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주의 행위자'가 된 러시아, 혼돈의 지구 정치 지형이 확정되었다

[장석준 칼럼] 제1차 세계대전 직전을 연상시키는 세계 정세

정확히 1년 전에 나는 이 지면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에 반대하며 러시아 안에서 푸틴 독재에 맞서 싸우는 사회주의자들, 그 가운데에서 국내에도 상당히 알려진 저술가 보리스 카갈리츠키를 소개했다(☞관련기사 : "'부패한 독재체제서 살고 싶지 않다', 러시아 저항세력의 절박한 외침"). 전쟁을 끝내려면 푸틴 정권을 끌어내려야 한다는 카갈리츠키의 외침을 전하면서 나는 그의 신변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반전운동가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들여 중형을 선고하고 있던 푸틴 정부가 아무래도 가만있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 글이 나오고 불과 한 달 뒤인 작년 7월 26일에 KGB의 후신 격인 연방보안국이 "테러리즘을 옹호"했다는 명목으로 카갈리츠키를 전격 체포했다. 그 즈음에 전쟁은 러시아 측 예상과 달리 1년 넘게 장기화하고 있었고, 그래서 푸틴 정권은 9월에 끝내 국내 여론 악화를 감수하면서 부분 동원령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이런 국면에 벌어진 카갈리츠키 체포는 누가 보더라도 반전 여론의 구심을 선제공격하여 고립시키려는 시도였다.

그래도 처음에는 탄압이 합법의 외양을 완전히 벗어버리지는 않는 것처럼 보였다. 푸틴 정부가 그나마 세계와 소통하는 유일한 통로 역할을 하고 있는 브릭스(BRICS)의 참가국들 중 브라질, 남아프리카공화국, 인도 등의 좌파 인사들이 카갈리츠키 구명 서명에 나섰고, 그 덕택인지 작년 말 재판에서는 구속은 면한 벌금형 판결이 나왔다.

그러나 올해 3월에 실시된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분위기가 급변했다. 대선 한 달 전인 2월에 돌연 카갈리츠키는 벌금형이 아닌 5년형을 선고받았다. 푸틴의 최고 정적 알렉세이 나발니가 북극해에 인접한 죽음의 교도소에서 의문사한 바로 그때에 카갈리츠키는 66세의 나이에 그 북극권 교도소에서 5년 동안 갇혀 지내라는 판결을 받은 것이다.

카갈리츠키 말고도 반전운동에 나선 수많은 이들이 현재 중형을 받아 감옥에 갇히거나 국외로 추방되거나 망명자가 되어 있다. 이것이 우크라이나 침공 2년째인, 그리고 푸틴 정권 24년차를 맞이한 지금 러시아의 현실이다.

▲우크라이나 하르키프 지역에서 러시아군과 격전을 벌이던 보브찬스크 인근 부가이프카 마을에서 경찰이 한 노인을 버스로 대피시키고 있다. ⓒAP통신

제1차 세계대전 직전을 연상시키는 세계 정세

그러나 푸틴 정권은 오판했다. 카갈리츠키 같은 이들의 목소리가 새어나오지 못하게 막으려고 탄압에 나섰겠지만, 목소리는 제압당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우렁차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사실 러시아 바깥에서는, 심지어 좌파조차 소비에트연방 붕괴 이후에는 러시아인들의 이야기에 그다지 진지하게 귀 기울이지 않았다. 우리말로 번역된 카갈리츠키 저서 목록만 봐도 이를 실감할 수 있다. 모스크바 발 뉴스가 뜨거운 관심거리이던 1990년대 초에 집중 번역된 다음에는 소개된 책이 거의 없다.

한데 이제는 사정이 바뀌었다. 반전운동과 카갈리츠키 체포 등을 계기로 뒤늦게나마 러시아 내부의 치열한 노력에 관심과 연대의 눈길이 쏠리고 있다. 장 뤽 멜랑숑, 제러미 코빈, 슬라보이 지젝 등이 함께 한 카갈리츠키 구명 서명운동은 이런 분위기를 생생히 보여주는 사례다. 푸틴 정권의 의도와 정반대로 러시아 내 반체제 좌파에 대한 탄압은 러시아 좌파, 사회운동에게 오랜만에 국제연대의 숨통을 열어주고 있다.

어쩌면 그 일환일까. 최근 카갈리츠키의 새 책 영어판이 영국 좌파 출판사 플루토(Pluto)에서 나왔다. <오랜 후퇴: 좌파의 쇠퇴를 뒤집을 전략(The Long Retreat: Strategies to Reverse the Decline of the Left)>이 그 책이다.

제목인 '오랜 후퇴'는 단지 러시아 좌파의 후퇴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신자유주의 시기 동안 전 세계 좌파가 예외 없이 겪은 침체와 퇴행을 말한다. 마치 1970년대 유신 시절 대한민국을 연상시키는 나라의 저자가 썼으니 자기 나라의 참혹한 사정을 고발하는 책이겠거니 넘겨짚는다면 오산이라는 이야기다. 한참 전에 우리말로 소개된 책들에서도 그랬듯이, 카갈리츠키의 시야는 러시아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러시아와 상관없는 붕 뜬 시각에서 남의 나라 이야기만 읊는 것도 아니다. 조국이 포함된 세계 전체를 시야에 담고, 다시 그 세계의 맥락에서 조국을 짚는다.

<오랜 후퇴> 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이후 상황을 직접적으로 다룬 대목은 "제8장. 전쟁, 기아와 경제적 구조재편"이다. 이 장에서 카갈리츠키는 푸틴 독재의 패악과 실정을 늘어놓거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선을 시시콜콜 따지지 않는다. 좀 당황스러울 만큼 곧바로 제1차 세계대전 이야기를 꺼낸다. 그가 보기에 지금 세계 정세를 살피는 데 가장 적절한 거울이 100년 전 이 전쟁이기 때문이다.

첫 번째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직전까지만 해도 강대국들이 모조리 참여하는 전면전이 벌어질 가능성을 높게 본 이는 거의 없었다. 설령 유럽 대륙의 몇몇 국가들이 그런 전쟁에 뛰어들 수는 있어도, 당시 세계체제 안에서 가장 안온한 위치에 있던 대영제국의 리버럴 성향 정치가들이 참전 결정을 내리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었다. 그런데 1914년 여름 갑자기 그런 일이 벌어졌다! 2022년 유럽 대륙에서 돌연 발발한 전면전 역시 비슷했다. 국지적 충돌이 느닷없이 총력전으로 폭발했고, 은행가들과 노닥거리는 데나 익숙하던 유럽 정치가들이 전시 지도자로 돌변했다.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권력자들의 이러한 선택은 변덕스러워 보이기만 한다. 그러나 카갈리츠키는 이것이 결코 우발적인 것은 아니며 이유가 없지도 않다고 지적한다. 그 이면에는 바로 점점 더 절박해지는 경제-사회적 상황이 있었고, 지금도 그렇다. 제1차 세계대전 직전 유럽 열강 집권자들은 적대국들 탓에 해외에서 수익을 뽑아내는 데 한계에 부딪혔을 뿐만 아니라, 그 이상으로 국내에서 노동계급과 여성 같은 '몫 없는 이들'의 도전에 직면해 있었다. 마찬가지로 푸틴 정권 역시 팬데믹 이후 경제적 긴장과 장기 독재가 낳은 정치적 긴장을 풀 출구가 필요했다. 두 경우 모두 마침내 '전쟁'이 최고위층의 '합리적' 대안으로 급부상했다.

<오랜 후퇴> 제8장에서 카갈리츠키가 펼치는 논의는 현 상황과 제1차 세계대전 사이의 이러한 유비에만 머물지는 않는다. 권력자들이 겁 없이 선택한 총력전 상황이 당대 자본주의 구조를 심각하게 변화시킬 수밖에 없다는 점을 다시 제1차 세계대전 사례를 들어 설명하고, 전쟁 수행과 경제 봉쇄 대응 등의 명분 아래 국유화나 경제 계획이 당연하다는 듯이 집행되는 러시아(그리고 우크라이나)의 현 상황을 의심심장하게 분석한다. 그리고 자본주의 엘리트들이 무의식적으로 연 이 새 국면에서 민주주의와 평화, 전 지구적 복합위기 극복을 지향하는 혁명이 어떤 모습을 취할지 고민하자고 제안한다.

이러한 카갈리츠키의 논의에는 흥미로운 쟁점이 많지만, 일단 여기에서는 반전평화를 즉각적인 과제로 삼는 러시아 내부 좌파가 현 세계 정세를 제1차 세계대전 당시와 비슷한 지형과 구조로 이해한다는 점에 주목하고 싶다. 이 구조는 로자 룩셈부르크나 V. I. 레닌 같은 마르크스주의자들에 의해 주로 분석됐고, 이런 분석의 대강은 오늘날 좌우를 떠나 역사가라면 누구나 받아들이는 상식이 되어 있다. 그 골자는 제국주의 국가들 간의 치열한 경쟁과 대립이다.

신냉전, 다극화가 아닌 제국주의 국가 간 경쟁의 부활

현 세계 정세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또 다른 러시아 좌파 사회과학자 일리야 마트베예프가 최근 미국 저널 <자코뱅>에 발표한 글 "우리는 제국주의 경쟁이 심화되는 세상에 살고 있다"(Ilya Matveev, "We Live in a World of Growing Imperialist Rivalry", Jacobin, 2024. 5. 28)에 보다 깔끔히 정리돼 있다. 젊은 지구정치경제 연구자인 마트베예프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초기부터 푸틴 정권을 신랄히 비판했고, 현재는 미국에 체류하고 있다.

마트베예프 역시 카갈리츠키처럼 현 정세가 제국주의 열강 간 경쟁과 갈등이 극대화되는 형국이라 진단한다. 단, 열강의 숫자와 영향력의 상대적 격차 등은 100년 전과 크게 다르다. 이번에는 제국주의 경쟁자가 셋으로 압축되며, 선두 주자와 도전자 그리고 나머지 하나 사이에 힘의 격차가 제법 크다. 그 세 열강이란 미국, 중국 그리고 러시아다. 물론 구 제국주의의 잔재인 서유럽 국가들이 있지만, 이들은 군사력 등에서 철저히 미국에 종속되어 있기에 이 셋과 동등한 행위자라 보기는 힘들다.

이러한 규정은 현재 지구상의 가장 뜨거운 현안인 미국-중국 대립이 20세기 냉전의 반복, 즉 신냉전이 아니라는 판단을 깔고 있다. 이 점에서 마트베예프는, 중국이 고전적 제국주의론에서 제국주의를 판별하는 근본 지표인 자본수출국으로 부상했다는 훙호펑의 진단(<제국의 충돌: '차이메리카'에서 '신냉전'으로>, 하남석 옮김, 글항아리, 2022)에 동의한다. 상품시장뿐만 아니라 금융투자 무대를 놓고 미국과 중국은 경제적 이해가 충돌할 수밖에 없고, 100년 전 제국주의 충돌과 마찬가지로 이런 경제적 이해 갈등이 미-중 대립의 핵심 토대라는 것이다.

문제는 러시아다. 러시아는 어떤 면에서 보더라도 중국과 대등하게 취급될만한 도전자는 아니다. 자원수출국으로서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갖추고 있고 최근에는 이 나라에서도 투자처를 찾아 헤매는 유휴 자본이 늘어났지만, 그렇다고 중국처럼 미국을 추월하려는 야심을 갖고 있지는 못하며 그럴 역량도 없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선에서 드러나듯이, 재래식 전력 역시 허점이 많다. 미국, 중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하는 거의 유일한 요소가 있다면 그것은 핵 전력이다.

마트베예프는 이 세 번째 주인공을 움직이는 힘이 중국의 경우와는 달리 경제적이기보다는 이데올로기적인 성격을 강하게 띤다고 주장한다. 그 이데올로기는 구 소련의 공식 이념이었던 마르크스-레닌주의와는 달리 세상의 진보를 약속하는 시늉조차 하지 않는다. 단지 푸틴 치하 러시아에 대한 외부의 위협을 최대한 과장하면서 러시아가 힘에 겨운 제국주의 경쟁의 세 번째 주자로 나서도록 부추길 뿐이다.

가령 우크라이나 민병대가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 나치 부역자였던 극우 민족주의자 스테판 반데라를 숭배한다면서 우크라이나 침공을 '반파시즘 성전'이라 둘러대는 푸틴 대통령의 사표(師表)는 정작 레닌도, 스탈린도 아닌 이반 일린이다. 일린은 구 러시아 제국의 향수와 20세기 파시즘을 잇는 독특한 극우 사상가다. 구 제국의 반혁명 귀족 출신인 그는 이탈리아 무솔리니 정권과 독일 히틀러 정권을 열렬히 찬양하면서 소비에트연방 타도 이후에 러시아 사회가 추구할 미래가 이들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지금, 이런 사상의 추종자들이 '반파시즘 전쟁'을 부르짖고 있는 것이다.

마트베예프는 이런 도발적 이데올로기 이면에 실은 지배 엘리트의 공포가 있다고 본다. 2010년대에 우크라이나의 마이단 혁명을 비롯해 구 소비에트연방 소속 국가들을 휩쓴 대중의 직접행동은 푸틴 정권에게 NATO 확장이나 우크라이나 친서방파의 도발보다 더 실질적인 위협으로 다가왔다. 마치 20세기 벽두에 서유럽 보수 지배층이 그랬던 것처럼, 푸틴 정권은 이런 내부로부터의 위협을 선제적으로 제압하기 위해 자기 역량을 넘어서는 제국주의적 대외 공세를 감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러시아로서는 힘에 부치는 모험이라 하더라도 이 나라가 세상에 끼친 영향만큼은 결정적이다. 러시아가 제국주의 행위자로 뛰어듦으로써 2020년대에 혼돈을 거듭하던 지구 정치 지형이 돌이킬 수 없이 확정되었다. 미국의 점진적인 패권 약화 혹은 후퇴를 통해 열린 국면은 어쩌면 가장 안 좋은 방향으로 궤도가 정해졌다. 그것은 미-중 신냉전도 아니고 남반구가 주도하는 다극화도 아닌 제국주의 열강 간 경쟁과 대립의 복귀다. 다만 한 세기 전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이번에는 '인류를 몇 번이나 절멸시킬 수 있는 대량 핵무기로 무장한' 세 제국주의 국가의 대립이라는 것이다.

▲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14일(현지시각) 기자회견 겸 국민과 대화에서 질문에 답하고 있다. ⓒ타스통신=연합뉴스

네 번째 행위자를 찾아서

2022년 러시아의 전격적인 전면전 감행 이후 세계 여론은 양분됐다. 우크라이나를 지지한다면서 미국과 서유럽 국가들(일본까지 포함하여)의 군사동맹에 무턱대고 박수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러시아를 미 제국의 희생양으로만 바라보며 침략자를 편드는 이들도 있었다. 전 세계 좌파도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수많은 분파와 경향으로 어지럽게 나뉘어 있던 각국 좌파는 2022년 이후 더욱 심각하게 분열했다.

한국도 여기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지와 연대를 기회 삼아 미국의 대중, 대러 포위 정책을 지지하고 더 나아가 자신은 예전부터 '자유주의자'였다고 커밍아웃하는 이들이 생겨났고, 반대편에서는 푸틴 정권을 미국 단일지배체제를 깨뜨리고 다극화 세상을 여는 선구자로 치켜세우는 이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1년 전 카갈리츠키의 반전론을 소개하는 글에서도 지적했지만, 이러한 두 입장 모두 현재 지구를 관통하는 대립의 실체를 온전히 직시하지 못하고 있다. 카갈리츠키나 마트베예프 같은 러시아 반체제 좌파가 내놓는 '제국주의 열강 간 대립'이라는 진단은, 비록 아직 분석의 출발 정도에 머물고 있기는 하지만, 이런 극단론들보다는 훨씬 냉철한 그림을 제시한다.

무엇보다, 지금 진정한 대안은 "현대 자유주의의 개인주의 논리"(미국)와 "새로운 보수주의의 전체주의적 공세"(중국, 러시아) 사이의 양자택일이 아니라 이 둘 다를 극복하는 것이라는 카갈리츠키의 호소는 커다란 설득력을 지닌다. 이를 달리 말하면, 제국주의 주역들이 늘 불안하게 그 존재를 의식하지만 그럼에도 아직은 존재를 제대로 드러냈다고 할 수 없는 현 정세의 네 번째 행위자가 실체를 확보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러시아의 반전평화 시민들 그리고 이들과 소통, 연대하려는 이곳의 우리가 바로 그 네 번째 주인공의 씨앗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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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준 전환사회연구소 기획의원은 오랫동안 진보 정당 운동의 정책 및 교육 활동에 참여해왔으며, 자본주의 위기에 맞선 진보적 사회과학을 재구성하고자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에서 연구 및 출간 사업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레프트 사이드 스토리 : 세계의 좌파는 세상을 어떻게 바꾸고 있나>, <사회주의>, <장석준의 적록 서재>, <신자유주의의 탄생 : 왜 우리는 신자유주의를 막을 수 없었나>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국가 대 시장 : 지구 경제의 출현>, <안토니오 그람시 : 옥중수고 이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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