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역학, 예수를 말하다

[인문견문록] <신학, 과학을 만나다>

국내 유일의 물리학자 겸 천주교 신부인 김도현 대구 가톨릭대학교 교수의 책 <신학, 과학을 만나다>(서강대학교출판 펴냄)는 매우 흥미로운 책이다. 뉴튼과 과학의 본격적 등장은 종교를 황폐화시켰다. 과학과 결합한 자본주의는 기술이성을 발달시켰고 이것은 인간 사회와 문명에 여러 차례에 걸쳐 괴멸적 타격을 가했다. 그 결과 문명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 내면에는 상처만 남게 되었다. 묻지마살인이 미국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져도 남의 일이라 생각했다. 어느덧 일본, 한국을 거쳐 중국에서조차 다수 대중을 상대로 한 묻지마살인이 발생한다. 묻지마살인을 개인의 잔혹한 일탈이 아니다. 이것은 어느 사회 속에서 건강한 삶이 가능한지 불가능한지를 가리키는 지표종적 사건이다. 이런 사회는 거대한 가역적 변화를 만들어내지 않는다면 붕괴에 직면하게 된다. 교제살인 역시 하루가 멀다하고 발생한다. 작년에만 40건을 훌쩍 넘었다. 각박한 사회가 살인자를 대대적으로 만들어낸다. 사회의 각박함은 종교적 심성의 퇴조와 깊은 연관이 있다. 그래서 사회를 되살리려면 새로운 사회제도만이 아니라 종교적 심성에 대한 거시적 안목의 변화도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김도현 교수의 책은 이런 상황을 고려하면 매우 의미 있는 책이라 할 것이다.

저자 김도현교수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과학은 양자물리학이다. 저자는 양자물리학의 중요 개념들을 통해 그리스도론과 삼위일체론 및 예수부활 사건의 설명을 시도한다. 먼저 저자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주장을 꺼내든다. 아퀴나스의 주장은 이렇다.

"첫째, 창조주인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직접적인 인식은 불가능하다."
"둘째, 하느님의 속성은 피조물들의 속성을 통해 일부나마 유비적으로 파악될 수 있다."

"셋째, 자연 안의 모든 피조물들은 관찰자의 참여를 통해 경험적 세계의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실재로서 관찰되고 해석된다."(상기책인용 미기재시동일)

아퀴나스의 주장의 핵심은 이런 것이다. 우리 인간이 하느님을 직접 알 수는 없지만 하느님이 펼쳐놓은 많은 존재들에 대한 유비를 통해 인식할 수 있다. 저자는 아퀴나스의 주장을 인용하며 말한다.

"하느님의 속성은 피조물들의 속성을 통해 유비적으로 파악될 수 있다. 그런데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의 속성 중에서 '물리적 속성'은 근본적으로 양자물리학에 입각해 있다."

저자는 이제 신적 계시를 양자물리학에서 탐색하기 시작한다.

고전물리학에 따르면 입자와 파동은 정반대의 성질을 가졌다. 양자물리학에 따르면 미시세계 안의 모든 물리적 대상은 입자와 파동의 성질을 동시에 지닌다. 이것을 '파동-입자 이중성'이라 부른다. 닐스 보어는 물리적 대상의 입자성과 파동성이 '상호보완적'인 측면으로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상보성'이라 불렀다. 저자는 상보성을 이렇게 규정한다.

"상보성은 하나의 대상이 경우에 따라 입자 혹은 파동으로 보일 수 있지만, 절대로 '시간적으로 동시에 입자이면 파동일 수는 없음'을 의미한다."

양자물리학에는 세계에 대한 관찰자의 '관측' 행위가 매우 중요하다. '관측' 활동을 해야지만 입자든 파동이든 결정되는 것이다. 또한 멀리 떨어진 두 개의 입자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양자얽힘'도 중요하다. 저자는 양자역학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려 한다. 어떻게 가능할까?

지식인들이 기독교를 믿기가 힘든 이유 중 하나는 예수라는 인간을 신으로 믿는다는 사실이다. 우리처럼 밥먹고 화장실 가는 사람이 신일 수 있을까? 빼어난 지성을 보여 온 역사학자 김기협 선생이 천주교신자가 된 것을 알고 필자는 어색한 느낌을 받았었다. 구세주를 믿는 지식인이란 적어도 필자의 뇌에는 없던 개념이었다. 저자 김도현은 인간이 신일 수 있음을 양자물리학을 통해 설명한다. 신이자 인간, 인간이자 신이란 개념은 예전부터 정립되어온 교설이다. 칼케돈 공의회(451년)에서 나온 정식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모두 거룩한 교부들을 따라 일치된 마음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한분이시고 같은 성자이심을 고백하도록 가르친다. 바로 예수 그분께서는 신성에서 완전하시고 같은 분이 인성에서 완전하시며, 같은 분이 참으로 하느님이시고 이성적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진 참으로 인간이시다."(상기책인용 미기재시 동일)

현대 인본주의의 영향사 속에서 급진적인 지식인들은 예수를 인간으로만 위치시킨다. '보살 예수'를 주장하는 종교학자 오강남 교수나 역사적 예수를 주장하는 예수세미나의 도미닉 크로산이 대표적이다. 많은 지식인들이 여기에 찬동하는 분위기다. 오강남의 책 <예수는 없다>(현암사 펴냄)을 보면 캐나다 최대교단인 연합교회 총회장인 빌 핍스(Bill Phipps)는 예수의 신성과 부활을 부정한다. 이슬람에서도 인간의 신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무조건 믿으세요'로는 이 문제가 온전히 풀리지 않는다. 그래서 지식인들은 예수를 좋은 사람, 또는 위대하여 신이 된 인간 즉 보살로 숭배한다. 노무현 장례식에서의 많은 이적을 경험한 분들에게 노무현 역시 역사 속 보살적 존재일 것이다. 신이 아니면 인간, 이것이 맞을까?

입자-파동 이중성에 대비되는 '하느님-인간 이중성' 개념은 이미 1967년 윌리엄 오스틴이 신학적 상보성 개념으로 제출한 바 있다. 오스틴의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참하느님이시다'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가 참사람이시다'는 것 사이의 관계는 상보성 중의 하나이다."

상보적이라는 것은 서로 반대명제이면서 서로 전환될 수 있다는 의미다. 신이면서 인간일 수 있는, 일반적 논리를 초월할 근거를 양자역학은 우리에게 제공한다. 동아시아인에게는 너무나 익숙하다. 역(易)이 바로 이것이다. 그렇지만 논리학에 근거한 과학으로 중무장한 서양인과 현대 한국인들에게는 낯설다.

물리학자인 존 폴킹혼은 양자물리학에서 신학적 돌파의 계기를 찾는다.

"당시 물리학자들은 경험에 의해 '빛의 입자/파동 이중성'이라는 그림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 당시에는 어떻게 일관되게 그렇게 될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 깊이 있는 물리 이론이 없었다. 그리스도교 사상가들도 경험에 의해 '그때까지는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 깊이 있는 신학 이론에 다다르지 못했다."

그의 주장은 우리가 양자물리학을 통해 깊은 이론에 도달했다는 의미다. A가 A아님과 같을 수 있다는 것을 우리 인간은 상상조차 못한다. 물론 위대한 철학자 스피노자처럼 '모든 규정은 부정이다'란 명제를 제시한 지성도 있지만 일반적이지 않다. 양자물리학을 경유하면 모순처럼 보이는 명제가 온전한 진리로 불쑥 다가온다.

예수의 신성도 양자역학적으로 현현한다. 모두가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을 때 불현듯 예수의 신성이 현현한다. 신약성서에서 가장 큰 기적은 예수가 라자로를 살린 사건이다. 당시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보면 사람들은 예수에게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는다. 예수는 라자로가 죽은지 나흘이나 지나서야 그의 집에 찾아간다. 시체가 된 라자로를 상대로 예수가 권능을 행사하리라고는 누구도 기대하지 않는다. "예수와 마리아 간의 대화내용을 보면 마리아는 자신의 오빠를 살려달라고 애원하지 않고 다만 '주님, 주님이 여기 계셨더라면 제 동기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라며 담담하게 마음을 전한다. 믿지 않기에 예수가 무덤굴 앞의 돌을 치우라 명할 때 다들 막아 섰던 것이다. 예수 신성의 현현은 우리의 기대에 맞풔 오는 선물이 아니다. 기대감이 없을 때 불청객처럼 불현듯, 불쑥 등장하는 것이다.

라자로 소생사건은 매우 특이하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기적을 플라시보효과로 설명한다. 다들 믿으니 그리되는 것이라고. 그런데 예수에 대한 별다른 기대를 접고 데면데면했던 바로 그 시점에 예수의 신성은 비로소 발현한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과 여인들에게 나타나시는 자기현현사건들은 모두 예수를 경험, 관측하고자 하는 아무런 기대도, 의도도 없던 이들 앞에 스스로를 갑작스럽게, 예기치 못하게 드러내신 사건들이다. 이 모든 자기현현을 통해 그분은 스스로의 신성을,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자의 신적 본성을 명백하게 드러내신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양자역학에 따르면 관찰자가 사태를 결정한다. 개인의 주관이 개입된 기대감을 벗어난 상황 속에서만 예수의 신성은 현현하는 것이다.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되는 요셉 라칭거는 책 <그리스도 신앙 어제와 오늘>(장익 옮김, 분도출판사 펴냄)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슈뢰딩거는 물질의 구조를 파단(wave-packet)이라고 정의했고, 따라서 물질의 구조는 실체적인 것이 아니라 그 '실체성'이 실제로는 움직임의 구조에서 겹겹이 일어나는 파동으로부터 오는 순전히 현상적 실재라는 관념을 내세운 바 있다 물질의 영역에서는 그런 제안이 물리학적으로도 그렇고 철학적으로도 틀림없이 의문시될 수 있다 하겠다. 그러나 신적 실재성, 즉 신의 절대적 실재를 놓고 생각한다면 매우 자극적인 비유라 하겠다. 그리고 가장 견실한 존재가-신이-본체가 아니라 다만 '파동'일 뿐인 여러 관계에서만 존립하면서 존재의 충만을 성취한다는 사실의 좋은 비교가 된다."

신을 '실체적' 존재로만 생각하지 말라는 교황의 충언이다.

저자는 책 속에서 삼위일체에 대한 양자역학적 설명, 빅뱅이론에 근거한 창조론등 과학과 신학을 종횡무진 누비고 있다. 필자가 책을 소개하는 이유는 필자가 늘 갖고 있던 의문에 대해 매우 과학적으로 설명하기 때문이다. 필자와 비슷한 분들이 많을 것이라 생각한다. 다만 한가지 이런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과학으로 종교를 설명하는 것이 옳은 방향일까? 저자가 양자역학을 기독교신학에 끌어들이듯이 이중표를 위시한 많은 선지식들이 양자역학으로 공(空)을 설명하고 양자얽힘으로 연기법을 설명한다. 필자가 단언하건대 양자역학은 기독교보다는 불교에 특히 친연성을 갖고 있다. 자현스님이 과학을 통한 종교 이해에 대해서 강의 속에서 건드린 적이 있다. 그의 비판의 논지는 이렇다. 현재 유행하는 과학으로 종교를 설명하면 혹시 다른 과학 패러다임으로 대체될 때 그때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100퍼센트 동의하지는 않지만 나름 의미있는 비판이다.

필자가 종교에 천착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자본주의가 종말점에 근접하고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살아있는 자본주의는 죽어가지만 새로운 무엇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필자는 다가오는 새로운 세계에서 종교가 새로운 모습으로 본격적으로 등장할 것이라 생각한다. 특정 종교가 좋거나 나쁘거나의 문제가 아니다. 뒤르켐이 말했듯이 종교란 '사회 숭배'다. 스스로를 숭배함으로써 사회의 안정을 추구한다. 현대 사회의 자본 종교의 약속은 이미 빛이 바랬다. 미래의 장밋빛 약속이 사라지면 사회는 구심력을 잃는다. 마침내 공동체는 해체된다. 남는 것은 만인에 대한 투쟁뿐이다. '묻지마 살인'은 만인에 대한 투쟁의 한 단초에 지나지 읺는다. 현재의 한국, 미국이 이미 보여주고 있는 사회다. 이런 위험을 방지하기 위한 유일한 해결책은 종교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을 소개한다. 종교인이 되고 싶은 과학 덕후에게 특히 추천하는 바이다.

▲ <신학, 과학을 만나다>(김도현 지음, 서강대학교 출판부 펴냄). ⓒ서강대학교 출판부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 3,000원
  • 5,000원
  • 10,000원
  • 30,000원
  • 50,000원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국민은행 : 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