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락 맞더라도 행복을 꿈꾸어야 한다

[안치용의 노벨상의 문장] 도리스 레싱, <다섯째 아이>

“우린 행복해지려고 했어! 행복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아니, 나는 행복한 사람을 만나 본 적이 결코 없어.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되려고 했지. 그래서 바로 번개가 떨어진 거야.”

<다섯째 아이>(도리스 레싱, 정덕애 옮김, 민음사)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여성 작가는 남성에 비해 여전히 적지만, 현재에 가까울수록 그 숫자가 늘고 있다. 그중에서 깊이로나 무게로나 도리스 레싱(1919~2013년)을 빼놓을 수 없다. 1988년에 발표한 <다섯째 아이>가 국내에 널리 알려진 편이다. 영국의 중산층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 가족 이데올로기의 허상과 인간의 본질 혹은 본성에 관한 통찰을 담았다.

레싱이 이 소설에서 그려낸 다섯째 아이는, 보수적 사고를 지닌 영국의 중산층 부부가 말 그대로 다섯 번째로 낳은 아이이다. 다섯 번째 아이는 부부가 낳은 그 전의 네 명과 달랐다.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부부는 그 아이가 네안데르탈인이라고 생각한다.

소설에서 ‘다섯째 아이’ 벤은 해리엇과 데이비드 부부가 도저히 감당해낼 수 없는 아이이다. 그래서 부부는 그가 이상한 유전자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믿는다. 교외의 큰집에서 전통적인 대가족을 만들어가려고 한 부부의 행복한 꿈의 행로는 벤이 태어나기 전까지 순조로웠다. 비정상적인, 혹은 다른 아이들과 다른 한 아이가 부부의 이상적인 가정을 파괴하는 내용이 소설의 상당 부분을 채운다.

이 작품 발표 후 뉴욕타임스와 인터뷰에서 레싱은 우연히 접한 글 두 편이 집필로 이어졌다고 소개했다. 빙하시대의 유전자가 현 인류에게 전해져 영향을 미친다는 고고학자의 글과, 정상적인 세 아이 뒤에 태어난 사악한 네 번째 딸 때문에 행복한 가정이 파괴되었다는 어느 어머니의 하소연을 담은 잡지의 글이었다. 이 두 편의 글이 작가의 창의성과 만나 <다섯째 아이>로 탄생했다.

인용문의 ‘행복’은 전통적 가족의 행복이다. 배경은 1960년대 런던으로, 당시의 기준으로도 지나치게 ‘정상적인’ 해리엇과 데이비드가 만나 자연스럽게 사랑하고 가정을 꾸린다. 혼전 성관계, 이혼, 혼외정사, 산아 제한, 마약 등 당시의 풍조를 거부하며, 그들의 자녀들이 마음껏 뛰놀 수 있고 뿔뿔이 흩어져 사는 그들 부모형제가 한데 모일 수 있는 커다란 빅토리아풍 집에서 전통적이고 이상적인 그리고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간다.

빅토리아풍 주택이라는 공간을 채우는 건, 아이를 낳고 사랑하는 모성애, 가장으로서 책임감, 모범을 보이며 도움을 주는 부모로서 의무 등 오랫동안 익숙하게 받아들여진 가족애이다. 납득할 수 없는 성향을 지닌 ‘다섯째 아이’가 태어나 모든 행복을 파괴한 상황은 부부에게 가족애로도 넘어설 수 없는 재앙이었을 터이다.

소설의 해리엇과 데이비드 같은 부부가 아니어도 현실에서 다양한 유형의 ‘다섯째 아이’가 태어난다. 레싱의 ‘다섯째 아이’는 현실의 고통을 산출하는 그런 유형과 다르다.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언급했듯 인간 DNA에 축적된 고대 인류의 ‘이상한’ 유전자가 작동한 상황을 상정한다. 물론 현실의 양상은, 불쑥 발현한 고대 유전자이든, 현존 유전자의 이상이든, 비슷할 것이다. 어떤 부모는 소설을 읽고 자신들의 처지를 겹쳐보며 격하게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

인류학의 성과는 우리가 경멸조로 말한 네안데르탈인이 우리 안에 살아있음을 이야기한다. 현생 인류와 네안데르탈인이 조우하여 후손을 낳았고, 그런 경로로 현 인류는 미미하지만 무시하지 못할 수준으로 네안데르탈인 유전자를 몸에 지닌다.

그렇다면 과거는 현재와 비교해 야만일까. 과거에, 시간의 횡단면에서 문명과 야만의 구분이 있었다. 예컨대 우리 옆 나라 중국의 한족이 중화사상에 입각해 한민족을 동이(東夷)라고 부른 것을 비롯해 동서남북의 다른 인류를 오랑캐로 불렀다. 중국어로 ‘헛소리’에 해당하는 호설(胡說)은 못 알아먹는 ‘오랑캐 말’에서 유래했고, 어원이 잊힌 채 지금도 사용된다고 한다.

서양에서도 마찬가지다. 야만인을 뜻하는 바바리안은 고대 그리스에서 “잘 알아듣지 못한 소리”의 의미(의성어)인 ‘바르바로이(βάρβαροι)’에서 유래했고 독일의 바이에른주 등에 그 잔재가 남아있다. 처음에는 자신들과 다른 말을 쓰는 사람들이란 중립적인 뜻이었으나 점차 비하 뉘앙스가 담기게 된다.

시간의 횡단면에서 일어난 구분과 차별은 현재도 일어나는 일이긴 하지만, 더는 유효하지 않고 타당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된다. 물론 공식적인 견해 뒤에 만연한 비공식적 차별까지 사라지지는 않았다.

시간의 종단면에서는 과거를 야만으로 보고 현재를 문명으로 보는 이분법이 유효한 듯하다. 지식과 물질의 양을 기준으로 하면 거의 맞는 말이다. 그러나 지식과 물질의 양만으론 정신의 풍요와 영혼의 평화를 성취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현재보다 과거 인류가 정신과 영혼의 더 큰 충만을 향유했다고 단정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런 면이 있기도 하고 아니기도 할 것이다.

이 소설에서 레싱은 고대의 인간 정신과 영혼에 어떤 평가를 내리지는 않는다. 평가보다는 다름의 인정과 존재를 말한다. 또한 평가보다는 공존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과거가 현재에 들어와 있기에 과거를 부정하면 현재가 마찬가지로 부정되기 마련이다.

“벤을 보면 생각하게 돼요. 이 지상에서 살았던 모든 다른 사람들, 그들이 어딘가에 우리 내부에도 틀임없이 있다고요.”(같은 책)

맞는 말이다. 인류가 과거의 거인 어깨 위에 올라가서 미래를 보는가 하면 그 거인의 발아래 깔려서 미래를 맞기도 하는 게 사실이다. 개인이나 사회나 국가가, 거인의 어깨에서 떨어져 발에 밟히지 않도록 언제나 조심하고 애를 써야 하는 이유다.

때로 파블로 피카소가 알타미라 동굴을 찾은 후 남긴 말과 같은 관점이 성립할 것도 같다. “알타미라 이후 모든 예술은 퇴보했다.”

시간과 역사가 꼭 선형으로, 더 나은 방향으로 흐르는 건 아니다. 그러나 더 나은 방향으로 흐른다고 믿고 행동하는 사람이 많다면 대체로 그렇게 될 가능성이 크긴 하다. 레싱은 소설의 결말에서 벤과 그 무리를 도회지 음습한 어딘가에 풀어놓음으로써 열린 결말을 취한다. 결국 인용문은, 화자의 주장과 반대되는 의견을 담은 것은 아닐까.

번개를 맞는 한이 있더라도 행복해지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이분법, 차별과 단정 너머에서 최소한 사악해지지는 않으며 행복을 꿈 꾸기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고. 그러다 번개를 맞으면? 어쩌겠는가, 이 또한 인생인 것을. 레싱이 꼭 섬뜩한 인류의 미래를 예언했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2007년 노벨문학상 수상.

▲Head of a monster or devil with ‘broken’ eyes. David Humbert de Superville (Dutch, 1770-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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