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과 불교는 동병상련

[기고] 불교사-여성사의 교차 해석이 필요하다

기황후가 국립중앙박물관에 살아 있다. 이곳을 방문한 관람객이라면 높다랗게 서 있는 경천사지 십층석탑(1348년, 충목왕 4년)을 한번 쳐다볼 것이다. 탑의 1층부에는 원나라 혜종, 기황후, 황태자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글이 있다. 기황후의 자금 관리를 맡은, 고려인 환관 고용보와 천민 출신으로 높은 자리까지 올라간 김융이 이 석탑의 시주자로 되어 있다. 한때 일본으로 무단 반출되었지만 한글 띄어쓰기를 처음으로 제안한 호머 헐버트 등의 노력에 힘입어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보스턴미술관에 있던 지공(指空)화상과 나옹(懶翁)화상의 사리가 100년 만에 원래 자리인 양주의 회암사로 돌아왔다. 인도 출신의 지공은 신라, 고구려, 백제의 고승들도 유학했던 날란다(Nālandā) 불교대학에서 공부했다. 원나라를 거쳐 고려에 온 그는 약 2년 7개월간 순례하면서 회암사가 고려의 날란다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목은 이색(李穡)의 기록에 나와 있다. 지공은 기황후의 부름을 받아 원나라 수도였던 대도[大都, 현재의 베이징]로 돌아갔고 나옹이 뒤이어 왔다. 두 화상을 만난 기황후는 회암사의 중창을 요청했다. 나옹은 귀국 후에 공민왕의 왕사가 되어 회암사 주지를 맡으면서 중건을 완수했다. 나옹의 제자인 무학대사도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자 이 사찰의 주지가 되었다. <동국여지지>(東國輿地誌)에 의하면, 기황후의 능은 연천군에 있다고 전해져 내려온다.

"한국사와 불교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갖는다." 용인의 호암미술관에서 전시된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을 감상하면서 최남선의 글이 떠올랐다. 요즘 다소 변하고 있지만 '고려는 불교, 조선은 유교'라는 이분법적 역사의식이 여전히 강하다. 이 전시는 이런 도식을 뒤흔들어 놓을 만큼 강한 메시지를 남겼다. "여성과 불교는 동병상련의 관계를 유지했다." 특히 주목해야 할 인물은 어린 나이에 왕이 된 명종(明宗)의 어머니 문정(文定)왕후이다. 그는 불교와 유교의 소통에 힘쓴 보우(普雨)대사를 앞세워, 무려 400탱(幀)의 불화를 회암사에서 제작하도록 했다. 하지만, 그가 제주에서 살해당하고 난 후에 회암사가 불에 타 사라졌고 그 많은 불화는 일본 등으로 흩어졌다. 보우는 조선 최초의 불교 순교자로 평가를 받아야 한다. 그의 제자인 서산대사가 승병을 일으켜 임진왜란에서 일본을 물리쳤고, 또 다른 제자인 사명대사가 교토까지 가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담판 외교를 했음을 기억해야 한다.

▲기황후 영정. ⓒ타이페이 고궁박물관

불교와 여성의 동병상련 관계는 훈민정음의 창제에 따른 여러 불경의 언해본 번역과도 맞물려 있다. 세종의 둘째 딸인 정의(貞懿)공주는 어려운 한문에 토를 달아 우리말 표기를 가능하게 했다. 불경의 기초가 된 산스크리트어와 몽골어인 파스파 문자에 능통했던 신미(信眉)대사는 불경을 언해본으로 번역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이들이 한글의 창제와 확산에 미친 공헌을 제대로 평가할 필요가 있다. 왕실과 사대부의 여성들이 한글을 적극적으로 배워 사용했다는 사실도 못지 않게 매우 중요하다. 세조의 부인이며 예종의 어머니요 성종의 할머니였던 정희(貞熹)왕후는 많은 불화의 제작을 적극 지원했다. 이 전시의 백미에 해당하는 한 쌍의 작품인 <석가탄생도>와 <석가출가도>는 정희왕후가 지원했음에 틀림없다.

앞으로 나아갈 길이 분명해졌다. 첫째, 서로 다른 분야로 치부된 불교(미술)사, 여성사, 국어사의 영역을 한국사의 큰 틀 속에서 씨줄과 날줄로 엮어야 한다. 한국사의 콘텐츠가 더욱 풍성해질 것이다. 수년 전 갑자기 막을 내린 영화 <나랏말싸미>의 역주행 상영도 기대한다. 둘째, 기황후 능에 대한 정부 차원의 발굴 조사가 시급히 필요하다. 기황후, 지공, 나옹의 관계는 물론이거니와, 고려 말과 조선 초의 동아시아 역사를 다시 써야 할지도 모르는 유물이 나올지 누가 알겠는가. 셋째, K-불교미술 작품을 세계 곳곳의 유명 미술관과 박물관에서 전시함으로써, 한국 문명의 위상을 널리 홍보해야 할 것이다. 일본, 유럽, 미국 등에 흩어져 있는 불교미술 작품을 체계적으로 조사해서 적극적으로 환수하려는 입법 조치가 요구된다.

*이종찬은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존스홉킨스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버드대학과 하버드-옌칭연구소에서 안식년 연구를 했고, 영국 니담연구소와 웰컴 의학사연구소에서 연구했으며, 한국 사회사학회장을 맡았다. 아주대학교에서 정년을 마친 후 현재 지구세계연구소장으로 다양한 융복합적 층위에서의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열대 아프리카, 중남미, 동남아시아와 서구의 웬만한 나라들을 교차로 탐방하고 연구하면서, 열대학(tropical studies)을 정립해 나갔다. 《열대의 서구, 朝鮮의 열대》에서 핵심 메시지 "서구의 예술과 학문은 열대를 은폐했다."를 설파했다. 《自然史혁명의 선구자들》에서 自然史를 열대학과 서구사상사의 융합적 관점에서 논의했다. 《난학의 세계사》에서 일본, 열대, 네덜란드 사이의 문화융합을, 《파리식물원에서 데지마 박물관까지》에서 自然史가 서구적 근대의 형성에 미친 역할을 각각 규명했다. 《훔볼트 세계사 - 自然史혁명》은 동아시아에서 최초로 발간된, 훔볼트에 관한 저술이다. 《인류세와 기후위기의 大 가속》(엮음)에서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학의 융합적 관점에서 지구 자연사를 탐구했다. 현재는 《아시아의 고려, 中華의 조선》(가제)을 집필하고 있는데, 이는 Planetary Global History의 관점에서 Planetary Korean History를 정립하려는 문제의식에 근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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