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의사 증원으로는 절박한 시대 과제를 해결할 수 없다

[시민건강논평] 공공보건의료 강화를 통한 탈시장화를 추구하자

지난 20일, 내년 의과대학별 2000명 증원분 정원에 대한 배정결과가 발표됐다. 미복귀 전공의들에 대한 면허정지 처분에 반발한 의대 교수들의 집단 사직서 제출이 오늘 예고된 상태다. 어제 면허정지 처분을 유연하게 처리하는 대통령 지시가 있긴 했지만, 증원 계획에 변경이 없는 한 의사 집단의 저항은 쉽게 수그러들지 않을 것 같다. 의사파업 국면이 장기화될수록 환자들의 피해가 커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하루속히 사태가 종결되기를 바라지만, 그럼에도 보름 앞으로 다가온 4.10 총선이 끝난 뒤에야 국면전환의 분기점을 맞이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한다. 안타깝지만 그 전까지 정부의 정책노선에 큰 변화가 있기 어렵다고 보기 때문이다. 중앙사고수습본부와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에서 연일 브리핑을 이어가며 정부의 의료개혁 노력과 그간의 성과를 홍보하는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이미 많은 평론에서 진단한 바와 같이 의사 증원 정책은 사실상 집권 세력의 '우회적' 핵심 선거전략으로 작동하고 있다. 그리고 '2000명'이라는 숫자는 그 자체로 의료개혁의 상징으로 정치적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국민 건강을 다루는 중요한 보건의료정책을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에 대한 비판도 적지 않은 듯 하다. 하지만 정책과 정치는 본질적으로 '한 몸'이라는 점에서 정책의 정치화 현상 그 자체를 문제삼는 건 적실한 비판이라 보기 어렵다.

선거는 개혁을 위한 기회의 창이 열리는 중요한 모멘텀(순간)이다. 정치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치열한 선거경쟁 속에서 굵직한 제도변화의 가능성이 열린다. 정당 뿐 아니라 정부 역시 집권당의 선거승리에 유리한 정책을 은밀히, 때론 이번처럼 노골적으로 추진하며 후방 지원에 나서기 마련이다. 사회적으로 쟁점화되었던 '응급실 뺑뺑이', '소아과 오픈런', 지역병원 의사 구인난 등의 소위 '지역·필수의료 공백' 문제가 선거를 앞두고 정부의 핵심 의제로 부상한 것도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볼 수 있다.

문제는 바로 이 사회적 문제에 대한 원인 분석과 그에 따른 정책대안의 선택에 있다. 의사 증원이 의사 인력을 포함한 의료자원 분포의 왜곡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대해선 그간 많은 사회적 논의를 거치며 일정수준 동의와 공감대가 형성된 듯 하다. 따라서 이번 논평에서는 이를 재론하기보다, 어떻게 이 불완전한 대안이 "생명과 건강을 살리는 의료개혁"의 '필수' 조건으로 호명되고 수용될 수 있었는지에 대한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우선 사회문화적 측면에서 보자면, 그동안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좇아 직업윤리를 외면했던 의사 집단에 대한 시민들의 반감이 상당하기 때문으로 이해할 수 있다. 공적 가치를 위배하는 특정 기득권 집단에 대한 사회적 통제를 강화하는 것도 정책의 한 목표가 될 수가 있고, 그런 점에서 의사 증원은 이들의 권력을 다소간 약화시킬 수 있는 대안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는 본래 해결하고자 했던 문제에서 빗겨간 부차적 과제일 뿐이다.

진짜 개혁의 대상은 시장형 공급구조

진정한 보건의료개혁이라면 지금의 '지역·필수의료 공백' 문제의 근본 원인이 되는 구조와 메커니즘을 찾아서 바꾸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우리는 그간의 관련 지식과 근거를 종합할 때 바로 '시장형' 공급구조가 그 핵심 원인이라고 판단한다. 또한, 이 익숙한 사실을 낯설게 보는 데에서부터 문제 해결을 위한 첫걸음을 내딛어야 한다고 믿는다. 매우 낮은 공공병원 비중만 보더라도 한국 보건의료체계는 전세계에서 가장 시장적인 공급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정부의 의료개혁안에는 이 문제에 대한 정책 목표와 대안이 없다. 마치 건드릴 수 없는 성역인 것처럼, 보건의료체계의 시장형 공급구조는 문제의 원인이기보다 오히려 문제 해결의 기본 전제로 간주되고 있다. 즉, 지금의 시장친화적 보건의료체계의 패러다임에서 공급구조의 탈시장화는 상상할 수 있는 정책적 가능성의 범위에서 제외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자본주의 사회경제체제에서 보건의료체계가 시장 원리로 돌아가는 게 당연한 게 아니냐는 반문이 흔히 뒤따른다. 하지만 유럽 복지국가 사례를 보더라도, 사회적 합의와 제도 설계를 통해 체제와 디커플링(탈동조화)되는 방식으로, 즉 상당 수준 탈상품화, 탈영리화된 형태로 보건의료체계를 구축·운영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보건의료체계의 공공성 강화'란 바로 그런 의미다.

정부가 제시한 의료개혁의 목표에는 '체계의 시장주의적 작동원리에 조응하는 범위 내에서'라고 하는 묵시적 전제가 행간에 숨겨져 있다. 의대 입학 정원 확대를 비롯해 '보완형 공공정책수가'나 혁신계정, '가치지향 지불제도' 등과 같이 공급 확충과 인센티브 강화라고 하는 시장 메커니즘을 활용한 대안들이 개혁의 골자를 이루고 있다는 게 그 근거다.

과연 기존의 시장적 구조와 메커니즘을 건드리지 않는 '맥락 보존적' 정책들의 조합을 개혁으로 볼 수 있을까. 눈 앞에 있는 문제들에 대응하며 기존 제도를 조금씩 수선해가는 체계(체제)내적 접근을 '개혁(reform)'이라 불러야 한다면, 체계의 탈시장화를 목표로 하는 실천에는 '변혁(transformation)'이 더 적확한 명명일 수 있겠다. 어찌되었든 이번 의료개혁안에는 정부 주장과 달리 절박한 시대적 과제가 전혀 담겨 있지 않다.

체제내적 개혁의 한계와 통치술로서의 의사 증원 정책

보건의료체계의 공공성 강화를 지향하는 관점에서 보자면, 지금 추진되는 방식의 (시장순응적) 의사 증원 정책은 실질적 도움이 안 될뿐 아니라 오히려 부정적 영향을 끼치는 측면도 있다. 보다 근본적인 구조적 모순을 해결하는 데 사용해야 할 정치사회적 역량을 소모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힘들게 먼 길을 걸어온 듯 했지만 돌아보니 제자리 걸음인, 허무한 상황을 맞이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제대로 된 구조 개혁을 시도조차 못한 채, "어떻게 해도 지역·필수의료 공백 문제는 해결이 안 되는구나" 하는 절망과 포기의 정서가 만연해지지 않겠는가. 우리는 바로 이것이 개별 정권의 차원을 넘어서는 통치의 관점에서 의사 증원 정책이 동원되는 한 가지 핵심 이유라고 생각한다. 통치의 정당성을 위협받지 않으면서도 한계에 봉착한 구조에 대한 변화 요구를 교묘하게 굴절, 왜곡시키면서 보건의료체계의 영리화, 시장화 흐름을 더욱 가속하기 위한 전략적 계산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체제내적 개혁은 시민들에겐 불합리할지 몰라도 국가와 자본의 관점에서는 매우 합목적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이를 의사 증원에 반대한다는 뜻으로 곡해하지 말라. 과거 논평에서 썼듯이, 정책에서는 맥락이 동기와 지향을 설명하고 그것이 다시 내용과 초점을 결정한다. 의사 증원이라는 동일한 정책도 어떤 맥락에 위치한 것인지에 따라 전혀 다른 과정과 결론에 이를 수 있다는 의미다.

의사 증원은 보건의료체계의 공공성 강화라고 하는 분명한 동기와 지향 속에서 이뤄져야 한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추진되고 있는 정부의 여러 정책들(예: 비대면진료 제도화)을 보건대 이를 둘러싼 맥락은 탈시장화와 거리가 멀다. 지금이라도 공공의대, 지역의사면허제 등과 같이 보다 탈시장화된 방식으로 의사 증원을 추진하면 될텐데 그렇게 하지 않는 까닭이 무엇인가. 바로 시장화의 구조적 맥락을 거스를 수 없기 때문이 아닌가.

보건의료 분야는 '솔루셔니즘'이 특히 강한 영역이다. 즉, '비현실'적인 이상에 깃댄 비판만 하지 말고 손에 잡히는 대안을 내놓으라는 압력이 강하다. 이처럼 미시적 정책기술론이 팽배한 맥락 속에서 의사 증원을 공공성 강화에 대한 국가 책임을 회피하는 통치술로 봐야 한다는 비판은 그 자체로 하나의 '솔루션'이자, 정부의 표현을 빌리자면, 올바른 의료개혁을 가능하게 하는 '필수' 조건으로서 의미가 있다.

우리의 대안은 공공보건의료체계 강화를 통한 탈시장화

물론 추상적 구호로 그쳐서는 안 될 것이다. 보건의료체계의 공공성 강화라는 사회변혁의 과제는 그 하위 시스템인 공공보건의료체계의 강화를 기점으로 구체화될 수 있다. 단번에 시장중심적 구조 전체를 바꿀 수 없기 때문에 그 구조 안에서 공공보건의료체계를 구심점 삼아 지속적으로 시장성·영리성을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개혁적 시도를 추진해야 한다. 이번 의사 파업 국면을 비롯해 오랜 기간 진보 시민사회 진영에서 한목소리로 공공보건의료 강화를 주장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정부의 철저한 외면 속에서 공공보건의료 강화론은 일반 시민들에게 현실 문제 해결의 유력한 대안으로 충분히 가닿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공공병원은 낙후되었고 비효율적이라는 고정관념, 그리고 화려하고 편리한 민간의료시장에 대한 선호가 사회문화적으로 고착된 결과일 것이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도 대학병원의 대안으로 지역 공공병원이 선택받지 못하는 주요 이유이기도 하다.

오늘날 공공병원이 외면받게 된 원인은 공공병원의 부실화를 방치한 정부 책임이 크다. 이는 당연히 보건의료체계의 시장화 맥락 속에서 공공병원을 형해화하는 전략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진주의료원처럼 강제 폐업시키지 않지만 껍데기만 남긴 채 민간 시장의 우위를 입증하는 상징적 기능만 남겨두려는 것이다. 맥락이 이러하니 지방의료원 신설에 대해 세금만 좀먹는 부실병원을 양산할 뿐이라는 전문가들의 냉소적 비난을 넘어서기 어렵다. 국립대병원의 권한과 역할을 강화할 거라고 하지만 경영평가 압박과 사립대병원과의 경쟁 구조 속에서 사실상 영리추구의 민간병원과 크게 다를 바 없어진 상태가 아닌가.

이제라도 체계에 대한 관점을 주류화함으로써 이 난관을 돌파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공공보건의료 강화는 단순히 병원을 더 짓고 인력을 더 채용하자는 개별 정책 제안으로 환원될 수 없다. 민간 의료시장의 지나친 영리추구 행태를 견제하면서 최소한의 의료 공공성을 담보해내는 것이 공공보건의료 체계강화론의 일차 목표다. 체계를 구성하는 모든 영역과 분야를 포괄하는 관점과 범위에서 이를 위한 전략을 구상하고 자원을 동원하고 대안을 개발해야 한다.

다만 여러 대안 가운데 공공병원 확충이 대표성·우선성을 갖는 건, 압도적 다수의 민간 의료기관들로 둘러싸인 시장 생태계에 잠식되지 않으면서 역으로 이를 '교란'시키기 위해서는 일정 규모 이상 몸집을 키울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의사 증원 '2,000명'과 마찬가지로 참여정부 시절 공약으로 내세웠던 공공병원 '30%' 확충이 지금까지 회자되는 것도 이러한 정치적 목표가 담긴 상징적 숫자로서 의미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공공병원 형해화는 기존의 시장의존적 체계에 종속된 필연적 결과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공공병원 확충·강화는 그 체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의 거점, 장이 될 수 있기도 한 것이다.

병원 신설 조건인 예비타당성 조사나 재정건전성 논리 등 공공보건의료체계의 강화를 가로막는 무수한 제도적, 정치경제적, 사회문화적 장벽을 뛰어넘기 위해서는 이를 지지하는 시민 다수의 결집된 정치적 힘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우리 모두의 생명과 건강을 '언제, 어디서나' 차별없이 지켜줄 수 있는 보건의료체계를 만들기 위해 공공보건의료 강화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인식, 신념, 담론, 규범이 사회 주류로 자리잡을 때 의료개혁으로 포장된 시장주의적 정책 시도들은 더 이상 발 붙일 곳을 잃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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