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연방정부 인력 감축 칼자루를 쥔 정부효율부(DOGE) 수장 일론 머스크의 집중 포화를 받은 미 대외 원조 기구 국제개발처(USAID)가 사실상 폐쇄되면서 빈곤·분쟁 지역 인도주의 활동이 마비되리라는 우려가 나왔다. 비선출직인 머스크 팀이 정부 재무 및 인사 시스템에 접근하는 등 월권을 행사하며 여론도 싸늘해지고 있다.
6일(이하 현지시간) <뉴욕타임스>(NYT)는 사실상 폐쇄 수순에 돌입한 국제개발처 인력이 약 1만4000명에서 290명 가량으로 대폭 축소될 것이라고 이 계획을 아는 세 소식통을 인용해 보도했다. 조 바이든 정부에서 국제개발처 공중보건 부처장을 맡은 아툴 가완디는 소셜미디어(SNS)에 이 기관으로부터 온 메일을 공개하며 직원 중 294명만 남게 되고 아프리카 담당자는 12명, 아시아 담당자는 단 8명에 그치게 된다고 비판했다. 이 기관 인력 대부분은 7일부터 무기한 행정 휴가에 들어간다.
국제개발처는 최근 머스크와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집중 포화를 받아 왔다. 머스크는 이번 주 자신이 소유한 소셜미디어 엑스(X)를 통해 근거 없이 국제개발처를 "범죄 조직", "미친 돈 낭비", "급진 좌파의 정치적 심리 작전"이라고 비난하고 "죽어야 할 때"라고 공격했다. 트럼프 대통령도 지난 2일 국제개발처가 "급진적 광인 무리"에 의해 운영돼 왔다고 주장하고 "이들을 내쫓고 난 뒤 (기관의 미래에 대한) 결정을 내릴 것"이라며 머스크가 "좋은 일을 하고 있다"고 추켜세웠다.
1961년 존 F. 케네디 정부에서 대외원조법에 따라 독립 기관으로 출범한 국제개발처는 인도적 목적으로 전세계 빈곤, 질병 등을 완화하고 저개발국 경제 성장을 지원하는 역할을 해 왔다. 지난달 발표된 미 의회조사국 보고서에 따르면 회계연도 2023년 기준 우크라이나, 에티오피아, 요르단, 소말리아, 시리아 등이 이 기관의 가장 큰 수혜를 받았다.
국제개발처 폐쇄 시도는 취임하자마자 "미국의 이익과 일치하지 않는다"며 대외 원조를 동결한 트럼프 정부 기조와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이 기관 설립 배경이 냉전 시대 원조를 통해 국외에서 소련의 영향력에 대항하려는 것이었음을 감안할 때 기관 폐쇄가 미국의 이익에 일치하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트럼프 대통령이 견제하는 중국은 대외 투자를 통해 영향력을 확대 중이다. 당장 트럼프 대통령이 아메리카 대륙 전반에 대한 야심을 드러낸 가운데 남미 국가들만 해도 중국의 해외직접투자(FDI) 및 대출로 인해 중국 쪽으로 기울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는 상황이다.
<AP> 통신은 미국이 대외 원조에 사용하는 돈은 2023년 회계연도 기준 400억 달러(약 57조7600억 원)가량으로 연방 예산의 1% 미만이지만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인들은 대외 원조가 예산의 30%를 차지하는 것으로 잘못 생각하고 있다고 짚기도 했다.
<로이터> 통신은 트럼프 정부의 대외 원조 동결과 국제개발처 폐쇄 수순으로 기아에 대응하는 전세계 시스템이 마비되고 있다고 우려했다. 이 상황에 정통한 국제개발처 전 고위 당국자인 마르시아 웡은 인도주의 단체들이 미 국무부의 승인을 기다리며 50만 톤의 식량이 보관 및 운송에 난항을 겪고 있다고 전했다. 통신은 수단과 가자지구에서 식량과 생필품 구입을 위한 미국의 현금 지원도 중단됐다고 보도했다. 이어 통신은 국제개발처가 마비돼 인도주의 단체들이 긴급 식량 지원 비용을 받는 데도 난관을 겪고 있다고 복수의 소식통을 인용해 덧붙였다.
국재개발처가 명목상 유지되더라도 그 기능은 대폭 축소된 채 국무부 산하로 들어가리라는 전망도 나온다. 지난 3일 마코 루비오 미 국무장관은 자신이 국제개발처장 대행이라고 밝힌 바 있다. 미 NBC 방송은 국제개발처가 이전에는 이란 등 미국과 수교하지 않은 나라들도 지원했지만 국무부 산하로 들어갈 경우 작동 방식이 달라질 수 있다고 짚었다. 루비오 장관은 6일 도미니카공화국 방문 중 기자회견에서 "미국은 대외 원조를 할 것이지만, 이는 합리적이고 우리 국익에 부합하는 원조일 것"이라고 말했다.
브라이언 샤츠 민주당 상원의원이 3일 성명을 통해 "국제개발처는 연방법에 따라 만들어졌고 의회에서 자금을 지원한다. 도널드 트럼프와 일론 머스크는 펜을 휘둘러 이를 없앨 수 없다. 법을 통과시켜야 한다"고 비판하는 등 의회를 거치지 않은 이 기관 폐쇄는 법적 문제에 직면할 수 있다. 그러나 미 NPR 방송은 트럼프 정부가 이 기관을 공식 폐쇄하지 않은 채 자금을 삭감하고 인원을 줄이는 방식으로 기능을 마비시켜 문제를 피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머스크 팀은 최근 민감한 정보가 담긴 정부 재무 및 인사 시스템에도 접근해 보안 우려를 키웠다.
6일 <워싱턴포스트>(WP)는 머스크의 정부효율부 요원들이 연방 직원 수백만 명의 민감한 정보가 보관돼 있는 인사관리처(OPM) 자료에 접근했다고 복수의 미 당국자를 인용해 보도했다. 인사관리처 기록엔 연방 직원들의 개인정보, 급여, 징계 이력 등이 소상히 담겨 있다.
신문은 트럼프 대통령 취임 당일 이미 6명의 효율부 요원이 인사관리처 시스템에 접근했고 이후 3명이 더 접근했으며 이들이 내부 자료를 변경하고 소프트웨어를 설치 및 변경할 수 있는 "관리" 권한을 갖고 있다고 보도했다. 인사관리처의 한 관계자는 효율부 요원들이 누군가의 새 기록을 넣을 수 있고 기존 기록을 수정 및 삭제할 수 있는 데다 "현재 또는 과거에 정부에 고용됐던 사람들에 대한 모든 자료를 비정부 서버, 개인 컴퓨터나 구글 드라이버, 혹은 외국으로 내보낼 수 있다"고 우려했다.
신문은 인사관리처의 특정 기록은 과거 정부에선 백악관의 제공 요청조차 거부될 정도로 민감한 자료라고 한 당국자가 설명했다고 덧붙였다.
효율부 요원들은 최근 통상 소수의 공무원만 접근할 수 있는 재무부 결제 시스템에 접근하기도 했다. 재무부는 지난 4일 이들에게 열람권(read only)만 부여됐다고 설명했다.
효율부 요원들은 정부 경험이 없고 일부는 머스크의 회사에서 근무하는 20대 초반을 포함한 젊은 엔지니어들로 구성돼 있다고 알려졌다. 6일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재무부 결제 시스템에 접근한 효율부 요원 중 한 명인 마르코 엘레즈(25)가 소셜미디어에 인종차별적 게시물을 올린 것이 드러난 뒤 사임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워싱턴포스트>는 보안 전문가들이 재무부와 인사관리처의 이러한 혼란을 틈타 러시아, 중국, 이란 등이 사이버 침입을 시작하거나 머스크 팀의 장치와 통신을 표적으로 삼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고 전했다. 신문은 사이버보안 전문가 마커스 허친스가 인사관리처에 새 사용자와 기기가 연결될 때마다 위험이 커진다며 "내가 중국, 러시아, 이란이라면 암호화되지 않은 하드 드라이브에 민감한 연방정부 자료를 가지고 돌아다니는 한 무리의 대학생들(효율부 요원)과 신나는 기회를 누렸을 것"이라고 꼬집었다고 보도했다.
머스크의 이러한 행태에 소송과 시위 등의 반발이 커지고 있다. 머스크의 정부 관여에 대한 여론도 싸늘해졌다.
<AP> 통신에 따르면 6일 뉴욕주, 애리조나주, 캘리포니아주 등 13개주 법무장관은 효율부가 민감한 개인정보가 담긴 연방 결제 시스템에 대한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한 소송을 제기한다고 밝혔다. 이들을 성명을 통해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인 일론 머스크는 '안 된다'는 말에 익숙하지 않지만 우리나라에선 누구도 법 위에 있지 않다"며 "대통령은 자신이 선택한 사람에게 우리 개인 정보를 줄 권한이 없으며 의회가 승인한 연방 지원금을 삭감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여론도 머스크로부터 멀어지고 있다. 여론조사업체 유고브가 지난 2~4일 미국 성인 1604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응답자의 13%만이 머스크가 트럼프 정부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길 바란다고 답했다. 이는 지난해 11월 같은 기관 조사에서 나온 27%에 비해 크게 줄어든 것이다. 이번 조사에서 응답자의 절반에 가까운 46%가 머스크가 트럼프 정부에 영향력을 "전혀" 행사하지 않기 바란다고 답했다.
<워싱턴포스트>는 최근 복수의 여론조사에서 머스크에 대한 부정적 견해가 급증하고 있다며 "머스크가 트럼프 대통령에 문제가 될 수" 있으며 무기력했던 민주당이 머스크를 목표물로 결집해 트럼프 정부에 대한 공세에 나섰다고 지적했다.
민주당 의원들은 이번주 머스크의 재무부 시스템 접근 및 국제개발처 폐쇄 시도에 항의하는 시위에 적극 합류했다. 척 슈머 상원 민주당 원내대표는 4일 재무부 앞에서 열린 "아무도 일론을 선출하지 않았다!" 집회에서 연설에 나서 "일론 머스크와 작은 조직의 사람들이 은밀하게 문 뒤에서 우리 사생활, 돈, 모든 것을 없애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렉 카사르 민주당 하원의원은 5일 하원 감독위원회 청문회에서 "일론 머스크 해고"라고 적힌 팻말과 함께 "이 청문회는 정부 규모 적정화에 대한 것이라고 들었다. 그래서 나는 가장 위험한 인물인 일론 머스크 해고를 연방정부 규모 적정화의 시작으로 삼자고 제안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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