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 당원' 입김보다 '당의 허리' 근력 강화를…

[기고] 국회의원·대의원이 당 대표 선출하는 제도의 장점

정당의 대표는 누가, 어떻게 선출하면 좋을까? 당원들이 투표로 선출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당연하다는 듯 되묻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반응에는 국가든 정당이든 시민들로 구성된 공동체라면 민주적 의사결정의 원리를 따라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한 나라의 주인은 국민이니 그 나라 대표는 국민이 뽑고, 정당의 주인은 당원이니 당의 대표는 당원이 뽑아야 한다는 것이다.

정당 내에서도 여야를 막론하고 이런 생각에 찬성하는 목소리를 쉽게 들을 수 있다. 민주당의 어느 의원은 헌법 제1조 2항을 원용하며 "민주당의 당권은 당원에게 있고, 모든 당권은 당원으로부터 나온다"고 말했다. 국민의힘 의원 또한 이에 뒤질세라 같은 뜻을 이렇게 구호화해서 말했다. "국민에게 주권을, 당원에게 당권을!"

국민에게 주권을! 당원에게 당권을?

'국민-주권, 당원-당권' 비유는 단순하고 이해하기 쉬운 답이다. 하지만 이런 경우일수록 틀릴 때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실제로 국가와 정당은 성격이 전혀 다른 조직체다. 무엇보다 양자의 목적이 서로 다르고, 그런 만큼 조직 운영원리도, 대표 선출 방법도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국가의 목적은 국민의 자유와 평등, 안녕과 행복 증진에 있다. 따라서 그와 같은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어떤 정책이 더 나은지, 어떤 정당·정치인이 더 유능한지를 국민이 가늠하고 판단해 국가의 대표를 선출해야 한다. 적어도 민주주의라면 그래야 하고, 실제로도 그렇다.

그렇다면 정당의 목적은 무엇일까? 당원들의 자유와 평등, 안녕과 행복? 그런 목적을 가진 정당도 인정하는 것이 자유민주주의지만, 자기 목적을 그렇게 정의하고 내세우는 정당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그럼 다시 정당의 목적은 무엇일까? 한마디로 답하자면 선거 승리이다. 물론 당의 목적이 국민(좀 더 정확히는 당원을 포함한 지지자와 부동층)의 의견과 요구, 이익과 열정을 좀 더 잘 수렴해 그에 부응하는 정책을 마련하고 효과적인 집행을 돕는 데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목적 또한 선거 승리와 긴밀히 관련될 뿐 아니라 선거에서 승리해야만 제대로 실현할 수 있기에 결국 정당의 목적, 존재 이유는 선거 승리로 수렴된다.

정당의 목적이 이렇다면, 당 대표는 누가, 어떻게 선출해야 그 목적인 선거 승리에 좀 더 큰 도움을 줄까?

당의 대표는 당 내부적으로는 조직과 자금, 정책을 관장하고, 당 외적으로는 시민-유권자, 상대 정당, 정부와의 관계를 지휘하는 당의 최고 리더이자 책임자다. 이렇게 중요한 당직자의 선출 방식을 결정할 때는 적어도 다음 세 가지 요건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선거 승리를 위한 대표 선출 방식의 요건

첫 번째는 당에 대한 기여도다. 당 대표 선출은 당의 운영 방향과 전략 설정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정치적 권리다. 그렇다면 이 권리는 당 차원에서 이뤄지는 여러 활동과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후원한 사람들에게 주어져야 한다. 그래야만 그들로부터 당에 대한 신뢰와 애정을 기대할 수 있고, 그래야만 그들로부터 계속 당을 위한 헌신을 끌어낼 수 있다.

정당 또한 하나의 조직이므로 기여와 보상의 합리적 체계를 갖추지 못하면 효과적으로 작동하기 어렵다. 재주는 곰이 부리는데, 돈은 왕서방이 챙기는 건 정당에서도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다.

두 번째는 대표 자질에 대한 판단력이다. 정치 지도자에게는 여러 자질이 요구된다. 한 세기 전 막스 베버가 말한 열정, 균형감각, 책임감은 지금도 여전히 중요하다. 이것 말고도 사람의 마음을 읽는 예민함이나 말로 사람들을 설득하고 감화하고 움직이는 언변 같은 것이 있으면 더욱 좋다.

여기에 더해 한 정당을 이끌겠다는 대표라면, 수십만 당원과 함께 지역․직능별로 분업화된 거대 조직을 관리할 줄 아는 능력, 당의 정체성과 비전을 토대로 이슈 제기와 논쟁을 지휘하며 갈등과 타협으로 정책적 성과를 쌓는 수완이 필요하다.

이런 자질․능력․수완이 누구에게 얼마만큼 있는지 누가 더 잘 판단할 수 있을까? 미디어를 통해 정보를 얻는 사람들보다는 직접 후보들과 함께 일해보거나 서로 알고 지내며 대화를 나누고 이견을 조율해본 사람들이 더 잘할 것이다.

마지막은 당의 응집력이다. 적전 분열은 필패라고 했다. 선거 경쟁도 마찬가지라 상대 당과 맞서 싸우는 우리 당이 내부 이견과 대립으로 분열할수록 승리를 쟁취하기는 어렵다. 이념이나 노선이 마음에 들더라도 내부에서 서로 다투며 다른 말을 내놓는 정당에게 나라 일을 믿고 맡기려는 시민들은 많지 않다.

물론 어떤 정당이든 이견이 없을 수 없고 파벌도 존재하기 마련이다. 이런 갈등 요인은 당 대표같이 중요한 당직을 뽑는 선거에서 더욱 크게 증폭되기 쉽다. 따라서 더 중요한 본 선거 승리를 위해 대표 선출에서는 가급적 경쟁의 강도를 줄이고 각 후보와 그를 지지하는 그룹 간의 타협과 연대를 장려해 당의 단합·단결을 도모하는 방법을 찾는 것도 중요하다.

이런 요건을 염두에 두면서 다른 나라 정당들의 대표 선출 방식을 살펴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생각보다 많은 종류의 대표 선출 방식이 있고 각 정당이 특정한 방식을 선택한 데는 그 나름의 이유와 근거가 있기 때문이다.

정당의 대표 선출 방식은 대개 선출자의 자격과 규모, 피선출자인 후보의 자격요건, 선출을 위한 투표 방법 등을 기준으로 나눠볼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그런 기준과 수많은 사례를 다 다룰 수는 없으므로 대표 선출 방식 분류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인정받는 선출자 규모를 중심으로 몇 가지 대표 사례들만 간략히 살펴보겠다.

▲국민의힘 서병수 제4차 전당대회 선거관리위원장이 3일 오후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임명장을 받은 뒤 첫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연합뉴스

당 대표 선출제도의 종류와 사례

첫 번째는 당내 지도자 1인에 의한 선출이다. 당혹스럽겠지만, 권위주의나 전체주의 국가의 집권당이 아니라도 이런 사례들이 있다. 한 개인이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알리고 지지를 모으기 위해 당을 만들었을 때나 그런 개인의 당내 영향력이 압도적일 때 나타나는 일이다. 북아일랜드에서 이언 페이즐리 목사가 창당한 민주통일당, 이탈리아 실비오 베를루스코니가 결성한 전진이탈리아당이 이렇게 대표를 선출했다.

이와 반대로 여러 파벌로 나뉜 정당에서 대표직을 둘러싼 당내 다툼을 피하기 위해, 퇴임하는 당 대표가 후임자를 지명한 경우도 있는데, 일본의 자유민주당은 두 차례에 걸쳐 그런 결정을 수용했다.

두 번째는 당내 엘리트 그룹에 의한 선출이다. 이 방식에서는 공식적인 투표로 대표를 선출할 수도 있지만, 대개는 비공식 논의를 통해 합의-추대 형식으로 당 대표를 결정한다. 대중 정치가 자리 잡기 전에 만들어진 정당이나 당내 엘리트의 영향력이 강한 정당에서 채택한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겠는데, 영국 보수당이 1963년까지 이렇게 대표를 선출했다.

세 번째는 원내 정당, 즉 의회 의원들에 의한 선출이다. 이것은 영국 제도의 영향을 많이 받은 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방식인데, 영국 노동당은 창당 이래 1981년까지, 보수당은 1965~97년까지, 호주, 뉴질랜드, 아일랜드의 주요 정당들은 여전히 이렇게 대표를 뽑고 있다.

이를 두고 또 다른 의원 특권을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이런 선출 방식에도 이점은 있다. 우선 의회 다수파 정당(들)이 정부를 구성하는 의회중심제의 당 대표에게는 자당 소속 의원들을 지휘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기에 그들의 지지에 집중하는 선출 방식이 안정적인 정부 운용에 순기능을 발휘한다.

또한 원내 의원들은 그들의 경험과 직위로 인해 당 대표 후보들의 정치적 자질뿐 아니라 선거 승리에 대한 전망까지 두루 살필 수 있다.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의원들이 대표를 선출하는 것은 당내 선거 경쟁에 따른 갈등과 대립을 적절히 관리하는 데에도 도움을 준다.

네 번째는 선거인단 방식이다. 여기에는 원내 의원들에 더해 원외 당직자들이 당 대표 선거인단 자격으로 전당대회에 참가해 대표를 선출하는 방법과 당원들이 대표 선거인단(대의원)을 뽑고 이 대의원들이 대표를 선출하는 방법이 있다. 전자는 정당이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기 유럽 대륙에서 흔히 볼 수 있었고, 후자는 캐나다의 주요 정당들에서 활용되었다.

선거인단 구성 방식이 다르다 보니 정당별 선거인단 규모의 편차도 큰데, 보통 독일 사민당은 500명, 스페인 사회당은 1000명, 캐나다 자유당은 5000명 정도가 모여 대표를 선출했다. 영국 노동당도 1980년대에 이와 같은 방식을 활용했는데, 원내 정당과 원외 지구당 외에 당외 연대기구로 노동조합까지 포함해 각 집단에 3:3:4의 비율로 대의원을 할당한 것이 이채롭다.

선거인단 선출 방식의 장점은 당의 골간을 이루는 활동가들에게 힘과 권위를 실어주는 데 있으며, 지역이나 사회인구학적 대표성을 고려한 선거인단 구성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논란 속의 당 대표 선출 방식

다음으로 소개할 두 가지 방식은 현재 진행형이며, 정치권과 학계에 걸쳐 적지 않은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음을 염두에 두고 보면 좋겠다.

다섯 번째는 일반 당원들에 의한 선출이다. 1990년대 이후 영국, 프랑스, 캐나다, 벨기에, 덴마크 등지의 많은 정당들이 이 방식을 채택했고 최근에는 독일 사민당과 기민당도 이 대열에 합류했다(사민당은 1993년에도 당원 투표로 대표를 선출한 바 있다).

이런 제도 변화의 원인에 대해서는 두 가지 주장이 경합을 벌이고 있다. 하나는 1990년대 이후 정당의 조직적 위상과 대중적 신뢰가 약화된 조건에서 당내 민주화 요구와 당원 모집의 필요가 더해져 나타난 결과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당 지도부가 비주류 의원과 활동가 집단을 우회해 당원 지지를 통해 당에 대한 장악력을 높이는 방편으로 당원 투표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이렇듯 제도 변화를 보는 관점이 서로 다른 만큼 그 효과에 대한 해석 또한 서로 다르다. 한편에서는 당원 투표로 당과 그 대표에 대한 지지와 관심을 모아 선거 승리에 기여할 수 있고 당원 가입 독려를 통해 새로운 활동가 발굴과 당비 증대도 기대할 수 있다고 말한다.

다른 편에서는 일반 혹은 신입 당원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것이 오랫동안 당에 헌신해 온 활동가들과 당내 역할이 큰 의원들 목소리를 희석하며 당의 선택에 참견만 하고 책임지지 않는 당원들을 낳을 수 있다고 한다. 또한 수십만에 달하는 당원들을 상대로 하는 선거 경쟁은 과열되기 쉬워 당의 분열과 대립을 더욱 심화시킬 수 있다는 문제도 지적한다.

이런 단점들을 고려한 탓인지 영국 노동당은 대표 선거에 나설 후보 자격요건에 원내 의원 20% 지지를 명시해 두었고(2017년에 10%로 줄었다), 보수당은 대표 후보가 3인 이상일 경우 의원 투표로 최종 2인만 선정해 당원들이 투표하는 본선에 오르도록 했다.

마지막으로 당원 투표에서 한발 더 나아가 당원 여부와 관계없이 시민-유권자면 누구든 참여할 수 있는 방식도 있다. 대통령제에서 대통령(후보)을 사실상의 당 지도자라고 보면, 미국은 1970년대부터 개방형 예비선거(open primary)를 통해 대선 후보를 선출하고 있다.

의회중심제에서 이렇게 대표를 뽑는 경우는 극히 드문데, 이탈리아 민주당이 2007년 처음으로 이 방식을 채택해 발테르 벨트로니 로마시장을 당 대표로 선출했다. 이 선거에서 민주당은 18세 이상 시민과 3년 이상 거주한 이민자에게 투표권을 부여했고 35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여했다고 한다.

이 선출 방식은 앞서 언급한 당원 투표의 부정적 효과를 더욱 심화시키는 문제를 안고 있다. 게다가 당내 엘리트를 견제하겠다는 정당 민주화 원리가 이렇게까지 극단으로 나아가 당의 경계를 무너뜨릴 경우에는 조직으로서 당의 '정당성(partyness)'과 함께 '정당성(legitimacy)'까지 훼손될 가능성이 높다.

한국 정당의 대표 선출 규정 변화와 효과

한국의 주요 정당들 역시 다른 나라들 추세와 유사하게 당 대표 선출에서 대의원 비율을 줄이거나 없애는 대신 당원과 국민 참여를 늘리는 방식을 채택해 왔다.

국민의힘 계열 정당은 2003년 처음으로 기존 대의원제를 폐지하고 당원 50%, 국민선거인단 50%로 대표를 뽑았다. 이후 몇 차례 당규 변경을 거쳐 2011년부터 2021년까지 선거인단(전당대회 대의원, 책임당원 선거인, 일반당원 선거인) 70%, 국민 여론 30%를 유지해오다 가장 최근인 2023년에는 당원 투표로 대표를 선출했다.

민주당 계열 정당 또한 변화는 다소 늦었으나 흐름은 마찬가지였다. 2010년 들어 그전까지 당 대표를 선출하던 대의원을 70% 비율로 줄이고 나머지 30%를 당원 여론으로 채웠다. 이후 몇 차례 규정을 바꾼 다음 2018년부터 대의원 45%, 권리당원 40%, 당원 여론 5%, 국민 여론 10%를 유지하다 가장 최근인 2022년에는 다시 한 번 대의원 비율을 줄이고 국민 여론을 늘려 대의원 30%, 권리당원 40%, 당원 여론 5%, 국민 여론 25% 비율로 대표를 선출했다.

이런 제도 변화는 한국 정당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을까? 권리·책임 당원제와 함께 당의 대표뿐 아니라 여러 후보 선출에서까지 당원 권한을 강화한 것은 분명 양당의 당원 수를 크게 늘리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월 1천 원 수준의 당비로 가입하는 당원 증가로는 당 재정에 큰 보탬이 되지 못했고, 따라서 한국 정당의 문제로 지적받는 당 재정의 국가 의존도를 낮출 수도 없었다. 또한 당원 증가로 당의 조직적 역량이 강화되었다거나 당에 대한 시민의 신뢰가 나아졌다는 징후를 발견하기도 어렵다. 오히려 일반 당원과 국민 여론이 대표 선출을 좌우하게 되자 앞서 다른 나라 사례에서 우려했던 부정적 효과가 한국에서도 어김없이 나타났다.

당원-국민 참여가 당내 분란을 증폭시킨 대표적인 예는 2021년 6월 국민의힘의 당 대표 경선이었다. 이 선거에서 이준석 후보는 당원을 포함한 당내 선거인단 투표에서는 나경원 후보에 3% 뒤졌으나 국민 여론조사에서 58%를 얻어 대표에 당선되었다.

이준석 대표는 국민 여론, 특히 청년 남성을 효과적으로 동원한 덕에 30대의 나이로 역대 최연소 당 대표가 되었으나 이후 줄곧 당내 주류 그리고 대통령(후보) 측과 갈등을 빚다가 결국 1년 만에 분명하면서도 석연치 않은 이유로 당원권을 정지당하며 대표직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민주당에서는 당 대표와 각급 후보 선출을 위해 입당한 당원들의 분열적이고 무책임한 행태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른바 '개딸'로 불리는 이재명 대표 지지 당원들은 대표를 비판하거나 대표와 다른 의견을 표명하는 의원들을 상대로 거친 표현과 무례한 집단행동을 일삼음으로써 당내 반발과 일부 의원들의 탈당을 부추겼다. 게다가 최근에는 국회의장 후보 선출에서 자신들이 바라는 의원이 떨어지자 다시 한 번 다른 후보를 선택한 의원들을 성토하며 대규모 탈당으로 압력을 행사하는 행태를 보였다.

더 중요한 변화도 있다. 대표 선출에서 당원·국민 참여는 개인주의로 대표되는 사회적 가치 변화, SNS로 대표되는 매체 발전과 맞물려 정당과 정치 활동의 문법을 크게 바꿔놓았다.

과거 대의원제를 통한 대표 선출 방식에서는 대의원 선정이 지구당위원장의 영향력 하에 있었고 그 지구당위원장은 파벌 보스의 영향력 하에 있었다. 이런 전통적 위계를 깨뜨리고 당내 민주주의를 강화한다는 명분하에 도입된 것이 당원 투표다.

하지만 그런 대체 과정에서 당의 허리 역할을 하던 중간 보스, 지구당위원장을 비롯한 당직자와 당 활동가들의 지위와 역할이 유명무실해졌고 그와 함께 당내 지역·직능별 기구의 수직·수평적 협력 체계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남은 것은 당 안팎에서 당원과 지지자를 동원하며 참견하고 간섭하되 책임지지 않는 정치 인플루언서들, 당의 리더와 당원-지지자 사이에 형성된 강력한 정서적 일체감, 그리고 그에 바탕해 이따금씩 주요 쟁점 이슈에 대해 당원 의사를 묻는 일종의 '국민투표제적(plebiscitary)' 당 운영 방식뿐이다.

우리 정치를 이끄는 의원들의 행태도 뚜렷하게 변했다. 정치권에서 주목받는 다수의 의원들은 이제 더 이상 당직자들이나 동료 의원들과 성실히 협력하고 이견을 조율하며 입법 실적을 쌓는 데 주력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언론이 제기하는 이슈에 홀로 발 빠르게 대응해 입장을 밝히고 관련 법안을 발의하고 그 내용을 다시 홍보한 다음 또 다른 이슈를 찾아 같은 활동을 반복하기 바쁘다. 상대 정당·정치인에 대해서도 가능한 한 자극적인 언술로 공격해 여론을 흥분시키고 언론의 이목을 끄는 데만 열중한다.

물론 정치인에게는 말과 글로 하는 주장과 설득, 각종 언론매체의 적극적 활용 또한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부침을 거듭하는 이슈에 즉자적으로 반응하고 상대방의 존재 이유 자체를 부정하려는 태도로는 넓은 지지도 깊은 신뢰도 얻을 수 없다. 협력은 어렵고 대결은 쉽다. 멀리 보며 함께 가기는 어렵고 앞만 보며 혼자 가기는 쉽다. 지금 정치인들은 당원과 시민 여론을 여과 없이 수용하는 제도 덕분에 그 쉬운 방법으로 당 대표에도 오르고 대통령 후보에도 오르고자 한다.

국민의힘 대표 선출 규정에 대한 조언

국민의힘이 당 대표 선출 규정을 손보겠다고 한다. 쟁점은 기존 당원 투표에 더해 국민 여론을 넣을지 말지, 넣는다면 어느 정도 비율로 할 것인지라고 알려져 있다. 예비후보들도 여론조사에서 드러난 당 안팎의 지지율에 따라 서로 다른 입장을 밝히고 있다.

국민 여론을 포함시켜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는 당내 강성 당원들이 선호하는 후보나 그 후보의 정견으로는 당 밖 중도층을 아우르기 어렵고 따라서 선거에서도 승리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선거 승리를 목적으로 하는 정당에게는 나름 일리 있는 주장이다. 하지만 강성 당원의 견해를 순화하고 당 밖 여론을 수렴하는 데에는 다른 방법도 있다. 국회의원과 지방의원 등의 선출직 대표들에게 더 많은 권한을 부여하는 것이 그 방법이다.

대표 선출에서 활용하는 여론조사는 조사 당시의 일시적 분위기를 반영할 가능성이 높다. 또한 이런 방식의 조사에서는 여론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집단과 사람들, 곧 주요 언론매체와 여론 동원에 뛰어난 정치인과 인플루언서들의 선호가 반영될 가능성이 높다.

생각해 보라. 정당정치 사정에 밝지 않은 사람들에게 어느 날 갑자기 당 대표 선거를 위한 여론조사를 하겠다면서 지지 후보를 물으면 누구를 답하겠는가? 국민 여론으로부터 기대하는 바가 있다면, 당 안팎의 사정을 잘 알고 시민 의견을 수렴할 위치에 있으며 이미 몇 차례 선거를 경험했을 뿐 아니라 선거 승패에 사활을 걸 수밖에 없는 선출직 의원들에게 맡기는 편이 더 낫다.

당원 투표에 대해서도 재고해 주기를 바란다. 흔히 정치 혁신은 선거에서 패한 정당으로부터 나온다고 한다. 승리한 정당은 어쨌든 선거에서 승리했기에 기존 운영 방식과 정책 입장을 바꿀 유인이 적다. 반면 패한 정당은 지난 선거를 복기하며 패배의 원인을 찾고 그 문제를 개선하지 않으면 같은 패배를 반복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지난 총선에서 국민의힘이 패한 가장 큰 원인은 대통령의 국정운영 방향과 방식, 좀 더 정확히는 그 방향과 방식에 당의 의견이 전달되고 실현되지 않았다는 데에 있다. 또 하나, 잘 언급되지 않는 원인은 박근혜 대통령 탄핵 이후 분당과 합당의 소란 속에 당 조직, 특히 지역 조직이 크게 망가졌다는 것이다. 특히 후자의 문제는 현역 의원에게 유리한 정치관계법 조항들로 인해 지지난 총선에서 패했던 지역에서 뛰는 국민의힘 후보들에게 더욱 뼈아프게 느껴졌을 것으로 보인다.

대통령실과 행정 각부의 지원을 받는 대통령에게 영향을 미치려면 당의 머리와 허리가 강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지지자와 중도층의 여론을 수렴할 뿐 아니라 선도하며 그 뜻을 대통령과 집행부에 전달해 관철하기 위해서는 당의 조직·정책적 역량이 강화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가뜩이나 정치 경험이 없는 데다 정당보다 캠프를 통해 대통령에 오른 검찰 출신 정치인이 주요 사안마다 당의 의견을 수렴하고 조율하며 정부 정책을 집행하리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또한 지역에서 이뤄지는 선거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도 지역 사정을 잘 알고 지역 주민과 오랜 유대를 가진 당 간부와 활동가들이 당에 헌신할 수 있는 유인을 제공해야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당 대표 선거에서도 당원보다는 당원이 뽑는 대의원, 곧 당직자와 활동가들에게 그 선출 권한을 맡기는 방안이 더 좋다고 생각한다. 그래야만 중앙에서나 지역에서나 당 조직이 좀 더 강화되고, 대통령에게도 당의 의견이 좀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이 외에도 선출직 의원과 대의원이 대표를 선출하는 방식에는 당내 선거의 분열 증폭 효과를 줄이는 방안을 활용하기 쉽다는 장점이 있다. 당내 분열의 파괴적 효과를 고려하면, 당 대표는 가급적 합의 추대나 절대 다수 또는 50% 이상의 가중 다수결로 선출하는 것이 좋다.

후자의 경우라면 수일에 걸쳐 여러 차례의 투표가 요구될 수 있는데,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대의원 선거인단에게는 수용 가능한 일이다. 또한 이런 선출 방식에서는 선거 경쟁이 지나친 갈등과 대립을 초래할 경우 후보 간 이견뿐 아니라 당직·공직 배분을 조율·조정하는 타협안을 마련해 성사시키기도 쉽다.

여기에 더해 각급 의원과 대의원이 중심이 되는 전당대회는 후보들 연설만 듣고 박수치고 환호하고 대표를 뽑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당의 주요 사안을 두고 그룹별로 토론과 숙의를 벌이는 당내 공론 형성의 장으로도 활용할 수 있다. 이 모든 활동이 당의 화합과 단결, 역량과 위상 강화에 이롭지 않기는 어렵다.

정당은 민주주의를 위한 수단

선출직 의원과 대의원 중심의 당 대표 선출제도만으로 큰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예전 제도의 폐해가 재발할 수도 있고 의도와 다른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 나타날 수도 있다. 게다가 정당을 강화하는 데는 이것 말고도 고쳐야 할 제도들이 무척이나 많다.

지역 단위의 정당 활동을 사실상 금지해 놓은 지구당 폐지도 그렇고, 정상적인 당 조직 운영이 어려울 만큼 상근자 규모를 제한한 조항도 마찬가지다. 그 외에도 세계에서 유래를 찾기 힘든 단체의 정치자금 기부 금지, 전 세계에서 가장 짧은 공식 선거운동 기간 등 반부패를 명목으로 도입된 각종 규제조항들은 정당 활동과 선거 운동의 자유를 여전히 크게 가로막고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정당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다. 정당은 왜 필요한가? 정당은 한 나라, 한 지역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어 보겠다는 야심과 비전을 가진 사람들의 조직체이다.

그렇게 결성된 복수의 정당이 더 많은 유권자의 지지를 얻기 위해 경쟁하는 것은 시민들 사이에 서로 다른 의견의 자유로운 표출을 보장하고 시민들이 정부 정책의 결과에 대해 책임을 물을 수 있게 해준다. 이견의 보장과 통치 책임의 부과에서 이보다 더 나은 대안은 없다. 달리 말해, 정당은 민주주의를 운용하는 데 가장 중요하고 효과적인 수단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정당 간 경쟁이 만족스러운 결과를 낳지 못했다면, 정당 자체를 무시하거나 부정할 것이 아니라 정당이 어떻게 조직되고 어떻게 경쟁해야 사회적으로 유의미한 결과를 가져오는지, 이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기를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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