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관광, 여성의 몸을 관광자원으로 선택하다

[프레시안 Books] <소비의 한국사>

어쩌다 카드 사용 내역을 보면, 내가 먹고 사고 즐긴 게 줄줄이 나온다. 배가 고파서 먹은 것도 있지만 배를 가득 채우고도 식탐(食貪)이 발동해 계산한 것도 있다. 필요해서가 아니라 '오늘 힘들었으니까'라는 셀프 보상 심리로 지출한 것도 있다. 때론 '유행이네. 다들 갖고 있네?'라는 생각으로 무작정 '긁은' 것도 있다.

이처럼 현대인은 생존을 위한 상품보다 취향, 기호, 기분을 위한 상품을 더 많이 구매한다. 소비를 통해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위로 받으며 자존감을 회복하기도 한다. 심지어 존재성을 확인하고 정체성 확립하는 데도 '소비' 또는 '소비자'를 빼놓을 수 없다. 생산보다 소비가 일상이 된 현대사회에서 '소비하는 인간(Homo Consumus)'이라는 말이 낯설지 않은 이유다.

그렇다면, 한국 사람들은 언제부터 또 어떤 흐름 속에서 '소비자'가 됐을까? 김동주, 김재원, 박우현, 이휘현, 주동빈 등 젊은 역사학자 5명이 근현대사 속 한국인의 일상과 욕망을 책 <소비의 한국사>(서해문집 펴냄)로 펴냈다.

책은 쌀·물·라면·커피·부동산·가전제품·술 등 생존에 필요한 생필품과 음악·영화·관광·교통·장난감·도박·마약 등 기호나 취향에 따른 소비재로 나눠 다루고 있지만, 여기서는 생존을 위한 밥 한 그릇이 성공 열망의 대명사가 된 배경, 사는(live) 집이 중요 투자처인 '사는(buy) 집'이 된 이유, 'K-관광'의 시작은 '섹스관광'이었다는 사실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 서울 남산에서 바라본 시내 아파트 단지 모습. ⓒ연합뉴스

쌀밥과 성공 열망

갓 지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쌀밥은 이제 전자레인지에서 2분만 돌리면 된다. 2분이면 구수한 향이 나는 흰 쌀밥을 언제든지 먹을 수 있다. '쌀밥 한 그릇 배불리 먹을 수만 있다면…'이라는 국민적 소원은 옛 일이 됐지만, '한국인은 밥심'과 같은 말이 지금도 통용되는 걸 보면 쌀에 대한 한국인의 열망은 여전하다.

저자(김동주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연구원)는 한국인의 쌀에 대한 열망을 "'박탈'된 경험에서 비롯된 정서"라고 봤다.

일제 식민지 시대 일제가 조선을 식량 공급 기지로 삼고 정책적으로 쌀을 유출하면서 "대다수의 농민은 생산량의 절반 이상을 소작료로 빼앗겼기에 쌀도, 쌀 판매 대금도 자기 손에 쥐지 못했다". 식민지에서 해방된 미군정 시대도 마찬가지였다. 미군정은 치솟는 쌀값을 해결한다며 강제 수집 정책을 썼지만 농민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쳤고 결국 총칼을 앞세워 쌀을 공출해 갔다.

이승만 정권은 1950년 6.25 한국전쟁으로 농토가 황폐화된 상황에서도 '전후 복구'라는 명분으로 헐값으로 쌀을 걷어갔으며, 박정희 정권은 수백만 명이 굶주린 상황에서 '쌀밥 좀 그만 먹어라'라며 '혼분식(混粉食) 운동'을 장려했다. 일제 말부터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인에게 "쌀은 내가 생산하고도 먹지 못하는 무언가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박정희 정권은 쌀밥을 향한 욕망을 부정하지 않았다. (…) 박정희 정권은 사람들이 품고 있는 쌀밥 소비욕을 긍정하는 한편, 본인의 지도로 한국 사회가 쌀밥을 양껏 먹을 수 있는 사회로 나아갈 것이라 선전했다. (…) 1970년대 새마을운동이 내건 '잘살아 보세'라는 표어는 맘껏 먹고, 맘껏 소비하고 싶다는 시대의 욕망을 직설적으로 표현함으로써 광범한 호응을 얻었다. (…) 단, 박정희 정권은 단서를 덧붙였다. 그것은 바로 내일 쌀밥을 먹기 위해 오늘은 허리띠를 졸라매야 한다는 이야기였다."(위의 책, 24쪽)

쌀 품종 개량과 경제 성장으로 1970년대 중반 이후 도시 노동자를 중심으로 쌀밥을 먹는 집이 늘었지만, 1980년대까지만 해도 '쌀밥을 먹는다'는 것은 '성공했다'로 통했다. 비록 지금은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이 56.4kg으로 역대 최소지만, "대부분의 한국인에게 쌀이란, '맛있는 것을 먹고 싶다'라는 원초적 욕망과 '잘살고 싶다'라는 사회경제적 욕망이 한데 모여 응축된" 상품이다.

집과 투자 열풍

우리가 사는 집(부동산)은 하나면 족하지 않을까? 그러나 한국인에게 집은 생필품이면서 동시에 '투자' 상품이기도 하다. 집을 소비하는 그 투자 열풍이 지금의 '강남'을 만들고 '8학군'과 같은 상품을 창조했기 때문이다.

저자(김재원 가톨릭대학교 국사학과 겸임교수)는 "한국 사회에서 집은 거주를 위한 소유가 아니라, 적극적인 투자의 한 형태로 소비되는 성격을 강하게 띠었다"며 "한국에서 집은 여전히 가장 중요한 소비재이자, 투자처"라고 했다.

박정희 정권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강조한 '근대화'" 덕에 경제는 빠르게 성장했고 수도 서울로 유입되는 인구도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이에 주거 부족 문제가 심각했다. 정부가 화곡과 수유에 대규모 주택단지를 건설하는 방법으로 문제를 해소하려고 했지만, 당시 경제 상황에서 토지구획정리 후 지가가 상승한 땅에 주택을 짓고 분양까지 할 수 있는 민간 건설사가 없었다.

해결의 실마리는 돈(자본)이었다. 정권은 1969년 '한국주택은행법'을 제정해 '주택금고'를 '주택은행'으로 덩치를 키운 뒤 '땅값이 뛰었다면 은행에 맡기고 돈을 빌려라'라는 논리로 민간자금을 동원하기 시작했다.

"주택은행이 만들어질 때부터 '주택'이라는 소비재를 "경제성장에 공헌할 수 있는 생산적 투자의 한 형태"로 인식하게 했다. 주택은행에 관한 인식이 적중하려면 먼저 전제되어야 하는 부분이 있었다. 바로 "집값은 절대 내려가면 안 된다"라는 진리다. 집은 단지 주거의 목적이 아니라, 이제 투자처여야 했다. 집을 소비한다는 건, 집에 투자한다는 공식이 자리 잡아야 했다. (…) 그렇게 주택은행은 '내 집 마련 계획'을 위한 대출사업을 주도해야 했다."(106쪽)

집(부동산)이 사는(buy) 상품이 된 순간이었다. 주택은행의 활약(?)으로 정부와 민간기업은 새로운 투자처가 필요해졌고, 이들이 택한 곳은 "영등포의 동쪽 땅, 허허벌판에 농지가 가득한, 아직 땅값이 저렴하고 누구도 눈독 들이지 않은 그 땅, 지금의 강남이었다". 당시에는 여의도와 동부이촌동이 먼저 선택을 받았다. "지금의 강남땅이 지리적으로 연결되는 공간"이다.

여의도와 동부이촌동은 "공유수면인 한강을 메워 만들어진 땅"이었기에 토지 매입 비용이 전혀 들지 않았다. 이곳의 개발(영동 개발)은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멋진 곳에 내 집을 가질 수 있다'는 욕망을 적중했다. 한강 변 개발의 하나로 영동지구가 형성되고, 강남도로가 만들어졌다.

"한강 변을 중심으로 넒은 면의 고층 아파트가 건설되었고, 논현동 인근과 청담동 주변에 전원주택 단지가 형성되었다. 애초에 돈 있는 사람이거나 주택은행에서 돈을 빌릴 수 있는 사람'만'을 위한 공간으로 만들어진 곳이 바로 강남이었다. 당시 정부의 표현을 빌리자면, "중산층"을 위한 공간의 개발이었다. (…) 주택은행의 주 고객은 교육 수준이 비교적 높고 고액 봉급생활자였다. (…) 직업은 대체로 공무원, 사무직 계통의 회사원, 교직원, 은행원 등이었다."(108~109쪽)

이때 같이 성장한 업종이 건설업이었다. 당시만 해도 "집 장수, 또는 토목회사에 지나지 않은 건설업체가 어엿한 중견기업의 모습을 갖추더니, 건설사를 중심으로 계열사를 늘려 대기업으로 진화했다".

"금융기관을 통해 대출의 기회를 늘린 기업이 건설업에 투자해서 투기 분위기를 만들면, 비싼 집값을 중산층이 대출로 감당하며, 다시 집값을 올리는 구조 말이다. 처음부터 영동은 이런 구조에서 개발된 땅이었다. (…) 이 구조를 완벽히 완성한 건 바로 정부였다. 영동에 돈이 돌자, 정부는 강남을 더욱 키워야 한다는 생각으로 여러 정책을 세우는데, 그 정책의 핵심은 강북 개발을 제한하자는 것이었다. 강남을 노른자 땅으로 만들려면 강남이 기존 도심지를 완벽히 대체해야 했다. 그래야 영동에 집을 구한 이가 '이곳은 집값이 내려가지 않습니다'라는 생각을 안정적으로 할 수 있고, 이로써 지가를 더욱 끌어올리며 개발을 추진할 수가 있었다."(111쪽)

정부의 '강남 키우기'는 계획적으로 진행됐다. "1972년 2월부터 강북에 유흥시설과 백화점, 시장 등을 신설, 증설할 수 없"었으며 "1975년 4월부터 한강 이북 지역에선 택지개발이 금지"됐을 뿐 아니라 "곧 공공기관(사법부 중심)도 이전한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또 "강남으로 이전한 학교는 행정적으로나 재정적으로 국가의 엄청난 지원을 받을 수 있었"기에 경기고, 휘문고, 서울고 등 명문고들이 영동으로 이전했다. 한국의 입시 경쟁을 부추기는 '8학군'의 형성은 국가 정책으로 추진된 것이나 다름 없었다.

사실상 국가가 주도한 '강남은 집값이 내려가지 않습니다'라는 신기루는 '강남 불패'라는 신화로 승격됐다. 강남·서초 일대 압구정동·청담동·대치동·반포동은 지금도 한국인이 생각하는 대표적인 부동산 투자처다.

관광과 그릇된 열기

한국의 관광 산업 역시 일제 식민지와 군사정권이라는 근현대사에서 비롯됐다. 관광(여행)은 국가 주도의 산업 육성 아이템이자 돈벌이 수단이었다.

저자(박우현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원 연구교수)는 "관광은 자본주의, 근대가 만들어 낸 상품"이라며 "관광 한국, K-관광의 시작은 이런 모습이었다"고 설명했다.

관광은 일제 식민지 당시 "제국주의자의 입김이 많이 들어간 정책적 육성"으로 본격화됐다. 조선총독부는 원산 해수욕장, 금강산, 경주 등을 관광 상품화했다. 일본과 만주에서 조선을 찾았고, 조선에서도 일본과 만주로 관광을 떠났다. 이는 "식민지민 조선인에게 식민지이지만 조선은 즐길 거리가 많다는 안도감을, 식민자 일본인에게 우리 '제국'이 너희를 '발전'하게 한다는 우월감을 심어 주었다".

1960년대 이후 박정희 정권에서 관광은 "경제개발계획과 연계되어 핵심 '외화벌이' 산업으로" 지목됐다. 그러나 당시 외국인을 유치할 만한 관광 상품이 마땅치 않은 상황에서 박정희 정권은 "여성의 몸을 관광자원으로 선택했다. 이른바 '섹스관광' 육성국가를 선택"한 것이다.

"시기도 적절(?)했다. 마침 1972년 일본과 중국이 국교를 수립하자 일본과 타이완의 관계가 단절되면서, '섹스관광'의 수요자였던 일본인 남성이 타이완을 대체할 공급지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박정희 정권은 군사정변 이후 먼저 처리한 법안 가운데 하나가 <윤락행위 등 방지법>이었지만, 1973년에 외국인을 위한 매매춘을 하나의 국책사업으로 만들었다. 외채를 줄이고 무역적자를 줄일 수 있는 자원이 당시에 '기생관광'으로 불린 정책이었다. 성매매가 필수로 포함되는 외국인 특히 일본인의 한국 관광을 일컫는 것이었다."(215쪽)

박정희 정권은 "기생관광을 위해, 매춘 여성이 합법적으로 영업할 수 있게 호텔통과증과 외국인을 상대로 하는 매춘에 합법성을 부여하는 허가증(접객원 증명서)을 발부해 주었"다. "당국은 여행사를 통해 기생관광을 해외에 선전"한 결과 "1978년 한국이 일본인 관광객으로 얻은 수입은 700억 원에 달했다".

"한국교회여성연합회는 일본이 한국을 '창녀의 소굴 코리아'로 부른다며, 기생관광을 비판하기도 했다. 즉 정권의 적극적인 후원이 낳은 결과는 섹스관광 대국 코리아였다. 1980년대 초에도 외국인 관광객의 80퍼센트는 일본이이었는데, 이들이 한국 관광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은 '요정'이었고, 관광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80퍼센트가 '기생파티'를 언급했다."(216~217쪽)

한국인에게 관광(여행)은 더이상 외화벌이 수단이 아니다. 오히려 한국인은 동남아시아와 일본 관광업계의 큰 손이자 적극적인 소비자다. 관광(여행)에 대한 인식도 많이 바뀌어 일상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보는 기회로 인식되고 있다.

▲ <소비의 한국사 - 우리는 무엇을 먹고 마시고 탐닉했나>(김동주·김재원·박우현·이휘현·주동빈 지음, 서해문집 펴냄) ⓒ서해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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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선

프레시안 이명선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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