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민중은 마침내 비참의 공동체가 되었다

[인문견문록] <식민지 트라우마>·<한국인의 탄생>

한국은 빛과 어둠이 동시에 강한 사회다. 수준 높은 문화상품으로 세계의 찬사를 받지만 그 상품의 내용은 어두움 투성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상품이었던 기생충, 오징어게임, 더글로리 셋 모두가 빈부격차, 폭력과 뒤틀린 욕망이 투영된 사회를 묘사한 것이다. 한국의 성공의 이면에는 어두움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한국 사회를 직조해낸 빛과 어둠의 기원을 찾아나선 책이 있다. 전 성공회대 교수 유선영의 <식민지 트라우마>(유선영 지음, 푸른역사 펴냄)이다.

저자는 책을 쓰게 된 계기가 "왜 우리는 이렇게 살고 있는가?"란 질문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사회 모든 부문에 침투한 권위주의, 부정과 부패, 국가와 제도에 대한 국민의 불신, 학벌주의와 서열주의, 한 인생의 성공이 물질로 환전되는 물질주의, 경쟁위주의 사교육, 성형한국의 외모주의, '갑질'이 만연한 폭력과 착취의 아비투스에 시선이 머물렀으며 의문은 힘을 얻었다."(상기책 인용 인용미기재시 동일) 어느 사회에나 권위주의, 부정부패, 서열주의, 폭력은 있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그 양상이 다르다. 유선영은 먼저 프랑스 사회학자 부르디외의 아비투스 개념을 소개한다. 아비투스란 특정한 환경과 조건에 의해 형성된 성향이나 사고, 인지, 판단과 행동의 체계를 의미하는 개념이다. 한 사회의 사람들이 가진 독특한 감정구조 즉 아비투스가 한 사회를 특정한 형태로 주조한다. 한번 형성된 아비투스는 특별한 계기를 만나 변화하기 전까지 지속된다. 유선영은 한국인의 감정의 기원으로 일제강점기 전후를 주목한다.

비교적 안정적 사회를 오래 유지했던 조선이 급격히 와해된 것은 서세동점이란 국제적 흐름 때문이었다. 이런 세상에서 한국인이 제일 먼저 맞닥뜨린 감정은 '업수이여김'이었다. 19세기말 독립신문을 만들고 독립협회를 주도하던 서재필은 미국으로 추방당하게 된다, 그는 떠나기 전 대중을 향해 고별연설을 한다. "나라를 부강케 하고 용맹한 마음으로 나라를 위해 죽기를 작정하고 앞으로 나아가 세계 만국에 동등 대접을 받고 다시는 외국 사람들에게 업수이 여김을 받지 말지어다." 그는 눈물에 목이 메어 연설을 다 마치지 못했다. '업수이여김'이라는 감정은 조선 민족의 일상 경험으로부터 생겨난 것이다. 일본의 조선지배가 본격화된 이후 일본 경찰의 조선인에 대한 폭력과 모욕은 흔한 일이었다. 그야말로 경찰은 무소불위의 존재였다. 경찰의 폭력은 반일혐의가 있는 이들에게만 향하지 않았다. 특히 위생행정을 핑계로 폭력은 불특정 다수 대중을 향했다.

총독부 산하 경무국 소속 위생경찰의 활동에 대한 유선영의 설명이다. "일제는 식민지민의 일상, 신체, 의식주, 생활방식을 규율하고 직간접적으로 개입하는 것을 합리화,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근대적 위생 개념·제도·담론을 활용했다." 문제는 위생경찰의 활동이 지극히 폭력적이었던 것에 있다. "청결을 빌미로 매년 몇 차례 정기적, 부정기적으로 농민에게 가하는 구타와 모욕은 다른 경관이나 헌병이 인민을 억압 멸시하는 정도 이상으로 감정을 상하게 했다.", "여자, 노인, 아이 할 것 없이 경찰의 매질, 구타, 무시와 조롱, 협박으로 공포 분위기가 연출되는 것이 청결검사, 검병 호구조사였다. 그러나 두려움보다 더 괴로운 것은 일본인 경찰과 조선인 순사들이 한집안의 어른인 노인을 자식들 앞에서 쥐어박고 더럽다고 비난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특히 일상의 청결상태를 순사에게 검사받는 과정은 말 그대로 모욕의 시간이었다." 현장에서 경찰의 재량권은 무제한에 가까웠기에 70대 노인이나 부녀자를 두들겨 패는 것은 비일비재했다. 폭력을 당하고도 항의 한번 못하고 그들에게 음식을 접대하거나 뒷돈을 바쳐야했다. "1924년 함경남도 홍원에서는 일본인 순사부장이 추계청결을 잘못했다고 한마을 40여 가구의 호주를 모두 구타했으며 칼을 휘둘러 상해를 입히기도 했다." 칼을 휘두른 경찰에게 내려진 처분은 고작 '면직'이었다.

위생이 목적이라기 보다 조선인을 폭력에 순치시키는 것이 더욱 중요했다. 총독부는 조선인들을 보호하고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만들었다면서 '경찰범처벌규칙'을 공포했다. 87개 항의 행위를 규정했는데 이중 1항의 요주의자가 생업없이 각 지방을 배회하는 자 즉 '부랑자'였다. 87개나 되는 항목은 거의 모든 측면에서 조선인을 전지적으로 감시할 수 있게 만들었다. 법령위반자에게는 일본에서는 벌금이 주였으나 조선에서는 태형(매질)과 구류처분이 많았다. 1920년 태형이 폐지될 때까지 매해 3~4만 명의 조선인이 경찰에게 매질을 당했다. '부랑자'라는 명목으로 특정한 범죄행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처벌의 대상이 되었다. 일본은 '풍속경찰'이라는 직분을 만들어 요리집, 매음장, 예배소, 신문과 출판물도 풍속관리대상으로 관리했다. 특별한 곳도 아니었다. 연극장에 모인 관중조차도 수시로 단속의 대상이 되고 체포되었다. 체포되어 매질을 당하고 길거리에서 포승줄에 묶인 채 끌려다녔다. 레닌 추도식을 조직한 진보조직의 청년들도 부랑자로 지목되어 처벌되었다. 모든 조선인이 경찰 폭력의 대상이 되었다.

아무런 범죄요건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행해진 풍속경찰에 의한 단속은 숨겨진 의도가 있었다. 잠재적 불안요소가 될 인물들을 부랑자로 호명하며 처벌하는 것은 적지 않은 효과를 가져왔다. "우선 부랑자는 일본이 조선을 식민화해야 하는 이유로 내세워 선전했던 조선 민족의 야만성과 열등성을 방증하는 상징적 존재들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구악과 오랜 적폐인 상류층 부랑자를 단속하고 징치하는 총독부는 풍속교화와 민족성제도라는 문명화 사명을 실행하는 것으로 포장될 수 있었다." 자신들의 행위를 문명의 세례로 선전하며 폭력을 통해 조선인을 완벽히 순종시키는 것이 일본의 진짜 의도였던 것이다.

모욕을 벗어나기 위해 조선인들은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 교육열이 조선 전역을 뜨겁게 달궜다. 조선인들은 근대가 가져온 교육시스템에서 승리해서 자신들이 모욕받아 마땅한 존재가 아님을 증명해야 했다. 또한 모욕의 가해자는 일본이었고 그들은 근대적 물질문명을 상징하는 존재들이었기에 조선인은 물질적 성공을 미친 듯이 추구하기 시작했다. 신분제가 급속히 이완되는 틈을 타 물질적 성취를 통한 신분 상승을 꾀했다. 교육열, 물질숭배 이 모든 것들이 하나처럼 맞물려 있었다. 그러나 모욕감, 수치심이 출구를 찾지 못할 때 자기모멸감은 증폭되었고 타인과 자신을 향한 공격성으로 전변한다.

알제리 혁명전쟁에 참가한 정신과 의사 프란츠 파농은 식민지민의 정신을 분석했다. 파농은 책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프란츠 파농 지음, 남경태 옮김, 그린비 펴냄)에서 식민지민의 피부 아래에는 히스테리 증상인 공격성이 자리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알제리 흑인에게 나타나는 귀신들림과 춤에 대한 열광은 파농에 따르면 공격성의 정신질환적 표출이었다. "장기간 모욕과 폭력에 노출된 사람들은 (중략) 수치감을 극복하기 위해 허세를 부리고 스스로를 과대평가하면서 남과 비교하여 우월하다는 자기확신에 집착하기도 한다." 수치감이 촉발한 장기간의 무력감은 공격성을 강화시킨다. "장기간 무력감을 경험한 사람은 공격적으로 될 여지가 큰데 이는 자신을 무력상태에 밀어넣은 트라우마를 정복하기 위해, 수치심으로 인한 고통을 완화하고 자신의 가치를 증대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기애적 분노에 사로잡혀 공격적 행동을 하는 것이다. 공격성과 순응성은 장기간의 모욕과 수치에 대한 심리적 반응이다."

모욕감과 수치심은 사람을 극단적으로 몰아간다. 수치심을 극복하기 위해 나르시시즘이란 방어기제가 작동된다. 식민지민의 정체성은 현실적 지반을 확보하지 못한 채 흔들린다. 그 흔들림은 마음을 더욱 어수선하게 만든다. 식민지민의 삶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나아지지 않는다. 남은 유일한 길은 스스로를 식민지민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식민지민이 아닌 채 살아가는 것이 열패감에 시달리는 식민지 지식인들의 출구가 된다. 결국 일단의 무리는 정신적 친일파가 된다. 우리의 비참함도 '결국 우리가 못난 탓'이라 생각하는 분열적 정체성을 파농은 식민지형 지식인의 전형으로 보았다.

당대 신문의 사회면은 식민지민중의 비참한 처지를 알리는 기사들로 가득했다. "사회면을 보면서 입게되는 상감(感傷)은 배가 부를 정도로 충분하고도 넘치는 상태였다. 빈민굴, 떼죽음, 파멸해가는 농촌, 학생들의 동맹휴학, 염세자살, 끊이지 않는 검거로 하루하루가 반복되는 '비참한 현실'에 감정을 이입하고 분노하고 좌절하는 고통을 경험하는 일상인 것이다" "사회면은 '항상 검거, 징역, 자살, 기근 등이어서 참혹해서 볼 수가 없는' 식민지 사회의 거울이었다." 서로의 절망과 비참함에 공감하면서 한반도 민중은 마침내 '비참의 공동체'가 되었다.

책을 읽으며 외할머니를 떠올렸다. 어린 시절 필자는 외할머니 손에 자랐다. 외할머니는 "순사 온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어린 나이여서 순사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책을 읽고난 후 식민지 시절을 살아내신 외할머니에게 순사가 어떤 존재였었는지 이제야 이해할 것만 같다. 한반도 민중은 순사라는 괴물에 내맡겨진 수인(囚人)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 시기를 다룬 탁월한 책을 이미 갖고 있다. 최정운의 책 <한국인의 탄생>(미지북스 펴냄)이다. 유선영의 책은 최정운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절창'이다. 절창이되 슬픈 절창이란 의미에서.

▲ <식민지 트라우마>(유선영 지음, 푸른역사 펴냄), <한국인의 탄생>(홍대선 지음, 메디치미디어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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