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밀러 감독이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를 제작해야만 했던 이유

[무비 언박싱] 우리는 어떻게 잔혹함에 맞설 것인가?

2015년,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이하 <분노의 도로>)가 개봉한지 9년 만에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이하 <퓨리오사>)가 개봉한다. 서사의 흐름상 작품 공개 순서가 서로 바뀌었고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지만 처음부터 두 작품은 자웅동체처럼 함께 기획되었다. <분노의 도로> 시나리오가 집필되는 15년 동안 조지 밀러 감독은 퓨리오사를 더욱 생명력 있는 캐릭터로 만들었다. 그리고 한편의 작품으로 그녀의 서사까지 모두 담아낼 수 없다고 판단하여 결국 별도의 작품을 제작하기로 결심했다.

<분노의 도로> 제작을 맡았던 워너브러더스는 최초 감독의 기획에 동의하여 두 편의 동시 제작에 합의하였지만, 여러 이유로 <퓨리오사> 제작을 철회했고 감독은 이에 항의하여 법정 소송을 이어갔다. 그 결과 지난한 다툼 끝에 2020년 캐스팅을 시작하여 4년 만에 <퓨리오사>를 완성했다. 제작 과정만 놓고 보면 감독이 얼마나 <퓨리오사> 제작에 진심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그 진심의 뿌리는 퓨리오사 캐릭터에 있다. <퓨리오사>의 원제목이 <매드맥스: 퓨리오사> 였음을 상기해 본다면, 감독은 전적으로 '매드맥스'의 세계를 맥스에서 퓨리오사로 바꿔내고 싶었던 것 같다. 미칠 수밖에 없었던 맥스의 세계에서 이젠 희망과 새로운 혁명이 가능한 퓨리오사의 세계를 주장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이는 제목에 '사가 saga'를 사용한 것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고대 노르웨이어로 '이야기'란 뜻을 담고 있는 사가는 구전되어 온 북유럽의 신화 및 전설을 뜻하는 말로 한 인물의 전기, 또는 그 가문의 이야기를 주로 다룬다. 그리스 로마의 서사시(Epic)가 신이 지배하는 세계 속에서 고초를 겪는 인간의 모험을 신화적으로 다룬다면, saga는 좀 더 인간 중심적인 서사 속에서 가문의 가보와 대를 이어가는 과정에 초점을 맞춘다. 감독이 '매드맥스'에서 '퓨리오사'로 중심 제목을 바꾸고 이것은 서사시가 아닌 사가임을 명시한 것은 맥스의 세계에서 퓨리오사의 세계로 이어지는 일종의 계보를 만들어 내기 위함이다. 돌이켜보면 그 계보는 이미 <분노의 도로>에서 일정 부분 완성되었다. <분노의 도로>는 맥스의 서사이며 동시에 퓨리오사의 서사다. 이 작품을 통해 퓨리오사라는 강인한 여성 영웅이 지닌 가치를 전 세계에 전달했지만, 감독은 이것 만으로 충분하지 않았던 것 같다. 다시 퓨리오사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 그녀를 통해 발견한 가치들, 하지만 세계가 외면하고 인정하지 않았던 가치들에 보다 분명한 정당성을 부여해야만 했다.

▲시타델에서 성장한 모습의 퓨리오사. ⓒ워너브라더스코리아

조지 밀러 감독은 1979년부터 6년간 이어온 <매드맥스> 삼부작을 통해서 석유를 둘러싼 전쟁과 환경오염이 인류를 멸망에 이르게 할 것이라 이미 경고한바 있다. 하지만 마지막 <매드맥스 : 썬더돔>(1985)이 발표된 이후 전 세계는 이러한 경고음 들을 외면했다. 그리고 임계점을 넘기며 극심한 기후 위기의 재난과 전염병 팬데믹을 맞이했다. 이러한 사태를 감독은 예견했던 것일까? 2015년에 공개된 맥스의 상태는 이미 정신 분열적 수준에 다다라 있었다. 자신이 구하지 못한 희생자들의 환영에 끊임없이 시달리며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는 수준이었다. 초기 삼부작에서 그는 영웅이었고 구원자이자 신화의 현현이었다. 그랬던 맥스조차 미치지 않을 수 없는 세상이란 과연 어느 정도의 최악이어야 하는가? 조지 밀러 감독은 지구가 보내는 위험신호를 읽지 않고 자본의 탐욕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인류에게 맥스의 상태를 들이대며 더 극단적인 상황을 미리 경고한 셈이다.

이미 <매드맥스> 삼부작을 통해서 학습된 조지 밀러 감독은 분명 <분노의 도로>가 관객에게 어떻게 비칠지 충분히 이해했던 것 같다. 그래서 맥스에서 퓨리오사로 이행되는 서사의 흐름만으로는 절대 경고신호를 해석하지 못할 것으로 판단하고 반드시 퓨리오사의 사가가 필요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분노의 도로>와 <퓨리오사>는 사뭇 다른 태도로 서사를 전개한다. <분노의 도로>는 속도감이 핵심이었다. 풍요의 땅으로 향하는 트럭을 절대 멈출 수 없는 한계 상황이 극적 긴장감을 만들어 내 관객의 몰입도를 높였다. 영화적 몰입은 현실에서 벗어나게 만든다는 특징을 지니기에 여러 학자들은 이를 비판적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조지 밀러 감독은 그 몰입을 통해 디스토피아 세계를 실재적 체험에 이르게 만들고 관객에게 미래에 대한 공포심을 심어 놓는다. 이는 전적으로 자본의 이데올로기에 심취한 관객들을 각성 상태에 이르게 하기 위한 시도였다.

반면 <퓨리오사>는 5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분노의 도로>와 같은 일방적인 몰입과 거리를 둔다. 오히려 호흡을 가다듬으며 퓨리오사의 성장과 그녀의 선택,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행동을 진지하게 관찰한다. 5개의 장 구성은 전적으로 사가의 형식을 따른 결과다. 사가는 한 인물의 영웅적 행동에 집중하기보다는 그의 환경, 가문, 업적들을 객관적으로 나열하여 일방적인 신화화를 거부한다. 판타지적 요소가 개입한다고 하더라도 그리스 신화처럼 전적으로 신의 지배하에 놓인 세계도 아니다. 철저히 인간 중심의, 인간 스스로 개척해 내는 세계의 모험담이다. <퓨리오사>는 이러한 사가의 전통을 받아들여 퓨리오사가 <분노의 도로>에서와 같은 선택을 하게 된 원인과 배경을 차분하게 전달한다. 자신을 납치하고 어머니를 희생시킨 디멘투스를 향한 복수심, 그리고 어머니의 땅인 풍요의 땅으로 반드시 돌아갈 것이라는 희망. 이 두 가지 열망이 어떻게 심어지고 싹을 틔워내는지, 그래서 <분노의 도로>와 같은 결론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지 그 원류를 침착하게 살핀다.

▲디멘투스와 일당들. ⓒ워너브라더스코리아

이를 위해서 <퓨리오사>는 흥미로운 질문으로부터 서사를 시작한다. 오프닝 시퀀스는 <분노의 도로>와 마찬가지로 인류의 멸망 과정을 짧은 몽타주로 전개되고 마지막 순간 역사가의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무너지는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잔혹함에 맞설 것인가?"(자막은 다음과 같이 번역되어 있다. "무너지는 세상에서 우린 무엇으로 맞서야 하나?") 질문에서 제시된 잔혹함을 <퓨리오사>는 아직 보여주지 않았지만 이미 관객인 우리는 마치 미래를 볼 수 있는 예언자처럼 <분노의 도로>를 통해 경험한 상태다. 그러니 이 질문은 관객인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인 셈이다. 그 순간 현존하는 전 세계의 잔혹함은 나의 실존적 문제가 되며 내면에서 다시금 질문하게 된다. 과연 나는 현시대에 만연하는 잔혹함에 맞설 수 있을까?

돌이켜 보면 이러한 중심 질문은 <분노의 도로>에서도 제시되었다. 영화가 종결된 이후 어두운 화면에 떠오른 자막엔 다음과 같은 질문이 기록된다. "희망 없는 땅을 떠도는 우리가 더 나은 나 자신을 찾기 위해 가야 할 곳은 어디인가?" 희생을 감내하며 시타델을 풍요의 땅으로 되찾은 퓨리오사는 인파 속에서 그곳을 떠나는 맥스를 발견한다. 이미 죄책감을 극복하고 죽은 자들의 환영에서 벗어난 그였지만 그는 어디에도 정착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러니 마지막 순간 기록된 질문은 전적으로 맥스를 향하는 질문이며 그를 지켜본 관객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질문이기도 하다. 과연 맥스는 어딘가에 뿌리내릴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그곳은 어디일까?

흥미롭게도 두 작품에서 제시된 질문은 모두 역사가(History Man)의 것이다. (<분노의 도로>에서는 이를 최초의 인류(First History Man)라고 번역했으나 <퓨리오사>에 등장하는 역사가를 만나기 전이었기에 충분히 발생할 수 있는 오역이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생존을 위해 온몸에 역사를 문신으로 기록한 자. 디멘투스가 자기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역사를 이데올로기로 전파할 때 적극 활용되는 자. 외모는 그리스 비극에 등장하는 현자와 같지만, 권력에 기생하기 위해 절대적으로 비굴해지는 자. 하지만 그의 질문은 <매드맥스>의 세계관을 관통하고 현 인류의 비극적 상황을 은유한다. 현재 만연한 잔혹함 속에서 과연 우리는 더 나은 나 자신을 찾을 수 있을까? 찾는다면 어디로 향해야 하는가? 점차 종말을 향해 치닫는 지구 상태를 지켜보자면 이미 그러한 희망은 품기 힘들다는 결론이 나온다. 과거의 역사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멈추지 않는 학살과 전쟁, 약자들을 착취하는 억압의 구조뿐이다. 하지만 이를 지켜만 보고 있을 순 없지 않은가? 마치 퓨리오사처럼 말이다. 어쩌면 여기에 감독이 <퓨리오사>를 만들어야만 했던 당위성이 존재할지도 모른다.

▲로마 전차를 연상시키는 디멘투스의 바이크. ⓒ워너브라더스코리아

<분노의 도로>에서 '첫 번째' 역사가라는 명명은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최후의 인간(Last Man)과도 대비된다. 후쿠야마는 <역사의 종말>에서 자유민주주의가 역사의 종말 형태를 완성하게 될 것이며 그 순간의 인간은 완성된 형태의 체제 속에서 시대적 변화를 위한 투쟁을 체념한 채 지극히 이기적이고 냉소적인 상태로 패기 없이 살아가게 될 것이라 예언했다. 이는 디멘투스가 이끄는 바이크족의 형태와 유사하다. 디멘투스는 시타델의 임모탄처럼 절대군주로서의 면모를 자랑하지 않는다. 오히려 대중에게 자유와 평등을 선포하며 공유하는 삶을 강조한다. 전적으로 자유민주주의적 가치를 내세우는 디멘투스 집단은 결국 카오스 상태에 빠진다. 쿠데타 상황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디멘투스가 내건 해법은 다른 집단을 점령하고 차지하는 것이다. 정확히 고도화된 자본주의 체제가 진화하는 방식을 답습하고 있는 디멘투스의 선택은 후쿠야마가 낭만적으로 주장했던 역사의 마지막 단계와 충분히 닮았다.

<분노의 도로>에 언급된 첫 번째 역사가는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 이후 새로운 '역사의 시작'을 여는 자이자 종말 이전의 역사를 연결 짓는 자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후쿠야마의 최후의 인간 유형과 사뭇 닮아 있다. 좀 더 넓게는 <매드맥스> 시리즈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간 유형이 최후의 인간 유형과 닮아 있다. <매드맥스> 삼부작을 지탱해 온 맥스조차도 자아 분열해 지극히 자신의 안위만 지키려는 이기적인 인물로 왜곡된다. 그렇다면 퓨리오사가 선보인 이타성은 과연 얼마나 유지될 수 있을까? 만약 시대적 잔혹함에 맞서기 위해 우리가 절대 잃어서는 안 되는 가치가 퓨리오사의 이타성이라면 그러한 이타성을 지키기 위해서 우리는 과연 어디로 향해야 할까? 끝으로 과연 퓨리오사의 이타성은 맥스처럼 미치지 않고 유지할 수 있을까?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우리는 더 이상 영화 속에서 찾을 수 없다. 애초에 관객인 우리에게 던진 질문인 만큼 현실 속에서 우린 끊임없이 답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저물어 가는 시대 속에서 우리가 퓨리오사의 사가를 구전(관람)해야 하는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 ⓒ워너브라더스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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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윤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에서 영화 연출, 시나리오, 영상문화이론을 전공했다. <포도나무를 베어라>(2007), <오이시맨>(2008)의 시나리오를 집필 했으며 CGV아트하우스 큐레이터, 춘천SF영화제 프로그래머를 역임 했다. 2019년부터 4년 간 서울국제프라이드영화제와 함께 ‘한국퀴어영화사’ 연작 시리즈를 책임 편집 했으며 『A Collection of Korean Queer Cinema』(2023)를 집필하여 영문으로 출간했다. 현재 영화 평론, 시나리오, 영화 연출 등 영화와 관련된 다양한 형식의 글쓰기와 창작을 수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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