원을 떠나 유서 깊은 연방정부 기관들의 돌이킬 수 없는 해체를 감행하고 있다. 이미 미국 사회에 존재하던 극우적 요소들을 정치적으로 동원하는 수준을 넘어 이런 요소들을 조합한 새로운 '상식'을 국가기구에 각인하려 한다.

이것은 2016년에 이어 다시 한 번 미국 유권자들이 불장난 같은 선택을 하는 바람에 닥친 일시적인 혼란인가? 아니면 온 인류의 미래에 지울 길 없는 영향을 끼칠 모종의 혁명이 시작됐다는 신호인가? 두 번째 물음에 주저 없이 "예"라고 답하기에는 아직 이른 것 같다. 그러기에는 트럼프 정부의 행보가 아직 '건설'보다는 '파괴' 쪽에 치우쳐 있다. 하지만 첫 번째 물음에는 자신 있게 "아니요"라고 답할 수 있겠다. 지금 트럼프 정부가 지구 위에 풀어놓고 있는 혼란은 분명히, 반세기 전에 신자유주의 시대가 시작될 무렵과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시대는 결코 선거로 뽑힌 정치 지도자들의 정연한 정책 재조정으로 시작되지 않았다. 인위적인 디플레이션이나 외환위기, 외채위기로 나타나든 군부 쿠데타로 폭발하든, 숱한 혼란과 대규모 사회 투쟁을 겪으며 신자유주의는 태동했고, 자리 잡았다. 그 과정에서 국민국가 수준의 세력균형이나 정책조합이 바뀌었을 뿐만 아니라 보통사람들의 삶의 세계가 개조됐고 지구질서의 틀이 새로 짜였다. 생활세계, 국민국가, 지구질서, 이 세 수준이 각기 변화하고 서로 엇물리면서 우리가 지금껏 살아온 신자유주의 체제를 탄생, 지속시켰다(장석준, <신자유주의의 탄생: 왜 우리는 신자유주의를 막을 수 없었나>, 책세상, 2011).

생활세계부터 지구질서에 이르는 현대 인간 생활의 모든 층위에 걸친 변화라면, 그것은 정책이나 제도 수준을 넘어 문명 수준의 변화라 할만하다. 신자유주의 시대를 분석하고 이후 시대의 방향을 짚는 대표적인 두 저작, 피에르 다르도 외 <내전, 대중혐오, 법치: 신자유주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정기헌 옮김, 원더박스, 2024)와 파올로 제르바우도 <거대한 반격: 포퓰리즘과 팬데믹 이후의 정치>(남상백 옮김, 다른백년, 2022)는 서로 상당히 다른 현실 진단을 제시하면서도 이 점에서만은 일치한다. 두 책 다, 신자유주의 시대는 문명 차원의 전환을 통해 등장했으며 따라서 새로운 시대 역시 그만큼 심원하고 광대한 문명적 전환을 통해서만 나타날 것이라고 시사한다.

'신자유주의'라는 이름 그대로, 반세기 전의 전환은 '자유주의'라는 모호한 단어와 중첩되는 여러 주제를 맴돌며 전개됐다. 생활세계 수준에서는, 자유로운 삶에 관한 대중의 상상력을 개인 간 경쟁, 인적자본 관리, 자기계발 등등으로 채우는 문화혁명이 소름끼칠 만큼 철저히 관철됐다. 국민국가 수준에서는 국가가 유권자에게 책임을 져야 한다는 전후 자유주의 신조가 집중 공격을 받았고 대신에 국가가 [금융]시장에 책임을 지는 것이 자유주의 문명의 새로운 표준이 되었다. 그리고 지구질서 수준에서는 남반구 신생국가들('신국제경제질서NIEO' 운동 등), 현실사회주의 블록 등의 도전을 차례로 제압한 미국이 유일패권국으로서 '자유주의' 문명의 이름 아래 이 모든 질서의 꼭짓점 역할을 했다.

오늘날 2기 트럼프 정부 출범과 함께 거대한 태풍으로 비화하고 있는 온갖 소용돌이는 50여 년 전의 이 전환에 대한 반동작용이라 할 수 있다. <거대한 반격>에서 제르바우도가 말하는 바로 그 recoil[사격할 때 총의 반동] 말이다.

우선 생활세계를 지배하는 고립, 경쟁, 자기책임의 문화는 여성의 진출, 고등교육 확대와 지식중간계급 증가, 정보화 혁명 같은 다른 시대 변화와 맞물려 젠더 전쟁, 능력주의(지능의 독재), 온라인 혐오 문화로 변주된다. 다수 대중은 이런 거센 물결에 휩쓸리며 일상적 '내전'에 동참하거나 아니면 그 허무를 치유할 영적 의지처를 갈구하다 종교근본주의 등에 쉽게 빠져든다. 트럼프주의와 같은 영악한 정치 사조는 막연하게 '자유주의'라는 적을 지목함으로써 서로 결이 다른 이 모든 반동작용을 혼란스럽게 뒤섞고 이로부터 파괴적 힘을 끌어낸다.

이 힘을 바탕으로 집권한 2기 트럼프 정부는 1기에 비해 훨씬 더 과감하게 지구질서의 대변형을 꾀하고 있다. 이 변화는 미국 단일지배체제의 버팀목이던 미국-중국 협력관계가 균열을 일으키면서 시작됐다. 하지만 변화의 속도를 높인 세력은 뜻밖에도, 미국, 중국에 비해 턱없이 허약한 역량을 반동적 이데올로기('유라시아주의')와 호전성으로 메우려 한 또 다른 핵무장 제국 러시아였다. 이렇게 기존 질서가 무너진 상황에서 트럼프 정부는 미국 단일지배체제의 다른 이름이던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짐을 벗어버리겠다고 공언한다. 아마도 미국, 중국, 러시아, 이 세 제국이 '공존'하는 지구질서를 상정하는 것 같다. 세 나라를 뺀 나머지 200여 국가의 '공존'은 종잡을 수 없는 문제가 돼버렸지만 말이다.

마지막으로 국민국가 차원에서 신자유주의 시대에 대한 반동작용은 신자유주의 태동기와 마찬가지로 '자유주의'의 유산을 재검토, 재배열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트럼프 정부의 경우는 '주권', '보호', '통제'(<거대한 반격>)의 시각에서 자유무역은 폐기하되 자유기업은 강조하는 식으로 경제적 자유주의의 내용을 다시 쓰고 있다. 그러면서 미국의 흔들릴 수 없는 전통으로 이해되던(혹은 오해되던?) 정치적 자유주의의 원칙들을 충격적으로 훼손하고 있다(의회와 법원의 위에 선 대통령의 초헌법적 통치).

한편 트럼프주의에 맞서 새 활로를 찾는 독일의 새 정부(기독교민주연합-사회민주당 대연정)는 자주국방 예산 확보를 위해 재정보수주의라는 독일식 자유주의의 금과옥조에서 벗어나는 결단을 단행했다. 이 역시 '자유주의'의 의미에 지워지지 않을 자국을 남길 '세계사적' 결정이다. '자유주의 국제질서'에서 철수하겠다는 미국 정부가 내준 숙제 앞에서 이제는 독일뿐만 아니라 모든 나라가 나름의 입장과 관점에서 감히 이런 결단에 나서지 않으면 안 될 처지다.

▲ 16일(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대통령 전용기인 에어포스원에서 기자들과 만나 질문에 답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내란 '이후' 시대의 과제 – 우리의 맥락에서 문명적 전환의 방향 찾기

이렇게 문명 차원의 전환을 강요받는 시기에는, 그간 일상에서 당연시하던 원리나 이념, 제도를 하나하나 다시 따져봐야 한다. 새로운 문명으로 나아가기 위해 계속 짊어지고 나아가야 할 것이 무엇이고, 단호히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이며, 낯설지만 두 팔 벌려 받아들여야 할 것이 무엇인지, 묻고 또 물어야 한다. 이런 물음들의 답을 찾기도 쉽지 않지만, 물음 자체를 아예 회피한다면 격변기에 한갓 미아 신세가 될 뿐이다.

그러고 보면 지금 대한민국 시민들이 겪는 내란 사태도 이런 문명의 재검토-재구성 과정과 무관하지 않다. 윤석열 일당이 시대 상황을 진지하게 고민하여 친위쿠데타를 일으켰다는 황당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 시대에 필요한 '정치'를 회피하고자 일으킨 어리석은 친위쿠데타를 시민들이 진압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시대의 핵심 과제와 즉각적으로 대면하지 않을 수 없다는 뜻이다.

평소 '자유민주주의'를 입에 달고 살던 윤석열이 12월 3일 밤 위헌-위법적 '비상계엄'을 선포하자 수많은 시민이 득달같이 국회의사당 앞으로 모여들어 국회의 비상계엄 해제 결의를 엄호했다. 그 추운 밤, 시민들이 거리에 나선 이유는 무엇인가? 단지 '윤석열'이 국회를 공격했기 때문은 분명 아니다. 공격 받는 '국회'를 지키려고 나선 것이다. 대의제, 권력의 분산과 견제, 법치 같은 정치적 자유주의의 핵심 원리를 수호하기 위해 목숨 걸고 맞선 것이다.

그날 밤 시민 대열 가운데에는 더불어민주당 지지자도 있었지만, 진짜 '좌파'라 할 민주노총, 사회운동단체, 진보정당 깃발을 든 이들도 있었다. 윤석열에 충성하는 우파는 정치적 자유주의 원리를 침해했지만, 그 순간 그곳에 나타난 좌파는 오히려 이 원리를 문명의 필수 토대로 인정하고 어떤 일이 있어도 이를 지키려 한 것이다. 이것이 이들 좌파를 비롯한 대한민국 시민 다수가 지난 몇 달간 확인한 합의다. 말하자면 12. 3 쿠데타에 맞서는 가운데 한국 사회는 정치적 자유주의가 미래에도 반드시 고수하고 발전시켜야 할 전통이자 가치임을 확인했다.

하지만 이 확인 과정은 고통스럽기만 하다. 정치적 자유주의 원리를 살려나가야 한다는 다수 시민의 합의를 확인했지만, 이런 원리를 구현하기 위해 움직여야 할 담당 집단들이 적어도 현재로서는 그럴 의지나 능력이 박약함 또한 확인했기 때문이다. 권력의 분산과 견제나 법치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각 국가기구의 집행 책임자들이 그런 원리에 따라 움직일 태세를 갖춰야 하지만, 지난 몇 달간 한국의 국무위원, 검찰, 경찰, 법원 등등은 그렇게 움직이지 않았다. 한국 사회는 정치적 자유주의 원칙을 내면화한 엘리트를 키워내는 데 실패했다. 이 또한 요즘 같은 시대에 아프게 파헤쳐 봐야 할 문명 차원의 점검 사항이다.

이런 점검 작업은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다. 아니, 내란 진압을 둘러싼 시급한 과제들을 우선 해결한 뒤에 더욱 전 방위적으로 전개되어야 할 것이다. 가령 '광장'을 그저 닫는 게 아니라 시민들의 일상 속에 숱한 작은 '광장'들로 증폭시키는 일은 신자유주의 시대가 남긴 상처를 치유하면서 생활세계를 그와는 다른 원리(연대)로 재조직하는 과제의 다른 표현이다. 또한 새 정부 출범 뒤에 당장 직면해야 할 '트럼프 세상'은 지구적 차원에서 새로운 소통과 동맹의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벅찬 과제를 제기할 것이다.

그리고 내란과 파시즘의 뿌리를 뽑기 위한 사회대개혁은 양대 정당의 감세 경쟁 따위를 뛰어넘어 21세기에 필요한 국가 역량은 과연 어떠해야 하는지, 이에 발맞춘 정책 대전환 방향은 또 무엇인지, 묻고 답하도록 채근할 것이다. 더불어, 내란 진압 과정에서 재평가된 정치적 자유주의 원칙에 바탕을 두면서도 그보다 더욱 풍부해진 민주주의를 실현하려면, 대한민국 헌정에 대한 영속적 토론(개헌의 정치)이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요점은 현재 전 지구적으로 몰아닥치는 문명 전환의 바람과, 한국 사회에 느닷없이 닥친 횡액 같아만 보이는 내란 진압을 하나로 아울러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미 이뤄진 모든 사건과 다가오는 모든 조짐을 이 대전환에 담대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다그침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만 한다면, 5천만 시민을 '내란 신경증'에 빠뜨린 이 참사조차 발전-진보 신화의 최신판이었던 'K-단꿈'을 정말 제때에 깨운 소음, 무의미하지만은 않았던 나팔소리로 기억될 것이다.

▲ 12월 3일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로, 계엄군이 국회 본청 진입을 시도하고 있다. ⓒ프레시안(박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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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준 전환사회연구소 기획의원은 오랫동안 진보 정당 운동의 정책 및 교육 활동에 참여해왔으며, 자본주의 위기에 맞선 진보적 사회과학을 재구성하고자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에서 연구 및 출간 사업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레프트 사이드 스토리 : 세계의 좌파는 세상을 어떻게 바꾸고 있나>, <사회주의>, <장석준의 적록 서재>, <신자유주의의 탄생 : 왜 우리는 신자유주의를 막을 수 없었나>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국가 대 시장 : 지구 경제의 출현>, <안토니오 그람시 : 옥중수고 이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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