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가 눈이 멀게 된 거죠. 모르겠어,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어요. 응, 알고 싶어. 나는 우리가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눈은 멀었지만 본다는 건가.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
-<눈먼 자들의 도시>(주제 사라마구, 정영목 옮김, 해냄)
2010년에 작고한 포르투갈 소설가 주제 사라마구의 대표작 <눈먼 자들의 도시>의 끝부분에 나오는 대화다. 쉼표와 마침표 이외의 문장부호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 독특한 구두법 사용으로 유명한 사라마구의 문체를 확인할 수 있는 문장이다.
대화를 대화로 구분되지 않게 전하는 이런 구두법을 택한 의도는 소외의 상황이나 주체의 흐릿해짐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역으로 화자 식별을 위해 독자가 더 집중하게 만드는 효과를 거둘 수도 있다.
구두법 못지않게 특이한 건 등장인물의 이름이다. <눈먼 자들의 도시>에선 사람이 고유명사로 명명되지 않는다.
‘안과 의사’나 ‘선글라스 쓴 여자’처럼 일종의 보통명사로 인물이 구분된다. 이런 장치는 등장인물에겐 소외를, 독자에게 문학의 보편성을 부여한다. 소설의 인물이 겪는 고통에 거리를 확보하며 내용에 더 몰입하게 하는 기능 또한 엿볼 수 있다. 구두법과 함께 이같은 등장인물 명명법은 <눈먼 자들의 도시>를 소설의 형식 면에서 돋보이게 하고 사라마구 표 소설의 특징이 된다.
흥미로운 이름은 ‘눈물을 핥아주는 개’이다. 현실에서 개의 이름은 ‘고유’하지 않다. 이름을 가진 개가 많지만 그것은 누구의 개를 표현하는 다른 방식이다. 고유명사인 사람 이름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자기 존재와 연결되는 데 반해 개의 이름은 주인과 관련해서만 유효하다. 따라서 소설에 나오는 개를 그냥 개나 통상의 관점을 받아들인다면 ‘안과 의사 부인을 따라다니는 개’ 정도로 해도 되는데 ‘늑대와 함께 춤을’처럼 작가는 ‘눈물을 핥아주는 개’로 호명해 인간보다 더 강한 주체성을 부여한다. 사실상 개만이 유일하게 고유명사로 지칭된 셈이다. 일종의 유머이자 드러나지 않게 신성 혹은 은총을 개입하는 사라마구식 소설 작법으로 이해된다.
소설은 “노란불이 들어왔다”로 시작해서 “도시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로 끝난다. 인용문은 마지막 단락 전의 대화여서 작가의 핵심 전언이 들어있다. 노란불이라는 게 상징적이다. 빨간 신호등과 푸른 신호등 사이의 노란 신호등이 들어온 유예의 짧은 상황에서 운전자가 눈이 멀고, 곧 이 기이한 전염병으로 도시의 모든 사람이 눈이 먼다. 단 한 사람만 빼고.
작품에서 눈이 먼 것은 픽션 속에서 물리적 사실이지만 작품으로서 당연히 명백한 은유이다. 인용문에서 “처음부터 눈이 멀었다”고 말한 것은 인간 존재의 편협함과 에고의 감옥을 뜻한다. 그러나 “눈이 멀었지만 본다.” 마치 보는 것처럼 보지만 보지 못하는 인간 인식의 한계를 지적한다. 각각이 인간의 존재론과 인식론을 뜻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화자가 하려는 말은 다음에 나온다. 실제로는 눈이 멀지 않았다. 실제로는 눈이 멀지 않았지만, 보지 않는 사람이 눈먼 사람이라는 진단이다. 자기 이익과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정의와 선을 외면하는 세태의 풍자이다. 자신이 속한 사회의 냉혹한 현실과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려 들지 않는 태도를 비판한다.
“우리가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라는 말은 원래 당연히 볼 수 있는 것을 못 본척하다가 자기성찰을 통해 볼 수 있음을 인정하게 된다는 말이다. 눈을 뜰 필요가 없었다. 애초에 눈이 멀지 않았기에, 그저 보기만 하면 됐다. 물론 쉬워 보이는 그 일이 쉽지는 않다. 자기성찰이 필요한 일은 항상 어렵다.
이 상황을 주체의 의지와 무관한 맹목성의 강제를 뜻한다고 받아들일 수도 있다.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더 많은 정보를 접하지만 정보의 홍수 속에서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는 비판적 사고 기능의 마비를 지적한다고 풀이할 수 있다. 그때는 우리가 의지를 상실한 게 아니라 길을 잃을 것이다. 만일 현실이 그런 것이라면 그 상황은 디스토피아이다. 오직 한 사람인 눈 뜬 이가 난국을 타개해야 하는데, 한 사람과 나머지에게 모두 참담하다. 가정하여 현실에서 유일하게 눈을 뜬 한 명이 있다면 그가 소설의 인물처럼 인도적이고 도덕적이지 않은 확률이 매우 높다.
만일 모두가 길을 잃은 것이 아니라면 작가의 관점에서 가장 나쁜 사람은, 그냥 못 보는 게 아니라 보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이다. 인용문과 별개로 앞에 “보이는 것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이 가장 심하게 눈이 먼 사람”이란 표현이 나온다. 당연히 모르고 짓는 죄보다 알고 짓는 죄가 더 크다.
인용문은 플라톤의 ‘동굴의 우화’를 떠올리게 한다. 인용문뿐 아니라 소설 전체가 플라톤의 우화의 구조와 닮았다. ‘동굴의 우화’에서 사람들은 동굴에 갇혀 벽만 보도록 결박당해 앉아 있으며, 그들은 뒤에서 비치는 불빛에 의해 벽에 드리워진 그림자만을 볼 수 있다. 이데아에 해당하는 실체는 보지 못하고 실체의 그림자를 보는 처지이다.
‘보는 것’ 자체는 가능하지만, 진리, 실체 혹은 이데아를 보지 못하는 모습은 소설과 ‘동굴의 우화’에서 공통적이다. 동굴 속 사람에게 주어진 결박이 풀 수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에 따라 세계 해석과 해법이 달라진다. 이것 또한 소설과 우화에서 공통적이다. 절대 풀 수 없는 결박이라고 하여도 영원한 맹목에서 벗어나려는 의지가 있다면 그 자체로 의의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사라마구의 작품세계를 흔히 환상적 또는 마술적 리얼리즘이라고 설명한다. 기본적으로 리얼리즘이다. 판타지 소설과는 판이하다. 상상력과 아이러니를 결합한 그의 소설은 판타지를 활용하지만 리얼리즘을 표방한다. 자기성찰과 현실비판이 그의 소설 정신이란 얘기다. 1998년 노벨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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