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 하마스는 왜 이스라엘을 공격했나

[2024 평화통일시민강좌] ① <팔레스타인, 100년 분쟁의 원인 :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 저자 정환빈 작가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은 남북의 화해와 평화통일을 위한 시민들의 모임인 평화통일시민행동(대표 이진호)의 '2024평화통일시민강좌'를 연재합니다.

2024평화통일시민강좌는 일극체제에서 다극체제로 변화하는 세계정세를 깊이있게 들여다 보고 북한의 경제발전 전략과 군사력, 유엔사 부활의 문제점 및 5.18광주 항쟁과 미국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3월 30일부터 11월 30일까지 매월 1회, 서울시청 시민청 혹은 복합문화공간 종로 nuguna에서 진행됩니다.

아래는 지난 3월 30일 '직접 가본 팔레스타인, 100년 분쟁의 원인을 말한다' 주제로 KOICA 팔레스타인 사무소에서 3년간 프로젝트 사업을 담당했고 <팔레스타인, 100년 분쟁의 원인 :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를 집필한 정환빈 작가가 진행한 강연의 주요 내용입니다.

지난 2023년 10월 하마스의 공격 이래로 가자지구에서 반년째 전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우리나라에서는 점차 잊히고 있지만, 팔레스타인 문제는 여전히 세계에서 중요한 화젯거리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누가 옳은가를 두고 치열하게 논박을 벌이고 있고요.

어떤 사람들은 이참에 하마스를 해체해 테러를 종식시키고 이스라엘의 '안보'를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 반면, 어떤 사람들은 민간인 대량학살을 멈춰야 한다는 '인도주의'를 외칩니다.

현지에서 3년을 살고 8년간 역사를 연구한 제가 보기에는 두 가지 관점 모두 부적절합니다. 팔레스타인 분쟁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고, 100년이 넘게 계속되고 있습니다. 작금의 전쟁이 아니라 무엇이 갈등을 지속시키고 있는지 그 근본적인 원인을 바라보아야만 합니다.

▲ 3월 30일 정환빈 작가가 '직접 가본 팔레스타인, 100년 분쟁의 원인을 말한다'를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평화통일시민행동

직접 가본 팔레스타인, 무엇이 가장 신기했을까?

팔레스타인은 우리나라에서 심리적으로 가장 멀리 있는 나라 중 하나입니다. 서안지구에는 베들레헴과 같은 기독교 성지가 많은데도 위험하다는 인식 때문에 팔레스타인 땅을 밟아본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인식은 테러와 같은 흥밋거리만 보도하는 언론의 관행이 빚어낸 그릇된 이미지입니다. 저는 KOICA를 통해 서안지구 라말라에서 살면서 이를 몸소 체감했고, 놀랍도록 안전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얼마나 안전한지 유엔의 통계자료로 확인해 볼까요?

팔레스타인은 국토의 94%를 차지하는 서안지구와 나머지 6%의 가자지구로 분단되어 있습니다. 2012-20년 동안 서안지구의 연평균 분쟁사망률은 10만 명당 1.92명을 기록했습니다. 2011-15년에 우리나라의 교통사고 사망률이 10.0명이니까, 우리나라에서 교통사고로 죽을 확률이 다섯 배 이상 높습니다.

같은 기간 가자지구는 18.87명으로 비교적 높지만, 사망자의 대부분은 수 주 간의 전쟁 동안에만 발생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침공하지 않은 해에는 0.5~1.5명에서 머뭅니다. 팔레스타인으로부터 국가 안보의 심각한 위협을 겪는다는 이스라엘의 분쟁사망률은 심지어 0.24명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마저도 사망자의 대부분은 가자지구를 침략하다 죽은 군인들입니다. 전쟁을 벌이지 않을 때의 사망률은 0.02명 수준으로 떨어지고, 자국 내 교통사고 사망자의 1%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다른 나라의 살인율과 비교하면 어떨까요. 2012-20년 동안 서안지구의 분쟁사망률과 살인율의 합계는 2.78명으로 2012-18년의 북유럽 에스토니아(3.15)나 라트비아(3.48), 그리고 미국(4.90)보다도 훨씬 안전했습니다. 심지어 OECD 국가인 멕시코(21.42)나 콜롬비아(28.61)는 가자지구보다도 위험합니다.

팔레스타인이 안전하다는 사실은 곧 서안과 가자지구 주민들이 특별히 폭력적이지 않고 그저 평범하게 일상을 살아간다는 점을 시사합니다. 실제로 직접 만나 본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주요 관심사는 정치가 아니었습니다. 다들 가족 건강이나 자녀 성적에 관심이 많고, 결혼식이나 축제가 열리면 신나게 놉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건 볼링장에서 사람들이 볼링보다 춤을 열심히 추고 노래 부르는 모습이었습니다.

물론,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이렇게 놀기만 하는 건 아닙니다. 물가는 높은데 일자리가 없어서 경제활동이 치열하고 이른바 '투잡'도 흔합니다. 그러니 누구나 그저 평범한 일상을 살아갈 뿐입니다.

우리의 통념과 달리 무슬림들이 기독교를 존중하는 모습도 굉장히 눈길을 끌었습니다. 100여 년 전만 해도 팔레스타인에서 기독교도 인구는 10%였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피해 미국과 유럽으로 이주해 현재는 1%에 그칩니다.

팔레스타인 정부는 쇠락해 가는 기독교를 보호하고자 기독교 기원을 가진 도시와 마을의 시장(mayor)은 기독교도만 입후보할 수 있도록 법으로 제한합니다. 무슬림 국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주류의 판매와 취사도 자유롭게 허용하고, 라마단 기간에 낮에도 영업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기독교도들은 기독교 명절에도 쉬고 무슬림 명절에도 쉴 수 있는 특혜를 누립니다. 저는 물론이고 한국인 동료 직원들은 역차별이 아니냐고 의문을 품었는데, 정작 무슬림들은 아무런 불평을 하지 않았습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왜 싸울까?

그럼 이토록 평범한 사람들이 어째서 이스라엘에 싸움을 걸고 투쟁할까요. 지금의 이스라엘 땅은 100년 전까지만 해도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수백수천 년간 살아온 고향이었습니다. 그래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땅을 되찾기 위해서 투쟁하는 것으로만 아시는 분들이 꽤 많습니다. 일부는 너무 오래전 일 가지고 계속 싸운다고 비판까지 하고요.

그런데 우리는 일본이 과거에 식민 지배했었다는 이유로 지금까지 무장투쟁을 계속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럼 팔레스타인인들은 '왜' 지금도 싸우는지를 고민해 봐야 하지 않을까요?

▲ 한 팔레스타인 남성이 가자지구 남부 라파 난민촌에 있는 자신의 집 근처에서 이스라엘 공습으로 파괴된 건물 잔해 속을 아이를 안고 걷고 있다. ⓒAFP=연합뉴스

팔레스타인인들이 유대인과 갈등을 겪기 시작한 시점은 18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 무렵에 팔레스타인에는 50만 명의 아랍인과 2만 명의 유럽인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유럽에서 유대인들이 유대 국가를 만들겠다며 이주해 오고 식민촌을 건설합니다. 이를 시온주의 운동이라고 부릅니다.

아랍인들은 식민화에 저항했고, 특히 소작농들이 앞장섰습니다. 아랍 지역에서는 경작자를 땅의 주인으로 보기 때문에 지주가 바뀌어도 소작농을 유지하는 게 관례인데, 시온주의자들은 식민촌을 지을 땅을 사들인 뒤 소작농을 추방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추방당한 소작농 등은 권리를 주장하며 30년간 십여 명의 유대인을 살해합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아랍인은 무력에 호소하지 않았고, 그저 유대인의 이주와 토지 매매를 제한해달라고 정부에 청원하고 언론 투쟁을 벌인 게 전부였습니다. 친이스라엘 사관에서는 무장투쟁이 없었으니 식민화에 찬성한 거라고 주장할 정도입니다.

1917년부터 영국의 강제 점령이 시작되면서 상황이 달라집니다. 영국이 유대 민족의 고향을 건설하기 위해서 팔레스타인을 지배하겠다고 밝히자, 이에 불만을 품은 아랍 주민들이 3차례 소요를 일으켜 100여 명의 유대인을 죽입니다. 그런데도 영국이 끝내 독립을 거부하자 1936-39년에 비로소 무장투쟁을 벌입니다. 식민화가 시작된 지 55년 만이었습니다. 영국은 아랍인의 '반란'을 무참히 진압하고 수천 명을 학살합니다.

70년 간의 식민화 끝에 1948년에 이스라엘이 마침내 탄생합니다. 시온주의자들은 인종청소를 저질러 아랍인을 쫓아냈고 75만 명이 난민이 됩니다. 난민들은 총칼을 들고 맞서 싸웠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국제사회와 아랍 국가들이 정의를 바로잡아주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1967년에 이스라엘이 서안과 가자지구마저 점령하고 국제사회가 이를 묵인하자 비로소 정신을 차립니다. 국제사회는 말로만 난민의 귀환권을 운운할 뿐 이를 집행할 생각이 없었고, 아랍 국가들은 그럴 힘이 없었습니다. 오직 팔레스타인인만이 팔레스타인의 자유와 권리를 되찾을 수 있다는 생각이 널리 공감받고, 무장투쟁에 대한 공감대가 확산합니다. 그러나 100만 명이 넘는 난민 중에서 오직 1만 명만 무기를 들었습니다.

난민들의 무장투쟁은 20년도 채 되지 않아 실패로 끝납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서안과 가자지구에서 거국적 민중봉기가 일어납니다. 이스라엘은 1967년에 점령을 시작한 이래로 서안지구 토지의 55%와 가자지구의 30%를 빼앗고 수자원도 각각 78%와 3분의 1을 약탈했습니다. 농지와 물을 잃은 수많은 농민이 어쩔 수 없이 농사를 포기하고 이스라엘로 넘어가 청소 등의 막노동을 하며 끼니를 때웠습니다.

더군다나, 이스라엘이 산업과 무역을 통제하고 자국의 비싼 상품만 팔레스타인으로 수출했기 때문에 물가는 폭등하고 경제사회가 붕괴됩니다. 설상가상으로, 빼앗긴 토지 곳곳에 지어진 식민촌의 유대인 테러리스트들이 인근 마을의 주민들에게 총구를 겨누며 폭행하고 땅을 계속해서 뺏어갔습니다. 이에 저항하는 주민들은 모조리 감옥으로 끌려가 고문을 당했고요.

결국, 이를 견디다 못한 주민들이 20년 만에 합심하여 목숨을 걸고 투쟁에 나섰습니다. 하마스는 이때 만들어졌고 이스라엘 파괴를 목표로 내걸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주민은 서안과 가자지구의 독립, 그리고 난민이 고향으로 돌아갈 권리만을 요구하며 이스라엘이 평화 협상에 응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협상을 일체 거부하고 시위대를 모조리 잡아다 잔혹하게 고문했습니다. 그간 이스라엘의 식민 지배를 눈감아주던 서구 국가들조차 너무 선을 넘는다며 비판하자 그제야 마지못해 평화 협상에 임합니다. 그렇지만 시위대를 향한 고문은 더욱 강화했습니다.

국내외에서 인권 단체의 비판이 잇따랐고 국제앰네스티는 1998년에 "이스라엘은 지구상에서 고문과 학대가 법으로 허용된 유일한 나라"라고 비판의 목소리를 키웠습니다. 이듬해에 이스라엘은 물리적 고문은 중단했으나 학대와 정신적 고문은 계속 이어가고 있습니다.

마침내 시작된 평화 협상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은 유엔이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1967년 이전의 국경선과 난민의 귀환권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어느 것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협상이 고착화되자 2000년에 미국의 빌 클린턴 대통령이 중재안을 내놓습니다. 서안지구를 3조각으로 분단시키고 요르단강과 사해, 그리고 동예루살렘 등을 제외하는 국경선이었습니다.

팔레스타인 측은 당연히 거부했고, 서구 국가들은 어떻게 이토록 좋은 조건을 거부할 수 있냐며 비판했습니다. 국경선은 그 자체로도 불공정했으나, 팔레스타인 측이 거부한 더욱 근본적인 이유는 이스라엘이 난민의 귀환권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점령지 팔레스타인의 현실

평화 협상이 중단된 지금 이스라엘은 식민 지배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평화 협상 중에 팔레스타인 정부가 설립되고 2012년에는 유엔에서 국가 지위를 인정받았으나, 주권은 크게 제한됩니다. 공항이나 항구를 건설하지 못하고, 군대도 가질 수 없고, 수자원의 대부분을 이스라엘에 넘기고, 무역이나 기술도 통제받고 있습니다.

▲<팔레스타인, 100년 분쟁의 원인: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 정환빈 지음, 인세50 펴냄. ⓒ인세50

일례로, 이스라엘은 2018년에야 3G 서비스 공급을 허가했습니다. 지금도 서안지구 곳곳에 있는 250여 개의 식민촌에서 유대인 테러리스트들이 날뛰며 농작물을 불태우고 주민들을 폭행하고 죽이지만, 팔레스타인은 사법권을 가지지 못합니다.

팔레스타인인들이 이스라엘 인권 단체의 도움을 받아 이스라엘 당국에 기소해도 기소율은 7.3%에 그칠뿐더러 처벌로 이어지는 경우는 드뭅니다. 심지어 이스라엘은 이들을 보호한답시고 식민촌 주변에 검문소를 만들어 주민들의 이동을 통제합니다. 수십 개의 검문소가 상시 운영되고, 그밖에도 비정기적으로 수백 개가 도로 곳곳에 만들어집니다. 검문소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주민들은 시간 지체와 불편함을 겪을 뿐만 아니라 종종 학대를 당합니다.

이스라엘 군인들의 양심고백에 따르면, 땡볕에 수 시간 동안 세워두거나 앉았다 일어서기를 시키고, 욕설을 퍼붓는 등의 학대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또한 식민촌 주변에 장벽을 건설하고, 이를 국경선으로 연결하고 있습니다. 식민촌과 국경 사이에 있는 팔레스타인 마을과 농지들은 출입 불가 지역으로 지정되고 주민들이 쫓겨나고 있습니다.

서안지구의 60%는 아직도 이스라엘이 직접 통치하고 있습니다. 이곳에 사는 40여만 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은 생활의 불편을 호소합니다. 이스라엘이 토지 개발을 금지하고 있어 집이나 학교, 사육장 같은 것도 짓지 못하고, 도로를 건설하지도 못하고, 상수도를 연결하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2016년을 기준으로 상수도로 물을 공급받을 때는 ㎥(세제곱미터)당 약 1500원만 내면 되는데, 이스라엘은 이를 금지하고 자국 기업의 물을 강매합니다. 이때 물 값은 6000원에서 1만 5000원으로 급등합니다. 주민들이 저수지를 만들어 빗물을 받아 쓰면 그마저도 파괴해 버립니다.

이스라엘은 이렇게 주민들의 생활을 어렵게 만들어 C 지역(A 지역: 서안지구 면적의 18%, 팔레스타인 정부가 “국내 안보”와 “공공질서”를 담당하는 곳, B 지역: 서안지구 면적의 22%, 팔레스타인 정부가 공공질서를 책임지고 이스라엘 정부가 안보를 담당하는 공동통치 구역, C 지역: 서안지구 면적의 60%, 이스라엘이 직접 통치)에서 떠나가게 만들고, 이곳에 있는 비옥한 농지와 수자원 등의 천연자원을 사실상 독점하고 있습니다.

평화협정 당시의 조건에 따르면 이스라엘 기업이 C 지역의 자원을 이용하면 세금을 내야 하지만 이조차도 지키지 않습니다. 세계은행은 팔레스타인이 C 지역을 이용하고 각종 규제가 풀리게 된다면 연간 34억 달러(2011년도 GDP의 35%에 해당)를 추가로 생산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C 지역은 이스라엘의 손아귀에 있고 빈곤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국제사회가 원조로 지탱해 주고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을 위해 국제사회가 세금을 내는 셈입니다. 유엔 무역개발협의회는 C 지역을 넘어 팔레스타인 전체에서 이스라엘의 점령이 종식되면 GDP의 2배도 생산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18년 간 봉쇄 중인 가자지구의 상황은 서안지구보다도 열악합니다. 서울의 절반보다 조금 큰 이곳에서 200만 명이 넘는 주민이 자급자족해야 하는데 그럴 만한 경제적 기반이 전혀 없습니다.

주민의 80%는 가자지구 출신이 아니라 이스라엘로부터 추방당한 난민들입니다. 이들은 과거에 농민이었으나 농사지을 땅이 국경 너머 고향에 있으니 어쩔 수 없이 상공업에 종사하며 먹고 살고 있었는데, 봉쇄를 당한 후로 일자리를 모조리 잃고 실업률이 45%까지 올라갔습니다.

가자지구 원주민도 어렵기는 매한가지입니다. 안 그래도 땅이 좁은데 국경선 인근에 장벽이 건설되고 인접 지역이 접근금지 구역으로 편성되면서 수많은 농지를 잃었습니다. 유일한 희망이랄 수 있는 어업도 5.5km 내외로 제한되고 있어 포획량이 나날이 줄고 있습니다. 자식들이 굶주리니까 농민들은 목숨을 걸고 장벽 인근에서 몰래 농사를 짓고 어부들도 5.5km 넘다가 피살당하는 일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주민들과 국제사회가 상황을 개선하려고 노력을 하지만, 이스라엘이 주기적으로 침공해 사람을 죽이고 주거지와 생산시설을 파괴해 뒷걸음질을 칩니다. 특히 2014년 전쟁 이후로는 석유 반입이 극히 제한되고 있습니다.

만연한 전력 부족은 생산성을 심각하게 떨어트릴 뿐만 아니라, 겨울철에 난방을 못 해 신생아가 저체온증으로 사망하는 인명 피해까지 낳고 있습니다. 가자지구 주민들은 이런 생활을 20년 가까이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하마스가 지난 10월 7일에 이스라엘을 '선제' 공격해서 '평화를 깨트린' 것으로 보이나요?

▲ 3월 13일(현지시각)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라파에서 주민들이 구호식량을 받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진실을 모르는 유대인들

팔레스타인이 지금도 식민 지배를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은 곧장 유대인을 비판하고 나섭니다. 그러나 아무리 이러한 비판이 타당하다 할지라도 먼저 '왜'라는 질문을 떠올려야만 합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아무 이유 없이 투쟁하는 게 아니듯이 유대인들도 식민 지배를 찬성하거나 묵인하는 데에는 나름의 연유가 있습니다. 다만 그 이유가 잘못 알려져 있을 뿐이지요.

세간에는 흔히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땅을 욕심내는 이유가 신으로부터 약속받은 땅이라서 그런 거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에 나오는 약속의 땅이 어디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언급될 때마다 다른 경계가 제시되고 구체적이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유대인들의 거주 지역인 '단에서 브엘세바'까지와 일치하지도 않습니다.

따라서 '약속의 땅'이라는 추상적 개념을 믿으려면 종교적으로 매우 신실해야 하는데 정작 이스라엘 유대인의 약 80%가 종교적이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통계에 따르면 45%가 세속적이고, 30% 이상은 유대교를 단지 전통적 문화로 간주합니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땅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때 종교를 내세우지 않습니다. 대신 고대에 유대인들이 이 땅에 살면서 획득한 역사적 권리를 옹호합니다. 그런데 이때 말하는 역사란 학자들이 연구해서 사실로 밝혀낸 고증적 역사가 아닌, 성경에 기록된 이야기를 뜻합니다.

성경학, 역사학, 고고학계에서는 이미 1970-80년대부터 고대 유대 왕국의 위상이 성경의 묘사에 현저히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증명하고 정설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성경을 근거로 고대 팔레스타인 땅의 지배자는 유대인이라고 주장하며 비유대인들의 존재와 권리를 철저히 감춥니다.

유대교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기원후 70년에 로마에 의해 팔레스타인에서 쫓겨나 전 세계를 떠도는 이산 생활을 시작합니다. 비록 이들이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온 것은 200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뒤이지만, 강제로 추방됐던 것이니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올 권리가 있다고 주장됩니다.

그러나 역사학자들이 밝혀낸 사실은 다릅니다. 로마는 유대인을 예루살렘에서만 쫓아냈습니다. 로마를 비롯해 2000년 동안 그 어떤 국가도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의 거주를 금지한 적이 없습니다.

이산이 시작된 이후로도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서 살아간 사실은 선명하게 확인되며 오직 점차적으로만 수가 줄어드는데, 박해를 피해 떠나거나 개종했기 때문으로 추정됩니다. 6세기 이후부터 유대교 랍비들이 메시아가 도래하기 이전에 팔레스타인으로 집단 이주해서는 안 된다는 교리를 정립한 것도 인구 감소에 영향을 끼쳤을 것입니다.

한편, 이산이 시작되기 전부터 이미 매우 많은 유대인이 유럽이나 중동에서 '자발적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개종자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오늘날 유대 인구의 90%를 이루는 유럽의 아슈케나지 유대인이 그러한 것으로 의심받고 있습니다. 실제로 유전자 연구 결과 유럽 유대인은 아랍 유대인보다는 유럽인과 유전적으로 더 유사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그러니 2000년 만에 나타나 토착민보다 우선하는 권리를 요구할 자격이 있다고 보기는 불가능합니다.

앞서 말했듯이 이산이 시작된 이후로도 상당히 많은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에서 계속해서 살아왔습니다. 이들은 십자군 시기를 제외한 7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무슬림의 지배를 받습니다. 세간에서는 무슬림들이 유대인을 심각하게 박해했기 때문에 오늘날의 분쟁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냐고 말합니다.

하지만 중세에 이집트의 유대인들이 남긴 고문서 40만 부를 연구한 유대인 역사학자들은 기독교 유럽에서보다 이슬람권에서 유대인들이 '상대적으로' 권리를 잘 보장받았고, 팔레스타인에서 공통의 성지 예루살렘으로 인한 종교적 갈등이 없었던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팔레스타인에서 박해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빈도나 정도가 유럽은 물론이거니와 다른 이슬람권과도 비교할 바가 못 됩니다. 이스라엘의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에서 분쟁이 발생하기 직전인 19세기 말-20세기 초에 유대인과 아랍인 간의 관계가 매우 우호적이었다고 증언합니다.

그럼, 팔레스타인에서 왜 분쟁이 생긴 걸까요? 18~19세기에 유럽에서 유대인의 권리는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었습니다. 유대인을 '타자'로 차별하던 기독교가 더 이상 사회적 기준이 아니게 된 덕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럽인들이 기독교를 대신할 새로운 공동체의 기준으로 국가 단위의 '민족'이라는 개념을 만들면서 다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국가마다 하나의 민족만 있어야 하는데 유대인들은 독일에도 살고 영국에도 살고 프랑스, 러시아 등등 곳곳에서 발견되는 데다가 다른 유럽인과는 다른 그들만의 동질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반유대주의자들은 후진적인 유대인들이 유럽에 동화될 수 없다고 비판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1880년대에 동유럽에서 박해가 일어나자 동화를 포기하고 유대인만의 민족을 만들고, 사람이 살지 않는 '버려진 땅' 팔레스타인에서 유대 국가를 건국하자는 시온주의자가 나타납니다.

시온주의자들은 두 가지 심각한 문제에 봉착했습니다. 하나는 유대인의 반대였습니다. 대부분의 유럽 유대인은 스스로를 유럽인으로 생각했고 유럽 국가에서 살기를 원했습니다. 만약 유대 국가가 만들어지게 된다면 유럽에서 쫓겨나게 될까봐 걱정했습니다.

유대교 랍비들은 메시아가 도래하기 전에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해서는 안 된다는 종교적 교리를 지킬 것을 요구했습니다. 시온주의자들은 유대교를 믿지 않는 세속주의자들이었기에 교리 위반을 신경 쓰지 않았으나, 유대교를 믿는 유대인들은 거부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온주의자들이 부닥친 또 다른 문제는 팔레스타인에 토착민이 살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아랍인의 수가 얼마 안 될 것이고, 모든 아랍인은 유목민이라 고향에 대한 애착심이 없고, 유대인들이 이주해 가서 경제가 발전하면 식민화를 반길 것이라고 상상했습니다.

그러나 식민촌을 만들고 소작농을 추방할 때마다 아랍인들이 반발하는 것을 보며 현실을 자각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도 뜻을 굽히지는 않았습니다. 아랍인들은 미개해서 힘으로만 평화를 말할 수 있다며 총기로 무장한 불법 자경대를 만들고, 식민화를 계속했습니다. 그러면서 유럽에는 팔레스타인은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버려진 땅이고 아랍인들이 식민화를 반기며 평화롭게 지낸다고 거짓 선전했습니다.

100년이 훨씬 넘게 지난 지금도 많은 유대인들이 이런 사실을 모릅니다. 처음 식민촌을 만든 1882년부터 토착민을 추방하기로 계획을 세웠던 역사적 기록들이 친이스라엘 사관에서는 언급조차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역사 왜곡은 당연히 논리적 흠결을 만듭니다. 시온주의자들은 1897년에 대회(congress)를 열어 유대 국가가 아닌 "유대 민족의 고향"을 공식적인 목표로 내세웠습니다. 대다수의 유대인이 유대 국가에 반대하고, 또 팔레스타인을 지배하는 오스만 제국이 시온주의를 경계했기 때문에 이목을 속이기 위한 기만책이었습니다.

친이스라엘 사관에서는 이를 전략적 행동이라고 추켜세우면서도 시온주의자들이 왜 그런 선택을 해야 했는지는 말하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이 유대 국가를 원했고 토착민들이 식민화를 환영했다는 주장에 위배되기 때문입니다.

많은 역사 서적에서, 특히 친이스라엘 서적에서 유대인과 시온주의자들은 사실상 동의어처럼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1000만 유대인 중 시온주의자는 10만 명 내외에 그칩니다. 시온주의는 사상적으로나 수적으로나 정말로 극단적인 사상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도 1948년에 이스라엘 건국으로 이어지게 된 것은 영국의 제국주의 때문이었습니다.

▲ 강연하고 있는 정환빈 작가. ⓒ평화통일시민행동

영국, 분쟁을 연출하다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오스만이 독일 편에 서자 영국은 식민지 인도와 수단의 무슬림들이 동요할 것을 우려했습니다. 그래서 후세인-맥마흔 서신협상으로 아랍 지역의 독립을 약속하고 반란을 부추깁니다.

그런데 영국 내부에서 비판이 쏟아집니다. 유전 지대인 이라크는 물론이고 유사시에 이라크로 군사를 파병할 통로가 될 팔레스타인을 넘겨서는 안 된다고요. 프랑스도 아랍의 독립에 반대했습니다.

그러자 영국은 프랑스와 합의해 아라비아반도를 제외한 아랍 지역을 분할해서 통치하기로 합니다. 두 국가 모두가 탐냈던 팔레스타인의 북부지역은 국제 관리지역으로 구획됩니다. 영국은 이 점이 못마땅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프랑스를 팔레스타인에서 쫓아낼 수 있을까 고민했고 그러다 시온주의자를 이용하기로 합니다.

영국은 민족의 고향을 만들어주는 조건으로 프랑스가 아닌 영국이 팔레스타인을 통치하길 원한다는 국제 여론을 형성해 달라고 제안을 던집니다. 시온주의자들이 수락하자 1917년 11월에 영국은 밸포어 선언을 발표해 '민족의 고향'을 공식적으로 지지합니다. 많은 학자들은 팔레스타인에서의 분쟁이 이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봅니다.

전쟁이 끝나자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은 독립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유대 민족의 고향을 만들기 위해 영국이 강제로 지배하겠다는 대답을 듣게 되자 유대인을 상대로 소요를 일으킵니다. 아랍인들의 반발이 거센 것을 보고 놀란 영국은 밸포어 선언은 유대 국가가 아니라 '민족의 고향'을 약속한 것이며 점진적으로 자치정부를 허용하겠다고 선언합니다.

이후 아랍인들은 8년간 침묵을 이어갑니다. 그러나 시온주의자들의 식민화로 수많은 소작농이 쫓겨나고 유휴지도 모자라서 농사를 포기하고 도시에서 막노동자가 되면서 사회경제구조가 붕괴됩니다. 불만이 폭증한 아랍인들은 1929년에 유럽 유대인과 아랍 유대인을 가리지 않고 133명을 죽입니다. 진압 과정에서 아랍인도 116명이 죽었습니다. 자연히 두 집단 모두 서로를 증오하게 됩니다. 나아가 아랍인들 사이에서 시온주의를 막기 위해서는 영국을 상대로 무장투쟁을 해야만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됩니다.

1933년부터 유대인의 이주가 급증합니다. 1936년에 유대 인구는 30%에 육박하게 되고, 몇 년 안에 과반이 넘게 될 것으로 예상되자 아랍인들이 거국적으로 봉기합니다. 무장투쟁에 반대하던 아랍 지도자들도 마침내 영국과의 타협을 포기하고 이를 지지합니다. 80명의 유대인뿐만 아니라 영국인도 37명이 죽자, 영국은 대대적인 숙청을 시작해 1000명의 아랍인을 학살합니다. 그러고선 유대 국가를 만들겠다고 발표합니다.

아랍인들이 거세게 반발하며 무장투쟁을 강화하자 시온주의자들은 이를 저지하려고 시장과 버스 등 공공장소에서 수차례 폭탄 테러를 저지릅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다 죽여버리는 잔혹함에 아랍인들은 더욱 거세게 투쟁하지만, 영국군에 수천 명이 학살당하고 무너집니다. 그러다 1939년에 2차 대전이 발발할 조짐이 보이자 영국은 재빨리 태세를 전환해 유대 국가를 포기하겠다고 발표하고 아랍인들을 달랩니다. 이는 역으로 시온주의자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켜 테러가 늘어나게 됩니다.

영국은 아랍인을 대하듯이 유대인 테러리스트를 죽일 수는 없었습니다. 그들은 같은 유럽인이었고 또 미국의 권력층이었기 때문입니다. 2차 대전이 끝난 후로 시온주의자들의 테러는 더욱 거세지고, 1946년에는 킹 데이비드 호텔의 별관을 폭파해 91명을 죽입니다. 팔레스타인 현대사 최악의 폭탄 테러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진압을 머뭇거렸습니다.

결국, 아랍인과 시온주의자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 유엔에 해결책을 떠넘겼고, 미국과 소련의 입김으로 국제사회는 유대 국가를 건설하기로 결정을 내립니다. 당시 팔레스타인에서 유대 인구는 3분의 1에 그치고 소유한 토지는 6.6%에 불과했으나, 팔레스타인 땅의 주인은 이곳에서 살지 않는 해외의 유대인이라는 시온주의자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과반이 넘는 땅을 유대인들에게 배정했습니다.

유엔으로부터 유대 국가에 대한 지지를 얻어낸 시온주의자들은 환호하며 그토록 벼리던 팔레스타인 땅의 유대화에 나섰습니다. 유엔이 정한 유대 국가의 국경선에는 유대인과 비슷한 수의 아랍인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유대' 국가를 만들기 위한 인종청소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시온주의자들은 1948년 4월까지 200여 개의 마을을 완전히 파괴해 30만여 명이 피란길에 오르게 만들었습니다. 이를 위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수많은 사람을 죽여 공포와 공황을 불러일으켰고, 특히 데이르 야신에서는 30명의 아기를 포함해 200명 가까이 학살하고 강간했습니다.

데이르 야신은 시온주의자들과 평화협정을 맺은 친유대적인 마을이었는데도 전략적 요충지에 자리한다는 이유로 제거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런 잔학무도한 행위에 아랍권 전역에서 분노가 들끓었고 마침내 4월 30일 아랍 국가들이 팔레스타인 형제들을 구원할 병력을 파견하기로 결정합니다.

5월 14일에 이스라엘이 건국되고 그날을 끝으로 영국이 팔레스타인에서의 통치를 공식적으로 종료하자 그 다음 날부터 제1차 아랍-이스라엘 전쟁이 발발합니다. 아랍인들은 전쟁에서 패하고 서안과 가자지구를 제외한 78%의 팔레스타인 땅이 이스라엘 소유가 됩니다. 이스라엘은 전쟁 전후로도 인종청소를 계속해 400~500개의 마을을 파괴했고, 이 지역에 살고 있던 인구의 85%인 75만여 명이 난민이 되어 쫓겨납니다.

▲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지난해 10월 28일(현지시각) 텔아비브에 위치한 키르야 기지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AFP=연합뉴스

제3자인 우리가 해야 할 일

팔레스타인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누가 잘못했는지가 명확히 드러납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에 대해 논쟁이 첨예하게 이는 것은 진실을 아는 사람이 적어서입니다.

가령 우리나라를 비롯한 서구권 국가에서는 아랍 국가들이 한창 진행 중이던 인종청소를 막기 위해 군대를 파견한 사전 맥락은 말하지 않고 갑자기 침공했다고만 가르칩니다. 심지어 유대인들이 아랍인들과 함께 평화롭게 살자고 손을 내밀었는데 아랍 국가들의 명령을 따라 '자발적으로 피란'을 나선 거라서 이스라엘은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말합니다.

전쟁 발발 이전에 있었던 수많은 학살과 마을 파괴는 유대인들의 기록으로 선명하게 남아 있고 유대인 역사학자들에 의해 세상에 공개되었으나, 많은 사람들은 이에 관심을 가지지 않고 종래의 친이스라엘 사관만을 신봉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역사 왜곡 사례는 무수히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분쟁이 시온주의라는 민족주의적 식민주의 사상에 의해 발생하였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이 감춰지고 있습니다. 진실을 아는 사람은 결코 누가 피해자이고 가해자인지를 고민하지 않습니다. 다만, 팔레스타인을 위해 목소리를 내기 주저할 때가 있을 뿐입니다. 지난 하마스의 공격처럼 무장투쟁으로 민간인들이 목숨을 잃고 성범죄에 노출되었을 때 말이지요.

전력적으로 크게 열세인 팔레스타인인들이 시온주의자나 군인만 골라서 공격한다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만, 그렇다고 민간인 상대의 범죄를 두둔하기도 어렵습니다. 실제로 저는 주일본 팔레스타인 대사를 만나서 하마스의 잔학행위를 규탄한다고 직접 말했습니다. 다만, 하마스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그 맥락을 이해하고 있으며, 지난 150년간 평화적 방법으로는 단 한 번도 상황을 개선하지 못한 역사를 알기에 무턱대고 무장투쟁을 비판하지는 않을 뿐입니다.

제3자인 우리는 무장투쟁의 잘잘못을 따지기보다는 팔레스타인인들이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유대인을 구하는 방법도, 팔레스타인인을 구하는 방법도 단 한 가지뿐입니다. 바로 식민 지배를 종식시키는 것입니다. 독립운동가들이 일제강점기 때 일본의 잔학무도함을 널리 알리고 국제사회의 지지를 구했던 것처럼, 우리가 이스라엘의 식민 지배를 널리 알리고 반대의 목소리를 낼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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