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사진집일까, 수학책일까, 역사의 기록일까?

[최재천의 책갈피] <지우지 마시오> 제시카 윈 글, 조은영 번역

아름다운 책을 만났다. 아름다운 책은 생각과 추억의 실타래를 끌어당긴다.

"수학자는 화가나 시인처럼 패턴을 만드는 사람이다." (수학자 G.H 하디) 패턴은 칠판에 표현된다. 그래서 칠판과 (이제 한국에서 생산하는 하고로모)분필은 수학자가 일할 때 가장 자주 쓰는 방식이자 도구가 된다.

"음악가가 제 악기와 사랑에 빠지듯 수학자는 제 칠판을 사랑한다." "칠판과 분필에 이은 마지막, 그러나 결코 덜 중요하다고 볼 수 없는 세 번째 요소는 칠판 지우기이다…수학자들은 칠판을 닦으면서 머릿속도 함께 비운다. 말끔해진 칠판과 깨끗해진 머리, 새롭게 시작할 준비 완료다." (수학자 필리프 미셀)

몇 년전 특강을 할 일이 있었다. 자유로운 주제였다. 주최측에 부탁을 던졌다. 반드시 칠판과 하고로모 분필을 구해달라고. "요즘 시대에 무슨 칠판과 분필입니까." 했다. 칠판에 분필 글씨를 써가며, 날리는 먼지를 마시고 툭툭 부러지는 분필을 마치 잘못 쓴 원고지 구겨던지듯, 바닥에 던져대는 감각을 모처럼 느낄 수 있었다. 그마저도 이제는 잃어버린 시간이 되어간다.

수학을 싫어했다. 사실상 수학포기자였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첫째 아이는 자연과학 박사과정에 있다. 수학을 부전공했다. 어느 날 아이가 물리학 공부를 하며 수식을 적어가는데 노트가 10페이지, 20페이지, 30페이지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놀람이었다. 아니, 놀람의 연속이었다. 어떻게 문장을 끌고가는 것도 아닌데 수식을 그렇게 몇십 페이지까지 끌고 가며 해답을 찾아가는지. "재미있어." "응. 재밌어." 나중에 그때 노트를 집으로 가져와달라고 했다. 소중한 보물이 됐다. 수식으로 가득 찬 노트는 '보물함'에 넣어두었다.

'수학자들의 칠판'을 사진과 수학자들의 목소리로 기록했다. 책 제목조차가 아름답다. <지우지 마시오 DO NOT ERASE> 사진 작가인 제시카 윈이 기록으로 남겼다. 사진 작품집일까. 수학 책일까. 아니다. 역사의 기록일까. 그것도 아니다. 이것은 철학 책이다. 자문이 또 있다. 책은 보는 걸까. 읽는 걸까. 이 책은 읽었다고 해야할까. 보았다고 해야할까. 책을 본다는 것은 눈으로 본다는 걸까 아니면 입으로 소리내어 읽는다는 걸까.

서문의 마지막도 아름답다.

"나를 초대해 자신의 일을 기록하게 하고 우리를 둘러싼 세상에는 분필 가루 자욱한 먼지투성이 방 안에 감춰진 발견과 진리, 미스터리와 아름다움이 있다는 증거를 들고 나오게 허락한 수학자 여러분께 깊이 감사한다."

▲<지우지 마시오> 제시카 윈 글, 조은영 번역 ⓒ단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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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

예나 지금이나 독서인을 자처하는 전직 정치인, 현직 변호사(법무법인 헤리티지 대표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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