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민주주의는 왜 실패하고 있는가

[복지국가SOCIETY] 시민주권, 시민의회를 통해 가능하다

대한민국 시민은 정치 영역에 있어 세계 어느 나라의 사람들보다 깨어 있으며 역동적이다. 87년 민주화 대위업과 2016-17년 간 촛불행동이 이러한 역사의 자랑스런 증언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수십 년 동안 제도 정치권은 격변시대의 소명을 외면하고 제도 개혁에 실패하면서 해방 이후 최악의 무능하고 무도한 집단에게 국가권력을 강탈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왜 실패하고 있는가?

국제적 흐름이 한반도와 동북아에 전쟁의 먹구름으로 몰고 오며 '다시개벽'의 엄중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음에도, 우물안 개구리 신세인 한국의 국내정치는 타협과 출구가 없는 싸움에 갇혀 우리의 미래를 갉아먹고 있다. 민주화 항쟁과 촛불행동 등 지난 시기를 되돌아 성찰해보면, 기존 정치인들이 시민이 만들어낸 역사적 성과를 제도화하기는커녕, 마치 자신들이 성취한 획득물인양 그 열매를 고스란히 독점했다. 국민이 희망하고 기대했던 전진과 변화는커녕 이명박, 박근혜, 그리고 윤석열의 등장을 허용하면서 악몽같은 악순환의 고리가 형성됐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고질적이고 심각한 배경이 있다고 본다.

첫째는 엘리트와 유산층의 과두제라는 비판을 받는 18세기에 시작된 서구식 선거방식의 대의제가 지닌 시대적 한계에 더하여 현재의 한국정치제도가 가지는 결함들이다. 대표적인 것이 소선구제가 지닌 승자독식의 선거제도와 대통령이 지닌 무소불위의 제왕적 권력이다. 둘 다 치명적인 문제를 지니고 있지만, 이번 글에서는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생략한다.

돌째는 구한말 이후 반민족매판 수구기득권의 기반과 조직을 정리해 내지 못한 까닭이다. 현재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검찰사법세력의 법비적 행태와 법적 근거는 일제가 한국민을 지배하기 위해 도입한 것에 원형을 두고 있다. 이것을 제대로 청산하지 못하고 개혁하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 되고 있다. 또한 일제와 협력하고 부역해왔던 반민족매판 수구언론들이 자성과 회개의 과정도 없이 여전히 공론의 장에서 주류를 자처하면서 지록위마와 교언영색을 일삼고 있는 것이 현재의 미디어 지형이다. 이로 인해 국민 여론의 공론장에서 합리적인 공적 이성이 작동하지 못하고 수구 기득권에 의한 마구잡이 왜곡과 조작이 판을 치고 있다.

셋째로 1945년 9월 미군이 점령군으로 이 땅에 진입한 이래 대한민국은 온전한 주권이 없는 반쪽의 나라, 결핍의 국가가 되었기 때문이다. 현재 대한민국은 군사안보 주권은 물론이고 통상과 외교에서 조차 국익을 대변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지난 70여 년간 한국정치에는 항상 한반도에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일본정치 세력과 지정학적 패권을 유지하고 있는 미국에 의한 왜곡과 간섭이 있었다. 예를 들자면 작년 8월에 이루어진 캠프 데이비드 한미일 삼국 정상회담은 1905년 을사늑약이 이루어지기 직전의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연상하게 한다. 국란의 위기마다 나라를 구한 것은 무기력한 집권세력이 아니라 민초들, 백성들이라는 것은 역사에서 매우 소중한 대목이다. 집권자가 아니라 오로지 조직된 시민만이 국가를 구하는 바탕이자 동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는 제도정치권, 특히 개혁민주세력들의 역량 부족과 시대정신을 상실한 채 상호간에 분열로 표류하는 재탕의 모습들이다. 해방공간의 좌충우돌에서도, 87년 대투쟁 이후 양김의 분열에서도, 촛불 이후 문재인 정권의 무책임한 행보에서도, 최근의 대선에서 보는 개혁진보세력의 갈등과 대립 어디에서도 시대정신과 현안과제에 대한 제대로 된 해답을 읽을 수 없다. 개혁의 맏형을 자칭하는 이재명의 민주당은 다를까? 막연한 기대는 금물이다.

시민주권을 위한 제3의 민주화운동이 필요하다

이대로가면 정치뿐만 아니라, 지난 수십 년간 자랑스럽게 이루어낸 사회 제 영역의 성과 뿐만 아니라 민족의 운명까지 위기에 처할 것이 명백해 보인다. 위기의 순간이다. 위에도 이야기했지만, 수천 년의 민족역사를 되돌아 보면 국란의 위기에는 예외 없이 힘없는 일반 백성들이 떨쳐 일어나 나라를 구하고 위기를 극복해왔다. 따라서 이제 기존의 제도를 뛰어 넘어서 한국시민이 보여준 엄청난 역량과 에너지를 규범화하고 제도화하고 반드시 법제화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기존 정치권에만 의존할 것이 아니라, 일반 시민이 직접 나서 참여하고 토의와 숙의를 통한 집단지성의 결정으로 시대의 소명과 과제를 해결하는 시스템을 도입해야만 한다. 이제 엄중한 내우외환의 상황에서 개혁진보 정치인들뿐만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서로가 힘을 보태가며 새롭게 제3의 민주화운동을 전개해야 할 중차대한 시기다.

1987년 민주화 대투쟁은 27년간의 기나긴 군사독재정권의 시대에 종말을 고하고 문민 정치시대를 열었다는 점에서 제1의 민주화 운동이라 할 수 있고, 2016~17년간의 촛불운동은 살아있던 권력인 현직 대통령을 탄핵 소추하고 이를 인용하여 해임한 계기를 마련한 점에서 제2의 민주화운동이라 할 수 있다. 치명적 재앙으로 치닫고 있는 윤석열 정권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다시 말하면 이제 세계인이 모두 부러워했던 한국시민이 보여준 엄청난 민주 역량과 에너지를 규범화하고 제도화하고 반드시 법제화하여 새로운 정치의 장을 마련하는 제3의 민주화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시민주권·시민권력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야 한다.

그 실현방식으로는 직접민주주의와 감독민주주의 등 여러 형태가 있으나, 우리가 지닌 여러 여건과 정황을 고려할 때 OECD가 강력히 추천하고 서구사회에서 이미 도입 검증하여 성공의 사례를 만들어가고 있는 층위별추첨형 시민의회가 우리 상황에서는 가장 합리적이고 현실적이며 곧바로 실천 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 시민의회는 2017년 이후 다수의 공론화위원회와 2018년 대통령 개헌안에 대한 숙의형 개헌토론회라는 이름으로 시행된 바 있다. 촛불이 뜨겁던 2017년 초 민주당을 위시한 야당들은 시민의회법을 약속했고, 2018년 '국민참여에 의한 헌법개정의 절차에 대한 법률안'을 발의했고, 2023년 선거법 개정 논의에서는 여야합의로 500인 시민의 공론화 과정을 진행한 바 있다.

그러나 위의 사례들은 자기정당화를 위하여 면피용 흉내만 내는 절차와 결함투성이의 과정이었다. 더구나 시행하려는 의지의 빈약으로 그나마 합의된 내용조차 묵살되는 실패의 사례로 남아 있다. 이제 우리는 주저없이 지난 경험들을 바탕으로 세계적 모범이 될 수 있는 시민의회의 제도들을 만들어가야 한다.

지난 5월8일 수백 명의 시민이 참여한 가운데 시민의회 운동을 주도해온 해외의 여러 인사들과 이를 다방면으로 연구해온 국내 연구학자들이 결집하여 국제심포지움을 성공적으로 치른 바 있다. 시민의 자발적 모임인 '시민의회 입법을 위한 100인 위원회(시민의회 포럼)'는 당시 국내외에서 많은 주목을 받았다. 5월 국제심포지엄의 토론결과를 바탕삼아 말하자면, 우리 사회는 다음과 같은 방향으로 시민의회 제도를 만들어가야 한다.

시민의회 제도화,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

세계 각국에서 시도되고 있는 다양한 시민의회 사례들은 한국에 중요한 댜양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당면한 정치적, 정책적 목표에 매몰되지 말고 민주주의 정치의 넓은 지형과 장기적인 과정 안에서 시민의회의 위상과 역할을 적절히 설정해야 한다는 점이다. 특히 이런 시도가 기존 대의제 정치제도 및 과정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협력적이고 보완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경우에 따라 충분히 비판적 관계를 형성할 수도 있어야 한다.

비교적 성공적인 해외의 사례들은 시민참여포럼이 공식적인 정치과정과 적절한 긴장을 유지하면서도 긴밀히 연결될 때 효과성과 지속력을 갖는다는 점이다. 특히 정당이나 의회를 중심으로 하는 공식적인 정치과정을 우회하거나 심지어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제도화되어서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은 정당성이나 책임성 문제에 발목을 잡히기 쉽고 장기적인 동력을 유지하기 어렵다.

마찬가지 이유로 시민참여포럼이 고립된 실험에 머무르지 않고 진보언론 매체나 연구기관 등과 긴밀하게 협업하면서 공론장의 토론을 촉발 및 질적으로 향상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요컨대 민주주의 정치과정 전체의 참여성과 숙의성을 향상하는 큰 목표 안에서 시민의회의 기능과 역할을 모색해야 한다. 그간 한국의 숙의적 미니공중의 효과성이 약하고 정당성과 효과성에 대한 의문이 자주 제기되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도 바로 이러한 연계가 약했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권한과 역할에 대해서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당장 특정사안에 대해 시민의회에서 도출된 결론이 최종적인 결정권을 행사해는 것이 매우 중요한 목표이지만 반드시 그렇지 않더라도 결과물을 여러 경로로 정치과정에 연계할 수 있다는 점이다. 우선 의회와 행정부에 권고안의 형태로 제출될 수 있는데, 이 경우 그저 제출하는 데에서 끝나지 않고 효과성을 가지기 위한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설계 단계에서부터 시민의회의 결과물이 행정부의 해당 부서나 의회의 위원회 등에서 일정 기간 안에 적절한 방식으로 심의되고 그 결과가 공표되도록 하는 제도적 경로를 분명히 설정하는 방안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이렇게 할 경우에도 결정권 자체는 행정부나 의회에 놓이지만, 행정부와 의회 차원의 공식적 심의와 결정 프로세스를 반드시 수반해야 하므로 시민의회의 권고를 별다른 근거 없이 무시해버리는 상황을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한 가지 방식은 방향을 달리하여 시민발의 내지는 시민투표 제도와 적극적으로 결합하는 것이다. 특히 지방자치 수준에서 이미 제도화되어 있는 주민발의와 주민투표 제도를 적극 활용하는 방안을 적극 강구할 필요가 있다. 시민의회는 주민발의와 주민투표 제도의 숙의성을 강화하는데 기여할 수 있으며, 주민발의와 주민투표 제도는 시민의회 프로세스와 관련된 공중의 참여를 크게 확대시킬 수 있어 시너지가 기대된다.

국가적인 사안의 경우에는 캐나다나 아일랜드 등의 사례에서처럼 시민의회에서 도출된 결과를 국민투표와 연계하여 헌법이나 법률의 개정 여부를 결정하는 방법도 있다. 한편 한국의 경우, 시민의회의 입법화와 별개로 또는 연계하여 국가적 수준의 시민발의와 시민투표 제도를 도입할 필요가 있으며, 이는 헌법 개정과 별도의 법률 제정을 요하는 과제가 될 것이다.

어떤 방식의 제도화 경로이든 의견의 지형을 보여주거나 찬반투표의 결과 자체에만 매몰되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집합적 숙의를 거치면서 의견의 지형이 얼마나 바뀌었고 어떤 입장이 결과적으로 다수의 지지를 얻었는지는 그 자체로도 중요한 문제이지만,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경쟁하는 여러 견해가 왜곡 없이 파악되고 그 근거가 제시되며, 토의와 설득을 위한 노력이 진행되는 과정 자체이다. 이렇게 볼 때 이미 구체적으로 좁혀진 선택지를 미리 정해놓고 찬성과 반대를 묻는 방식에서 벗어나 의제의 설정에서부터 결론 도출에 이르기까지 시민 들의 참여를 다층적으로 강화할 수 있다.

2026년 지방선거, 시민의회 실험과 도약의 장으로!

2026년 지방선거에서 그 동안 풀뿌리 민주주의, 지역민회, 지방분권 등 다양한 운동에 헌신해온 현장조직의 활동가들은 함께 힘을 합하고 지혜를 모아 기초단위에서부터 추첨형 주민의회를 제도화하는 조례가 도입되도록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또한 이를 기반으로 향후 중앙정치에도 시민의회법을 제정해 한국사회의 진로를 결정하는 개헌과 선거법개정, 그리고 검찰사법개혁 등 중대 사안들을 반드시 '시민의회' 방식으로 추진하고 결정해야 한다.

지정학을 포함하여 현재 한국사회가 봉착한 다중적 위기상황에서 현재의 정치권과 여의도식 정치로는 해결이 난망해 보인다. 한국사회의 위기에서 언제나 '민'이 위기극복의 선봉장이 되어 온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깨어있는 시민이 주인으로 참여하고 숙의하는 과정을 통해 집단지성의 지혜가 작동하는 장을 마련해 줌으로써 현재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 만약 시민의회가 우리 사회에서 자리잡는다면 세계의 그 어떤 민주주의보다는 새롭고 찬란한 민주주의를 만들어갈 수 있다. 시민의회로 대표되는 제3의 민주화운동을 통해 '평범한 사람들의 위대한 시대'를 활짝 열어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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