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손 찾지 못한 훈·포장만 7200개…국가보훈부에 '보훈'이 없다

독립유공자 발굴·심사에 주력…후손 찾으려는 적극적인 노력 아쉬워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 송천동에 거주하는 박모씨(79)는 최근 한 지인으로부터 자신의 어머니가 독립유공자로 대통령 표창에 추서돼 있더라는 말을 전해들었다.

자신은 물론이고 가족 누구도 알지 못했던 내용이었기에 박씨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전후 사정을 살펴보니 박씨의 어머니인 김금남(金錦南·1911~1954)여사는 지난 2019년에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 대상자로 추서됐으며 국가보훈부 독립유공자 공훈록에도 등재되어 있었다.

박씨는 어떻게 5년동안이나 자신의 어머니가 독립유공자로 추서됐다는 것을 몰랐을 수가 있을까.

국가보훈부 공훈록에 따르면 박씨의 어머니인 김금남 여사 항목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1929년 11월 3일 전라남도 광주(光州)에서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났다. 1930년 1월 서울에서 20여 개교에 달하는 각급 여학교와 남학교의 연합시위운동이 추진되었다.

김금남은 근화여학교 고등과 4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그는 1월 14일 같은 학교 학생인 김순례(金順禮) 등과 함께 시위운동 계획을 추진했다. 이들은 근화여학교를 대표하여 남녀 각 학교 학생 대표들과 시위운동 방안을 협의했다. 1월 15일 각 학교가 일제히 종로 네거리에 집결한 후 연합시위운동을 벌이기로 뜻을 모았다.

1월 15일 약속된 시간에 근화여학교 학생들은 이충신(李忠信) 등의 선도로 교외 진출을 시도했다. 경찰의 저지로 실패하자 학생들은 교실 유리창을 파괴하며 교내에서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김근남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녀는 24일간 구류된 후 기소 유예되었으며 학교에서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

정부는 2019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공훈록에 기록된 내용은 당시 일간지와 국사편찬위원회가 2002년에 발간한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에서 발췌했음을 밝히고 있다.

▲1930년 서울 근화여학교를 비롯한 여러 학교들이 일제히 벌인 연합시위운동을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 ⓒ

실제로 김금남 여사는 19살이던 1930년 서울의 근화여학교(덕성여자대학교 전신) 4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김금남의 부친은 한국의 대표적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인 지운 김철수(芝雲 혹은 遲耘 金綴洙·1893~1986)선생이다.

지운선생의 첫째 딸로써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김금남은 남다른 민족과 역사의식을 갖춘 탓에 1930년에 발생한 서울지역 연합시위원동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으로 보인다.

김금남은 이후 같은 학교 동급생 및 후배 6명과 함께 만세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보안법을 위반했다는 죄명으로 구속되었다.

한편 김금남은 학교를 졸업한 이후 전북 김제 출신의 활동가인 청년을 만나 결혼해 6남매의 어머니가 되었다.

그러나 일찌감치 찾아온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6.25 전쟁이 끝난 직후인 1954년 숨을 거둔다.

김금남의 독립운동 공적사실은 오랜 시간 묻혀있다가 지난 2018년 당시 문재인 정부에서 햇볕을 보게 된다.

당시 국가보훈처는 학생독립운동 참여자 발굴을 위한 ‘항일학생운동 참여 학교 학적(제적)부’ 전수조사를 진행했고 이 과정에서 김금남을 비롯한 수십명의 독립운동 공적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

이후 국가보훈부는 유가족의 존재 여부 등을 확인하지 않은 채 우선 공적사실 등을 공훈록에 등재한 것으로 파악된다.

현재 국가보훈부 홈페이지에 탑재된 '독립유공자 공훈록'에 등재된 유공자들은 모두 1만8139명으로 이 가운데 40%에 달하는 7200명은 김금남 여사의 사례처럼 후손들이 모르고 있거나 나타나지 않아 훈장이나 표창이 전달되지 못하고 있다.

누구가가 후손에게 알려주거나 후손들이 직접 찾아나서지 않는 이상은 훈·포장이 묵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때문에 국가보훈부가 본연의 업무인 '보훈(報勳)'에 지나치게 소극적인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보훈의 사전적인 의미는 '국가의 존립과 주권 수호를 위해서 신체적, 정신적 희생을 당하거나 뚜렷한 공훈을 세운 사람 또는 그 유족에 대하여 국가가 적절한 보상을 하는 것'을 말한다.

유공자에 대한 발굴과 심사도 중요하지만 이미 공적이 드러난 당사자나 유족들을 찾아 보상하려는 노력이 병행되지 않는다면 '보훈'은 공허한 구호에 그칠 뿐이다.

김금남 여사의 아들인 박씨는 "지인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바로 보훈지청을 찾아 재적등본과 관련 서류를 접수했는데 담당자의 이야기로는 심사하고 보상여부가 결정되는데 까지 몇달이 걸릴 지 장담할 수 없다고 한다"면서 "너무나 느려터진 보훈행정에 답답하기만 하다"고 푸념했다.

지역 독립운동사를 연구하고 있는 정재철 부안역사문화연구소장은 "국가의 보훈 정책이 발굴과 심사에만 지나치게 치우치게되면 유족들을 대상으로한 제대로된 보훈이 이뤄질 수 없다"면서 "필요하다면 관련 인력을 대폭 늘려서라도 유공자의 후손을 찾아나서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정재철 소장은 또 "유공자로 지정이 된 이후 후손이 나타날 때까지의 기간 동안 소급이 되지 않는 유공자 수당 지급 문제도 폭넓은 보훈의 방향에서 적극적으로 검토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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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홍

전북취재본부 김대홍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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