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 대성동고분군 자체가 '전기가야'다"

신경철 부산대 명예교수 "대성동 1호분, 대성동고분군 최후 왕묘다"

"김해 대성동고분군은 가야연구의 핵심인 것 같습니다."

신경철 부산대 고고학과 명예교수는 13일 김해문화원(원장 김우락)이 주최한 '김해를 通하다' 학술회에서 이같이 피력했다.

신 교수는 "가야를 통상 전기가야와 후기가야로 이분(二分) 해 하고 있다"며 "대성동고분군의 시대가 바로 전기가야의 시기이다. 여기에다 전기가야와 왜는 시종일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대성동 1호분은 대성동고분군의 최후의 왕묘이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신경철 부산대 고고학과 명예교수. ⓒ프레시안(조민규)

신 교수는 "대성동 1호분을 끝으로 대성동고분군의 축조는 중단되는 것이다"면서 "대성동 1호분에 연대적으로 후속하는 고분이 바로 복천동 21·22호분이다"고 말했다.

신 교수는 "'대성동고분군 축조중단' 과 '일본 고분시대 중기의 개시'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며 "이러한 점에서 일본 고분시대의 시작을 4세기말로 여기는 일본의 역연대관(曆年代觀)은 성립되지 않는 것이 된다"고 밝혔다.

신 교수는 "일본 고분시대의 시작은 정형전방후원분(定型前方後圓墳)의 등장과 전기에서 중기로의 전환은 일본열도 자체의 발전이 기반이었다기보다는, 일본 열도와 가장 긴밀한 관계에 있었던 낙동강하류역의 가야 대성동고분군의 정세변동이라는 가야로부터의 충격과 연동하고 있는 것이다"고 말했다.

바꾸어 말해 신 교수는 "대성동고분군에 대한 정확한 이해 없이는 일본 고분시대의 본질을 규명할 수 없다"면서 "금관가야(가락국)의 왕묘군인 대성동고분군이 축조 중단되고, 이들 집단이 각지로 흩어져 가야의 각지에 여러 수장묘를 축조하는 시기부터 후기가야이다"고 밝혔다.

이른바 우리에게 익숙한 5가야니, 6가야니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는 것.

신경철 교수는 "대성동고분군이 존재하는 금관가야(가락국)은 강력한 단일정치체이다"고 하면서 "대성동고분군 축조 중단 이후의 여러 가야가 분립한 지역연맹체들의 정치체인 것이다"고 강조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 3,000원
  • 5,000원
  • 10,000원
  • 30,000원
  • 50,000원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국민은행 : 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조민규

경남취재본부 조민규 기자입니다.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