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인간'들, '호모 소비에티쿠스'는 살아있다.

[최재천의 책갈피] <붉은 인간의 최후>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글, 김하은 번역

"악이 세상을 지배하게 된 것에 대한 첫 번째 책임은/ 악의 눈먼 수행자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악을 정신적으로 방관한 선의 추종자들에게 있다." (표도르 스테푼, <일어난 일과 일어나지 못한 일들>)

소련은 붕괴됐다. 하지만 '붉은 인간'들, '호모 소비에티쿠스(Homo Sovieticus)'는 살아있다.

"공산주의에는 '오래된 사람', 즉 태초부터 살아온 아담을 개조하겠다는 터무니없는 포부가 있었다. 그리고 그 포부는 실현된 듯하다. 어쩌면 이것이 공산주의가 유일하게 달성한 성과였으리라…… 지난 70여 년의 세월 동안 '마르크스-레닌주의 실험소'는 독특한 인간 유형인 '호모 소비에티쿠스'를 창조했다."

벨라루스의 노벨상 수상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에비치는 '호모 소비에티쿠스'를 잘 안다고 생각한다. 작가가 바로 그들 중 하나이고 그들은 곧 작가의 지인, 친구, 부모님이니까.

작가는 자기만의 독특한 문학 장르를 만들었다. 일명 '목소리 소설 Novels of Voices', 자신은 '소설-코러스'라고 부르는 장르이다.

때로는 논픽션이 픽션을 넘어선다. 소설 같은 삶이 있는가 하면, 소설로도조차 옮길 수 없는 삶이 있다. 인간의 삶이란 그런 것이다. 그런 이들의 목소리가 책갈피마다 재생된다.

"1917년의 혁명 직전 알렉산드로 그린은 이렇게 썼다. '왠지 미래는 자기가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 있기를 그만둔 것 같다.' 100년이 지난 오늘, 미래는 또다시 있어야 할 자리에 없다. 바야흐로 세컨드핸드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그렇다. 이것은 '고물의 시대'다. '중고의 시대'다.

"그들은 우리에게 새로운 게임의 법칙을 말해주었소. 돈이 있으면 인간이고,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법칙을."

"문제는 옐친이나 푸틴에게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노예라는 게 문제예요. 노예 근성! 노예의 피! ‘신러시아인’들을 한번 보세요. '벤틀리'에서 내리고 주머니에서는 돈이 우수수 떨어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노예예요. 위에 앉아 있는 두목이 '모두 마구간으로 들어가!' 하면 모두 쪼르르 들어갈 거예요."

작가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 전인 2011년, <체르노빌의 목소리>라는 책이 번역됐다. 당시 주간지에 서평을 연재하고 있었는데 그 책을 선택했었다. 고마운 인연이 되었다.

사람마다의 인생사는 소설이 된다. 이런 삶들이야말로 예술이다. 이런 예술들이 모여 역사가 된다.

▲<붉은 인간의 최후>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글, 김하은 번역 ⓒ이야기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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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

예나 지금이나 독서인을 자처하는 전직 정치인, 현직 변호사(법무법인 헤리티지 대표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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