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대란 앞 진보적 보건의료운동의 과제

[시민건강논평] 민주주의와 공공성에 기반한 체제전환을 생각한다

올해 2월부터 5월까지 전국 의료기관의 진료환자가 작년 같은 기간에 비하여 200여만 명 줄었다고 한다(☞관련기사). 그 틈은 환자들의 불안과 두려움, 예기치 않은 죽음이 채웠을 것이다. 윤석열정부가 '의료개혁'을 제대로 이끌 의지나 실력을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에, 의료공백사태로 인한 부당한 고통과 피해는 전적으로 정치적 책임이다.

시민사회는 관료-전문가 중심의 보건의료정책 결정이 지역별, 분야별 의료불균형을 해소할 근본적 해법이 되지 못한다고 비판하면서, 공공의료가 중심이 되는 보건의료개혁을 요구하며 의료정책결정의 권한이 시민에게도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의료 뿐만 아니라 전방위적으로 대한민국 6공화국 체계의 근간을 뒤흔드는 윤석열 정부의 파괴적 사건과 이와 연관된 인물들 때문에 시민사회는 어느 때보다 '우리의 목소리를 들으라' 고 외치고 있다.

이런 주장은 자신의 삶에 관련된 공적 결정에 대한 참여가 바로 민주주의의 실천이기 때문에, 참여가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지 여부와 무관하게 삶을 가치있게 만드는 목적적 행위라는 데 근거한다. 물론 '나를 빼고 나에 대해서 결정하지 말라'는 더 많은 주체들의 각성은 사회적 불평등을 완화하는 동력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관료적 통제와 기업의 경제적 이해가 우선되는 불평등한 권력관계로 인해 정책의 영향을 받는 다수 시민들이 표출하는 다양한 견해와 요구들이 선별되거나 배제된다. 심지어 권력은 '불평등한 당사자가 자신의 불평등에 말없이 동의하는 사태'를 이뤄내면서 통치의 안정을 획득한다.

특히 건강과 보건의료 분야는 기술적 전문성을 우선하는 과학주의 인식론이 강하고 정책 관료의 권한이 상대적으로 크다. 시민사회가 의제설정을 주도하지 못하다보니 얼마 되지 않는 시민참여의 기회조차 홍보나 동원의 절차일 뿐 최종 결과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관료들을 앞세운 국가권력은 정책에 비판적인 시민보다 정부의 입맛에 맞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참여의 기회를 제공하면서 이 과정을 목적의식적으로 재단하기도 한다. 이런 상황들 때문에 의료소비자로서의 선택과 평가의 권리를 확장하자는 의료소비자운동이 대안으로 제시되기도 하나 이는 시장화된 의료체계 자체를 넘어서기 어렵다는 점에서 또 다른 측면에서 비판을 받는다.

이런 맥락은 공공성과 공적 가치를 추구하는 진보적 사회운동으로서의 보건의료운동의 어려움과 연결된다. 하지만 진보적 보건의료운동이 강조하는 '자기결정 권리의 해방적 위력' 때문에 '친절한 얼굴을 한' 정치와 자본은 이 운동을 그들의 권력에 종속시키거나 포섭하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진보적 보건의료운동은 그런 점에서 권력에 의한 선별과 배제를 넘기 위한 이중, 삼중의 과제를 가진다.

하나는 시민들이 공적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제도적 공간을 확대하면서 이 공간 밖에서 이루어지는 급진적인 기획과 상상을 제도 속에 밀어 넣는 것, 다른 하나는 보건의료서비스 밖에서 작동하는 더 넓은 건강의 사회적∙상업적 결정요인에 대한 국가와 기업의 책임을 묻고 개입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진보적 보건의료운동은 국가나 시장이 통치와 이윤만을 추구하기 위해 짜놓은 불평등한 권력관계를 사회권력이 지향하는 민주적 공공성을 전략적으로 배치함으로써 국가-시장-시민의 균형적 권력관계로 재편해야 한다.

그러나 사회권력의 활동을 통해 관료-전문가가 만들지 못했던, 심지어 그들이 반대했던 변화를 만들어냈던 실천의 경과들은 민주적 공공성 강화가 그리 녹록치 않음을 잘 보여준다. 시민들은 일시적으로나마 승리의 시간을 갖기도 하지만, 국가권력은 '적법한' 절차를 앞세우며 행정이나 사법이 독점하는 긴 시간을 통해 시민들을 소진시키고 조직을 약화시키면서 본래의 권력을 회복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가령 공공병원을 설립하기로 합의한 후에도 하염없이 길어지는 적격심사나 타당성 조사, 파업 노동자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규모의 손해배상과 징역형 판결, 수많은 사람이 죽거나 회복할 수 없는 피해를 입은 사회적 참사에 대한 비상식적인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의 최종결정을 생각해보라.

그런 점에서 사회위기와 기득권에 대응하는 사회권력의 능력을 축적하고 갱신하는 것은 또 다른 우리의 당면 과제이다. 어떻게 비대칭적인 권력관계 하에서 시민 다수의 지지를 받는 투쟁을 조직하고, 권력의 허위와 부조리를 폭로하여 몫을 잃었던 사람들을 위한 정치적 기회를 찾고, 민주주의와 공공성에 기반한 사회경제체제에 저항하는 의사결정자들을 굴복시킬 것인가!

단단한 체제적 저항에 직면하는 힘든 운동이란 점을 생각하면, 폭과 깊이를 같이 다져야 한다. 시민, 노동, 진보정당, 지역사회, 진보적 연구자 및 보건의료 전문가들 그리고 개혁적 의사결정자들을 포함하여 참여에 대한 강력한 옹호의 네트워크를 구축해야 한다. 평시의 조직적이고 사회적인 학습을 통해 더 많은 시민들이 문제 포착과 해결을 자임하는 주체가 되고, 정책결정과 집행단계를 불평등과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감시하고, 정보와 권력의 비대칭을 바로잡는 지식과 기술을 쌓아가야 한다.

"사회적 이상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고, 개인의 구원은 쉽게 오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구원의 여부보다 무엇을 하며 구원을 기다릴 것인가다" (김영민, <가벼운 고백>)

그 무엇은 실천이며 실천은 주체를 전제한다. 그러므로 사회권력이 진보적 보건의료운동의 중심 주체가 되기 위해서 수행하는, 목적의식적이고 지속적인 정치적 주체화 과정은 체제전환 또는 체제변혁의 과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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