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디부터 정해진 길은 없다. 방향을 정하고 가다보니 없던 길이 뚫렸던 것이다. 길 위에 있더라도 가야할 방향을 정하지 못하면, 길을 잃었다고 한다. 방향을 정했더라도 그 방향으로 길을 뚫지 못하면, 또 길을 잃었다고 한다. 지금 우리 사회는 길을 잃었다. 방향을 정하지 못하여 다시는 돌아가면 안 되는 길로 뒷걸음치기도 하고, 방향을 정했더라도 길을 뚫지 못하여 오고가던 길들 사이로만 하염없이 헤매고 다니기도 한다.
공동체가 길을 잃었을 때 길을 찾도록 돕는 것이 학술이다. 수많은 논란으로 갈피를 잡기 어려울 때 충돌과 분쟁으로 치닫지 않도록 담론을 정리하고, 대안이 나오지 않을 때 정체되지 않도록 논리를 펼치고 새로운 문명의 지평을 제시하여야 하는 임무가 학술에 주어져 있다. 공동체도 그런 임무 수행에 대한 기대로 역사 이래 학술 영역을 배려하고 지원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학술은 공동체와 더불어 길을 잃었다. 연구 논문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지만 공동체에 대한 학술적 기여는 점점 위축되고 있다. 공동체로서도 학술 영역을 배려하고 지원해야 할 이유를 찾기가 어려워졌다. 지원이 적어진 환경에 적응하느라 연구자는 공동체의 여타 구성원과 다를 바 없이 각자도생을 자연법칙처럼 수용하여 무한경쟁 체제를 가속화하게 되었고, 학문후속세대조차 안정적으로 생산하지 못하여 학술생태계의 여러 영역이 붕괴되고 있다. 제 살 길도 찾지 못하는 학술에 공동체가 무슨 미련을 남겨두겠는가.
그렇다고 연구자들이 논문의 계량적 평가 체제에 완전히 투항한 채 각자도생에 노심초사하면서 골방 문을 닫아걸고 공동체의 고통에 무심한 작금의 현상을 관습으로 아주 굳혀버린다면, 학술이 오히려 공동체의 우환거리가 될 것이며 학술 자체의 길마저 완전히 끊길 것이다. 공동체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공동체가 가야 할 길을 뚫는 데에 기여해온 지적 전통을 지금 여기에서 다시 복원해야 한다.
독립 열망으로서의 의실구독(依實求獨)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실학(實學)은 본디 있던 학문이 아니다. 공동체의 고통과 마주하고 공동체의 현실을 돌파하려는 지식인들이 필요에 의해 만들어온 학문이다. 실학은 20세기 초반 민족적 독립과 학술적 독립의 필요에 의해 구성되기 시작하였고, 20세기 중후반 근대화와 민주화의 필요에 의해 정립되었다. 실학이 구성되고 정립되어 온 과정을 살펴보면서 공동체의 고통과 마주했던 지식인들의 지적 전통을 이을 길을 상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
"무릇 학술에서 귀중한 것은, 작고 은밀한 것을 뚜렷하게 밝혀내고 본말과 시종을 드러냄으로써 인민의 삶을 보좌하는 것이다."(정인보, 성호사설 서문, 이익, <성호사설 유선>, 문광서림, 1929, 5면)
정인보(鄭寅普, 1892~1950)가 1929년 실학자 성호 이익(李瀷, 1681~1763)의 <성호사설 유선>을 간행하면서 서문에 적은 말이다. 은밀한 것을 드러내고, 본말을 파악하는 등의 모든 학술 활동의 가장 고귀한 목표는 공동체의 삶을 개선하는 것이라는 명제로서, 학술이 나아갈 방향을 정리한 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정인보가 이 서문을 적어가던 시기는 제국주의 일본이 조선을 병탄한 지 20년가량 지난 식민지시기였다. 10년가량 지났을 때 3.1운동이 민족적 저항으로 끓어올랐고, 곧이어 임시정부도 수립되었다. 그러나 다시 10년이 지나도록 독립은 손에 잡히지 않고 있었다. 양심적 지식인의 노선을 견지하고 싶어도 길을 잃지 않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전통 지식을 활용하여 국학의 범주를 확장하며 근대화 계몽의 동료로서 한몫을 담당하던 최남선(崔南善, 1890~1957)이 조선총독부 부설 조선사편수회에 합류하여 양심적 지식인들에게 좌절감을 안겨준 해가 1928년이었다.
이 대목에서 정인보는 학술과 공동체의 관계를 숙고하며 지식인의 자세를 다잡고 있었던 것이다. 위의 선언 뒤에 이어지는 대목에서 정인보는 학술로 공동체의 발전에 기여하는 과정을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학술은 실제에 기반하여 독자성을 추구해야 하고, 그렇게 하여야 학술에서 가장 소중히 여기는 핵심 이치를 터득할 수 있으며, 핵심 이치의 효능이 다시 인민과 만물에 드러나게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정인보는 공동체의 현실에 기반하여 핵심 이치를 터득하고, 다시 핵심 이치가 공동체의 이익에 복무하는 과정으로 학술의 전체 순환 활동을 설정해본 것이다. 이 전체 과정을 달성한 학문으로서 실학자 성호 이익의 학문을 내세우며 정인보는 "의실구독(依實求獨)의 학문"이라고 지칭하였는데, 그 말 자체가 실제에 기반하여 독자성을 추구하는 학문이라는 말이니 학문이 기반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부각하는 것으로 전체 과정을 제유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공동체와 학술의 관계에 대한 정인보의 선언은 간단한 듯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야 할 맥락을 담고 있다. 민족의 학술이 추구해야 할 민족적 독자성은 민족이라는 역사적 실체를 통해 추구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한쪽에 담으며, 그 공정을 통해 확보되는 이치의 효능이 삶을 개선해주는 대상은 인민과 만물이라 하여 민족의 범주에만 갇힌 것이 아니라 세계와 우주까지 포괄한다는 주장을 다른 한쪽에 담으려 하였다. 식민지 조선의 독립을 지향하는 민족적 독자성이 세계 문명의 보편성으로 연결되는 구조로 맥락화한 것이다.
정인보는 이 글에서 의실구독의 맥락을 실현하는 논리를 여러 가지 제시하고 있는데, 그중 을지문덕에 대한 평가 문제를 보면 맥락을 좀 더 분명히 이해할 수 있다. 고구려 을지문덕은 살수대첩을 통해 수나라 양제의 침공을 완벽하게 물리쳤고, 수나라는 침략 실패의 결과로 나라가 망하는 지경까지 초래하였다. 조선후기의 성리학자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은 이 행위 자체가 중화 문명을 존중하는 존화(尊華)의 의리를 배반한 것이므로 비난받을 행위라는 것을 전제한 후, 다만 수나라 양제는 아비를 죽이고 아비의 후궁을 간음한 흉역한 자였으니 을지문덕의 행위는 도덕 문명을 바로잡은 것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는 기록을 남겼다.(송시열, 평양부(平壤府) 을지공(乙支公) 사우기(祠宇記))
정인보는 발끈하였다. 수나라 양제의 도덕적 하자가 없었다면 고구려 침공 자체는 정당하다고 보는 것이 옳은 것인가, 토지와 인민이라는 주권적 실체가 있는 고구려가 자기의 정치적 독자성을 부정해야 했는가, 수나라도 존화의 대상인 중국 민족이니 그들의 침공을 환영해야 했겠는가 하고 되묻는다. 게다가 공자가 존화의 의리를 주장한 것은 자기의 민족적 독자성에서 나온 자각을 뿌리로 하는 것인데, 각자가 자기의 실체에 기반하여 독자성을 추구해야 한다는 의실구독의 그 뿌리는 무시하고 공자에게서 말단으로 발현된 존화의 의리만 따르는 성리학자들은 몽매한 것이 아니냐고 비난하였다. 송시열은 자신의 의실구독을 추구할 생각을 못하고 중국인들의 존화사상이라는 말단에 부화뇌동하여 타인의 의실구독에 투항한 것이니 몽매하다는 것이다. 존화는 중국 민족의 경계 안에서만 가치가 있는 것이고 우리 민족은 별도의 가치를 갖는 우리 민족의 독자성을 추구해야 한다고 보았고, 각자의 공동체를 기반으로 한 의실구독의 학문들로서만 국제적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보았다. 조선이 독립해야 할 학술적 근거와 독립될 조선의 학술이 세계 문명의 보편에 기여할 바를 함께 제시하려 한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20세기 전반기의 실학(實學)
정인보를 위시하여 식민지시기 일군의 지식인들은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서세(逝世) 100주년을 전후하여 정약용을 재발견하고 각종 강연회 및 학술연구를 활발히 전개하며 식민지 조선의 현상을 돌파할 담론을 구하고자 하였다. 이 시기의 정약용을 비롯한 양심적 지식인의 계보를 구상하고 학술 담론을 정비하여 대중적 계몽에 나섰던 일련의 사업 전체를 "조선학운동"이라고 부른다.
이 조선학운동의 핵심은 바로 조선후기 양심적 지식인 계보에 대한 연구였다. 정약용을 비롯한 조선후기의 걸출한 양심적 지식인들이 역사에서 아주 묻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1930년대 식민지 지식인들이 요구하는 인상을 고스란히 갖고 있던 것도 아니었다. 황현(黃玹, 1855~1910)은 19세기말까지 정약용의 저술 중에 <흠흠신서>와 <목민심서>가 지방 행정과 형사 소송에 절실한 실용적 가치가 있어서 수백 본의 이본이 떠돌아다니고 있다고 기록하였다.(황현 저, 임형택 외 역, <역주 매천야록> 상, 문학과지성사, 2005, 108면) 조선왕조 행정 체계 아래에서 활용할 만한 실용적 가치만 부각되고 있었으며, 진보적 개혁의 가치는 거의 주목받지 못하고 있었다. 식민지 상황에 의미 있게 적용할 만한 해석을 새로이 수행해야 했다.
정인보를 비롯한 민족주의 계열의 문일평(文一平, 1888~1936)과 안재홍(安在鴻, 1891~1965) 등의 지식인들은 다산 정약용에게서 조선후기 현실을 돌파할 개혁가 이미지를 찾으려 하였고 그것을 통해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돌파할 에너지를 얻으려 하였다. 특히 현상윤(玄相允, 1893~?)은 다산 정약용의 개혁이 "성공되었다면 필연적으로 구미 물질문명이 훨씬 용이하게 또는 일찍이 조선에 수입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현상윤, 이조 유학사상의 정다산과 그 위치, <동아일보>, 1935.7.16.) 조선이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를 받게 된 내재적 원인을 쇄국주의로 인한 조선의 지연된 개화에서 찾았던 당시 지식인의 현실 인식에서 나온 주장이다. 정약용의 개혁을 수용하지 못한 조선후기의 실패로 인해 식민지 현실을 맞게 된 것이니, 식민지 현실에서라도 정약용의 개혁 정신을 공부하고 계승해보자는 취지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의도에서 정인보는 다산 정약용의 마음을 우리의 마음에서 찾아내어 "널리 탐구하는 것이 하나에 집중되기를 목적으로 하고, 한 몸을 큰일에 바치기를 결심"하자고 하였다.(정인보, 다산선생의 생애와 업적, <동아일보>, 1935.7.16.) 여기서 집중해야 할 하나는 민족공동체이며 몸 바쳐야 할 큰일은 공동체의 고통을 구제하는 일이다. 공동체를 구하자는 양심적 지식인의 주장은 당시 큰 호소력을 얻는다. 1935년 9월 8일 '다산 정약용 선생 서거 99주년 기념회'에서 학술발표를 들은 청중들은 눈물을 흘릴 지경이었다는 보도 기사가 남아 있다. "각 지방에서 온 학자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한국의 지난 역사를 다시 한번 회상하니 감개무량하였다. 강연자의 열렬한 웅변에 상하 2층에 모인 천여 명의 숨소리가 거칠어지며 모두 눈물을 머금었다."(<신조선> 1934.9.) 천여 명의 시민이 학술 강연장에 모여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예사롭지 않다.
이 시기 민족주의 계열의 지식인들은 다산 정약용 등을 조선후기 개혁사상가로 재해석해내고 그것을 통해 식민지 현실을 돌파할 에너지를 얻고자 하였기에, 조선후기 개혁사상을 품은 양심적 지식인의 계보를 구상하고 적극적으로 의미를 부여하였다. 이익․정약용 외에도 남인 계열의 안정복․윤동규․신후담․이병휴․이중환 등이 소환되었고, 소론 계열의 정제두․최명길․이이명 등이 부각되었으며, 노론 계열의 홍대용․박지원 그룹 등이 거론되면서 당파도 다르고 활동 양상도 달랐던 이들을 묶어줄 하나의 개념이 필요하였다. 처음에는 현실학파․경제학파․실증학파 등 다양한 개념어가 경쟁하다가 20세기 중반 실학(實學)으로 정리되었는데, 원래 유학 이외의 학문을 허학(虛學)으로 지칭하며 유학의 가치를 강조할 때 사용되던 개념이었다. 20세기 새로운 개념으로서의 실학에는 실용․실천․실증․실심 등의 내포가 담기게 되었다. 실사구시(實事求是)의 방법론을 내포의 핵심으로 제시하기 위해 '실사구시설'을 지은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가 20세기 중후반 실학자로 포함되어 부각되기도 하였다.
20세기 후반기의 실학(實學)
해방 이후 실학 연구는 대학을 기반으로 하는 본격적인 학술장의 영역을 확보하였다. 당색과 지향 등을 고려하여 경세치용파(經世致用派)․이용후생파(利用厚生派)․실사구시파(實事求是派)로 실학의 계보를 정리하고, 현재 우리가 실학에 대해 갖고 있는 인상 대부분을 완성하였다. 공동체의 현실에 깊이 참여하려는 식민지시기 양심적 지식인들이 구축한 실학 연구를 계승한 해방 이후의 연구자들은 현실에 필요한 담론을 찾아내는 것을 하나의 전통으로 삼았다.
"조선후기 실학은, 첫째로 전근대의식에 대립되는 근대의식 내지 근대지향의식, 둘째로 몰민족의식에 대립되는 민족의식을 척도로 하여 재구성된 조선후기 유학의 개신적 사상으로서 '조선후기에 일어난 개신유학'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다. 그 두 척도는 서로 별개의 것이 아니라 민족의 존립 번영을 전제로 한 근대지향, 근대지향을 전제로 한 민족의 존립 번영이라는 일체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천관우, 한국실학사상사, <한국문화사대계> Ⅵ,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70, 1044면)
20세기 중후반 실학 연구를 담론적으로 주도하던 천관우(千寬宇, 1925~1991)는 근대주의-민족주의 결합 담론을 실학의 핵심으로 제시한다. 서구적 근대화에 뒤쳐서 식민지를 겪게 되었다는 결핍감과 침략적 제국주의에 맞선 저항적 민족주의로 독립을 추구했다는 자부심이 결합한 근대주의-민족주의 결합 담론은, 일부 개발독재정권의 주장과 겹치기도 했지만 1960~70년대의 상황에서 일정하게 진보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전근대 조선의 양심적이고 개혁적인 지식인의 계보를 완성해 놓고 근대주의를 찾으려는 20세기 후반 당시 실학 연구의 경향은 "자본주의 맹아론" 혹은 "자생적 근대론" 등으로 불리는데, 제국주의 일본의 개입 없이는 근대를 이룰 수 없었다는 "정체성론"에 대한 비판 이념을 제공하였다. 전근대 지식인에게서 매우 근대적인 개념인 민족주의를 찾으려는 당시 실학 연구의 경향은 친일파 세력과 그 비호 세력인 당시 정권을 비판하는 감성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20세기 말부터는 근대주의와 민족주의가 한국 사회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어 왔다. 인간과 자연을 착취하는 자본주의적 근대의 파괴적 속성에 대한 각성과 더불어 침략과 차별의 깃발인 민족주의에 대한 반감이 충분히 설득력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감각으로 훑어보면 이 시기 실학 연구는 학술의 공과 과가 착종된 느낌이다. 다시 그러나 개혁적이고 양심적인 지식인의 전통으로서 실학자의 상을 구현한 실학 연구는, 개혁과 양심의 가치를 연구 현장에서 완전히 망각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 시기 실학 연구의 정점이 근대주의-민족주의 결합 담론에 머물러 있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우리가 가정한 '분단시대 사학'에 있어서의 실학자는 근대지향적 사상가나 민족주의자일 것이 요청되었지만, '분단시대 이후의 사학'이나 그것을 지향하는 사학에 있어서는 민중의 편에 서서 그 권익을 옹호하는 진보적이고 양심적인 지식인으로서의 실학자, 민중에게서 진정한 민족의 주체를 구하고 민족 내부의 모순을 타개하기 위한 이론 전개에 앞장섰던 사상가로서의 실학자가 요구될 수도 있을 것이며 따라서 그들의 사회사상이나 경제사상이 한층 더 빛을 내게 될 것이다."(강만길, 실학론의 현재와 전망, <창작과비평>, 1974 겨울호, 1139면)
실학사상에서 민족주의와 근대지향성을 탐색해온 연구 경향이 분단시대 사학의 특징이라면, 분단시대 이후를 지향하는 사학은 그 특징을 발전시켜서 진보적이고 양심적인 지식인의 상을 추구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근대화의 필요에 의한 담론을 완성한 동시에, 1970년대에 민주주의의 필요에 의한 담론을 제출한 것이다. 지금은 당시보다는 소홀히 여기는 개념이 되었지만, 당시 분단은 남한 사회의 모든 모순과 질곡을 설명해줄 만한 고통의 근원으로 인식되었다. 실학을 통해 분단시대의 극복과 진정한 의미의 도덕적 민족국가 수립의 과제를 제기하여, 시대에 대한 대응으로서 실학의 이념을 다시 천명한 것이다.
21세기 양심적 지식인의 지적 전통을 되살리는 길
1970년대 실학연구자들은 양심적 지식인의 지적 전통에 따라 공동체의 필요에 대한 대응으로 학술의 위상을 정립하였다. 그들의 주장이 산업화 세력의 구호와 일부 맞물리기도 하였지만 기본적으로 그들은 남한 사회의 비인간적 퇴영에 저항하였다. 양심적 지적 전통을 계승하였다는 학문적 자부심으로, 식민지시기의 잔영인 식민사관과 해방 후의 후진국 변방 의식 및 군사정권시대의 개발독재주의와 싸우며 학술 담론을 생산하였던 것이다.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작업이었다.
그러나 그 담론 층위는 이제 퇴적물 아래 깔렸고, 우리는 21세기의 지층 위에 서 있다. 21세기 우리 공동체의 동료 시민들이 겪고 있는 고통은 20세기와는 또 다른 양상이다. 경제규모와 문화수준에서 세계 일류를 넘보는 사이에도 자본과 권력이 만들어놓은 약자들의 지옥은 한없이 깊어졌다. 멀쩡해 보이는 직장을 가진 사람들도 무한경쟁의 연옥에서 혹독한 단련을 받으며 몸과 마음이 너덜거리고, 그 좌우에서 멀쩡한 일을 하는 사람은 한 시간 일해서 햄버거 1.8개를 콜라 없이 먹을 돈이 생긴다. 아예 착취당할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사람들이 거리를 메우고 있고, 자식에게 차마 노예 이하의 삶을 물려줄 수 없는 사람들은 진작에 연애도 결혼도 포기했다.
학술연구자들도 이 지옥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 아니다. 정인보의 말처럼 내가 받는 이 고통이 나만의 것이 아님을 마음 깊이 느낄 때 공동체와의 간격이 소멸되는 것이 아니겠는가.(정인보, 양명학연론, <담원정인보전집> 2, 238면.) 간격 없는 학술 담론이야 말로 의실구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학술은 전통적으로 문명의 최첨단에 놓여 있었다. 1차적 감각과 욕망을 넘어 인위적으로 구성해온 문명의 힘으로 인류가 여기까지 온 것이고, 학술은 문명의 첨병 역할을 해왔다. 이제 학술연구자들 자신이 공동체의 고통 받는 시민의 한 사람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공동체가 한 단계 높은 문명으로 나아갈 길을 모색해야 하지 않을까. 학술이 살고 공동체가 사는 길이 거기서 뚫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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