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사 한 번 못해본 주제에"...한 평생 입 다물고 살아온 독립투사

['백의민족해방단' 김철현의 숨긴 이야기] ①유품 속에서 발견된 원고

“‘거사 한 번 못해 본 주제에…’하고 한 평생 입 다물고 살아 왔으나 편집진의 간청에 마지못해 입을 열었습니다.”

최근 전북특별자치도 부안군 주산면에 거주하는 김영삼(61)씨는 20여 년 전에 작고한 부친 고 김철현(金喆鉉·1928~1996)선생의 유품을 정리하다 오래된 원고뭉치를 발견했다.

원고 뭉치는 앞뒤와 중간의 일부가 빠진 낙장본 2건 31매와 수신인이 불분명한 장문의 편지 1건, 30여 장에 달하는 기고문 1건 등 모두 4건이었다.

기고문의 맨 끝에는 ‘무진(戊辰) 조춘(肇春)’이라고 기록돼 있어 1988년 초봄에 작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기고문의 수신처는 춘천교육대학 총동창회가 발간하는 ‘춘천교육대학 50년사’편찬위원회.

1939년 관립 5년제로 개교한 춘천사범학교가 1989년 개교 50주년을 앞두고 기념 책자를 발간하면서 생전의 김철현 선생에게 원고를 의뢰했던 것인데 그 원본이 보관됐다가 최근 발견된 것이다.

‘백의민족해방단 사건’이라는 제목의 기고문에는 어마어마한 내용들이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김철현 선생은 원고 말미에 ‘후기’의 형식을 빌려 “거사 한 번 못해본 주제에 (나서기가 망설여져) 한평생 입을 다물고 살았으나 편집진의 간청에 마지못해 입을 연다”고 기고문 작성의 배경을 밝혔다.

▲김철현 선생이 작성한 원고의 일부분. '거사를 한번도 못해본 주제에 평생 입을 닫고 살았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

200자 원고지 29매에 달하는 기고문은 1945년 광복을 5개월가량 앞둔 시점에 당시 17~18세의 사범학교 재학생들이 ‘거사’를 벌이기 위해 회합을 갖고 자금을 모으는 등 무장투쟁을 벌이려다 사전에 발각돼 경찰서에 끌려가 광복을 맞이한 다음날(8월16일) 풀려나는 모든 과정이 꼼꼼하게 서술돼 있었다.

특히 눈길을 끄는 부분은 일제 순사들(대부분이 한국인)의 잔혹한 고문 방법과 경찰서 감방 안에서의 공포스러운 분위기 등이 너무나도 생생해 읽는 이들로 하여금 전율을 느끼게 만든다는 점이다.

전북 부안에서 태어난 김철현 선생은 열 살 무렵의 어린 나이에 강원도로 가서 춘천사범학교(현 춘천교육대학교) 3회로 1941년 입학해 광복 이듬해인 1946년 졸업한 뒤 전북지역의 초등학교 교사로 봉직하며 1993년 퇴임 때까지 40년 넘게 아이들을 가르쳤다.

너그러운 본래의 품성도 있었겠지만 선생은 아이들을 가르칠 때 다그치거나 매를 대는 일이 거의 없었고 만면에 웃음을 가득 머금고 있어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 많았다는 것이 주변의 설명이다.

▲젊은 시절의 김철현 선생이 자신의 제자를 안은 채 밝게 웃고 있다. ⓒ유족 제공

선생은 출퇴근을 할 때면 도시락을 실은 자전거를 끌고 아이들의 걸음 속도에 맞춰 걸으며 그들과 이야기 나누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이처럼 너무나도 평범하고 조용한 시골학교의 교사였기에 그가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하다 끔찍한 일을 당했으리라는 것을 이웃이나 제자는 물론 가족들조차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실제로 함께 근무를 했던 교사들조차 그가 사범학교 재학시절에 ‘백의민족해방단’이라는 무장투쟁단체의 일원으로 일본제국주의 경찰을 상대로 테러를 모의했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1970년대 후반 전북 부안의 한 초등학교에서 김철현 선생과 함께 근무했던 강병춘(70) 전 교사는 “제자나 후배 교사들에게 매우 인자했던 분으로 기억한다”면서 “약주를 좋아하셔서 가끔 퇴근 후에 함께 대포를 기울이던 추억이 있는데 한 번도 자신이 일제강점기에 그런 활동을 하셨다는 말씀은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평소에도 자신을 내세우거나 자랑하는 분이 아니었다”면서 “그런 성품 때문에 굳이 말씀을 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고 덧붙였다.

남들에게 자신을 내세우기 꺼려했던 김철현 선생의 육필 원고를 통해 79년전 열여덟 살의 나이로 무장투쟁에 나서고자 했던 식민지 청년의 고독하고 힘겨웠을 기억 속으로 들어가 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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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홍

전북취재본부 김대홍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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