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미국 우선주의'를 영향력 확대의 기회로 활용
2025년 중국 양회(兩會)가 지난 3월 4일~11일 베이징에서 개최됐다. 중국 양회는 중국 헌법상 최고권력기관인 전국인민대표대회(全國人民代表大會, 이하 전인대)와 정책자문기구인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中國人民政治協商會議)를 의미하며, 중국 대내외 정책의 방향성을 가늠하는 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3월 7일 '중국 외교정책과 대외관계'라는 주제로 열린 기자회견에서 왕이(王毅)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 겸 외교부장은 "(미국이) 협력을 선택한다면 상호 이익과 공동 번영에 이를 것이다. 그러나 계속 압력을 가한다면 중국은 단호히 반격할 것"이라면서도 미·중 양국이 '상호존중', '평화공존', '협력·공동번영'의 원칙에 기반해 미·중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야 함을 강조했다.
중국이 트럼프 행정부의 대중 추가 관세에 반발하며 보복 관세 조치로 맞대응하고 있는 현재 상황을 고려하면, 이것은 중국의 기존 입장을 재확인하는 발언으로 평가할 수 있다.
또한 바이든 행정부에 대해서 냉전적 사고방식으로 중국과 제로섬 게임을 벌이며 혼란과 분열을 심화하고 있다고 비난했던 과거 발언과 비교할 때,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추가 관세 등으로 중국을 압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원칙론적 입장을 표명한 것은 상대적으로 유화적 태도를 보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트럼프 2기 행정부의 대중 압박과 견제가 거세질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에서 미국과 불필요한 갈등을 피하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그러나 기자회견 전체 내용을 보면, 중국은 트럼프 행정부의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 정책에 대한 국제사회의 우려와 불만을 부각하며 미국의 글로벌 리더십에 대한 의구심을 확산하고자 했다.
기자들은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 정책, 우크라이나 전쟁 종식을 위한 미국과 러시아 간 협상,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정책, 트럼프의 가자 지구 소유 및 팔레스타인 이주 선언, 미국의 아시아 지역 내 중거리 미사일 배치 계획, 파나마 등 남미에 대한 트럼프 행정부의 압력 등을 질문했다.
중국의 주요 기자회견에서 기자들이 질의 전에 중국 당국과 협의해야 하는 관행을 고려하면, 중국은 이를 통해서 트럼프 2기 행정부가 미국의 이익이라는 명목 하에 일방적이고 불공정한 행위를 하고 있음을 드러내려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왕이는 트럼프 행정부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과 비난을 자제하면서도 중국은 트럼프 행정부와는 다르게 국제사회 구성원들과의 협력을 중시하고 공동번영을 위해 노력하고 있음을 강조했다.
예를 들어, 미국 우선주의 정책에 대해서 그는 "강대국은 이익만을 추구하거나 약자를 괴롭히면 안 된다"면서 중국은 '인류운명공동체'를 제시하고 인류의 공동 이익을 추구하고 있음을 강조했다. 더 나아가, 그는 중국이 지속적으로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 등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는 물론, 유럽과도 공동의 이익과 발전을 위한 협력관계를 강화해 나갈 것임을 공언했다.
트럼프 2기 행정부는 미국 우선주의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가치나 동맹보다 경제적 이익을 중시하면서 미국이 구축한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훼손하고 있다. 이미 우크라이나 전쟁 종식과 유럽 안보를 둘러싸고 미국과 유럽 간의 분열과 갈등이 표출되고 있다.
양회 기자회견의 내용을 볼 때, 중국은 트럼프 2기 행정부의 대외정책이 바이든 행정부 시기 추진했던 대중 포위망의 균열과 혼란을 초래할 뿐 아니라,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글로벌 리더십에 대한 의구심을 확산함으로써 오히려 자신의 글로벌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중국은 이 기회를 활용해 트럼프 2기 행정부의 고립주의적 대외정책과의 차별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더욱 적극적으로 외교를 확대하고 각 지역에서 다자협력관계를 구축하려 할 것으로 전망된다.
양회 기간 중국 재정부는 2025년 외교 예산을 작년 대비 8.4% 늘린 645억 600위안(약 12조 8000억 원)으로 책정했다고 발표했다. 이는 국방예산 증가율 7.2%보다 높은 수치이다. 또한 중국은 경제 하방 압력에도 불구하고 일대일로(一帶一路) 협력을 확대하고 글로벌 사우스에 대한 지원을 더욱 강화해 나갈 뿐 아니라 다른 국가들과 협력해 글로벌 거버넌스 체제를 개혁해 나갈 것을 공언했다.
녹록치 않은 중국의 경제 상황을 고려하면, 향후 트럼프 2기 행정부의 고율 관세 부과와 미‧중 무역전쟁이 현실화되었을 때 중국이 이러한 외교 기조를 지속할 것인지는 예단하기 어렵다. 그러나 2025년은 항일 전쟁 및 세계 반파시즘 전쟁(2차 세계대전) 승리 80주년, 유엔 창립 80주년,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6.25 전쟁) 75주년, 중국-EU 수교 50주년이 되는 해이다.
또한, 중국은 2025년 상하이협력기구(SCO) 의장국이기도 하다. 중국은 이를 계기로 다양한 정치행사를 개최하고 국가원수 외교나 고위급 다자회의를 통해서 '인류운명공동체', '글로벌발전이니셔티브' 등 중국의 글로벌 담론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려 노력할 것이다. 자유무역, 다자주의, 경제발전을 주창하며 중국은 미국과 달리 '책임 있는 대국'으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인식을 국제사회에 확산하고, 중국의 글로벌 영향력 확대를 모색할 것이다.

미국의 대중 디커플링을 돌파하기 위한 과학기술 혁신
리창(李强) 중국 총리는 전인대 '정부업무보고'에서 AI, 바이오, 양자기술, 6G 등 첨단산업 육성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며 과학기술 혁신에 더욱 집중하겠다고 공언했다. 이를 위해서 중국은 2025년 연구개발 관련 예산을 작년 대비 10% 늘린 3981억 900만 위안(약 80조 원)으로 책정했다.
2025년은 중국이 14차 5개년 계획(2021~2025)을 마무리하고 15차 5개년 계획(2026~2030)을 수립하는 해이자, 4차 산업혁명 분야의 첨단기술과 제조업을 결합해 세계 제일의 제조 강국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중국제조 2025'의 제1단계(2015~2025)를 마치고 제2단계(2025~2035)를 시작하는 시기이다. 그런 점에서 첨단산업 육성 방안 제시는 중국이 앞으로 더욱 적극적으로 자국의 첨단기술 혁신과 국산화에 집중할 것이라는 의지를 피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바이든 행정부가 중국의 기술 발전을 견제하기 위해서 '마당은 작게, 담장은 높게(small yard, high fence)'라는 선별적 기술 수출 통제 정책을 시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최근 첨단기술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내고 있다. 예를 들어, 2025년 1월 공개된 중국 AI 모델 '딥시크-R1(DeepSeek-R1)'은 챗GPT 등 기존 AI 빅테크 모델과 비슷한 성능을 보이면서도 저비용으로 개발되어 큰 주목을 받았다.
3월 4일에 공개된 중국의 초전도 양자컴퓨터 '주충즈 3.0(Zuchongzhi 3.0)'은 세계 최고 성능의 슈퍼컴퓨터보다 1조 배 빠른 것으로 알려졌다. 2015년도에 '중국제조 2025'를 제기하고 차세대 정보기술, 신소재, 우주항공 등 10대 미래 전략산업을 육성해 온 중국의 입장에서 이러한 성과는 고무적인 일이다. 이에 대해서 왕이는 "봉쇄가 있는 곳에 돌파가 있고, 탄압이 있는 곳에 혁신이 있다"면서 중국의 기술 굴기에 대한 자신감을 드러냈다.
트럼프 2기 행정부는 바이든 행정부와는 달리 중국과 '전략적 디커플링(strategic decoupling)'을 추진하고 중국에 대해 전방위적인 기술 수출 통제 정책을 시행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최근 첨단기술 성과에 고무된 중국은 트럼프 행정부의 대중 압박에 대응하는 수단으로 첨단기술의 국산화와 혁신 역량 제고를 통한 정면 돌파를 선택했다고 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 중국은 이미 중국 빅테크 기업에 대한 정책 기조를 수정했다.
지난 2월 17일 열린 민영기업 좌담회에는 딥시크 창업자 량원펑(梁文鋒), 휴머노이드 로봇기업 유니트리(Unitree) 창립자 왕싱싱(王興興)은 물론, 빅테크 기업 규제의 희생자였던 알리바바(Alibaba) 창업자 마윈(馬雲)도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시진핑 주석은 민영기업의 잠재력과 역할을 강조하는 한편, 향후 빅테크 기업 규제를 완화하고 민영경제 발전을 위한 다양한 정책을 시행할 것이라고 공언했다.
이를 볼 때, 중국 정부는 첨단산업을 육성하고 기술 혁신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시장에 개입하고, 관련 기업에 대한 정책적 지원을 강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에 따라 중국 정부의 정책적 지원을 불공정한 경쟁으로 인식하는 미국 등 서방과의 갈등은 더욱 첨예해질 것이다.
하지만 중국은 첨단기술 혁신을 실현하고 미‧중 전략경쟁에서의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이를 감내하려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성과를 경제협력과 인프라 구축이라는 명목으로 디지털 격차(digital divide)에 직면한 글로벌 사우스에게 전파하려고 할 것이다.
이는 중국 기술을 다양한 지역과 국가에 확산하고, 특히 글로벌 사우스의 대중 기술 의존도를 높임으로써, 미국의 대중 디커플링을 어렵게 할 것이다. 이에 따라 기술 블록화와 국제 표준 경쟁이 치열해질 전망이다.
한국에 대한 함의
앞에서 보았듯이 중국은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를 우회적으로 비난하며 이것을 자국의 글로벌 영향력 확대의 기회로 인식하고 다른 국가와의 관계를 조정하고 있다. 즉, 미‧중 관계가 중국 외교의 최우선 순위이고, 중국은 미‧중 관계의 관점에서 타국과의 관계에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한‧중 관계도 예외가 아니다.
미국 대선 직후인 2024년 11월 8일 중국은 한국인 입국 비자 면제 조치를 시행하며 한‧중 관계 개선의 메시지를 보냈다. 11월 15일에는 페루 리마에서 열린 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한‧중 정상회담이 성사되기도 했다. 한국 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2023년 미국 샌프란시스코 APEC 회의에서 한‧중 정상회담이 불발된 것과는 달라진 모습이다.
그러나 이러한 중국의 대한국 유화 정책과는 달리 올해 양회 기자회견에서 왕이는 한국이나 한‧중 관계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그가 2023년 양회 기자회견에서 한국 기자의 질문을 받고 한반도 문제에 대한 중국의 입장을 설명한 것과는 대조된다.
최근 한국 내에 중국이 선거에 개입했다는 주장이 제기되는 상황에서 한국 및 한‧중 관계에 대한 언급이 불필요한 오해와 반발을 야기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했을 수도 있다. 혹은, 탄핵 정국과 이로 인한 한‧미 정상외교 공백 상황 때문에 한국의 전략적 가치를 낮게 인식했을 수도 있다.
중국으로서는 현 상황이 트럼프 2기 출범과 맞물려 한‧미동맹의 불확실성을 높인다면, 한국은 중국과의 관계를 중시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미국에 경사된 한국 외교도 미‧중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는 방향으로 전환될 것이라는 기대가 있을 것이다. 우리가 현실화되는 관세전쟁의 파고 속에서 가치동맹에만 기대어 선처를 바라는 것은 전략 부재에 해당한다.
지금은 근거 없는 낙관론을 접어두고 철저히, 그리고 냉정하게 한국에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한·미 동맹을 강화하고 한‧중 관계를 개선해야 할 때다. 이를 위해 중국에 대한 한국의 전략적 가치를 높이는 고민과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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