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티 비극은 언제까지? '갱단 폭력'에 미·유럽 외교인력 철수

2021년 대통령 암살 뒤 총리에 대한 국민 불만 편승…주민 44% 굶주리는 상황서 고통 심화

카리브해 섬나라 아이티의 갱단 폭력 사태가 점점 악화하며 미국, 유럽연합(EU) 등의 외교 인력 탈출이 잇따랐다. 선거를 지연 중인 아리엘 앙리 아이티 총리에 대한 국민 불만에 편승해 갱단 수괴가 혁명가를 자처하는 상황에서 이미 심각한 빈곤을 겪고 있는 주민들의 고통이 심화되고 있다.

10일(이하 현지시간) <로이터>, <AP>, 미 ABC 방송을 보면 라틴아메리카와 카리브해를 담당하는 미 남부사령부는 성명을 내 미 국무부의 요청에 따라 아이티 수도 포르토프랭스 주재 미 대사관의 비필수 인력들을 군용기를 통해 철수시켰다. 사령부는 군용기에 아이티인은 탑승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이날 아이티 주재 유럽연합(EU) 대표단도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안보 문제로 사무소를 임시 폐쇄하고 최소 인원만 남겨 뒀다고 밝혔다. 독일 도이체벨레(DW) 방송은 같은 날 독일 외무부가 아이티 주재 독일 대사가 다른 EU 대표단과 함께 "매우 긴박한 안보 상황으로 인해" 아이티를 떠났고 추후 공지가 있을 때까지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일할 예정이라고 밝혔다고 전했다.

2021년 7월 조브넬 모이즈 당시 아이티 대통령이 콜롬비아 용병 등에 의해 암살당한 뒤 극심한 혼란을 겪던 아이티에선 이달 초 갱단이 포르토프랭스에 있는 교도소를 습격해 3800명에 달하는 수감자 중 대다수가 탈옥하며 혼돈에 빠져들었다. 아이티 정부는 즉시 야간 통행금지 및 비상사태를 선포했지만 곧바로 갱단이 포르토프랭스의 투생 루베르튀르 국제공항에 난입해 군인 및 경찰관들과 총격전을 벌이는 등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갱단 수괴 지미 셰리지에, 일명 '바비큐'는 아리엘 앙리 아이티 총리의 퇴진을 요구하고 있다. 셰리지에는 지난주 "아리엘 앙리가 총리직에서 내려오지 않고 국제사회가 아리엘 앙리에 대한 지지를 계속한다면 그들(국제사회)은 우리를 대량 학살로 끝날 내전으로 곧바로 끌어 들이는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앙리 총리는 모이즈 대통령 암살 뒤 선거를 미루며 대통령 권한 대행직을 유지하고 있다. 앙리 총리는 당초 지난달 7일까지 정권 이양을 약속했지만 지키지 않아 지난달부터 아이티에선 총리 퇴진을 요구하는 반정부 시위가 벌어지고 있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교도소 습격 당시 케냐 방문 중이었던 앙리 총리가 히스파니올라섬을 공유하고 있는 이웃국 도미니카 공화국을 통해 아이티로 입국할 예정이었지만 도미니카 공화국의 거부로 푸에르토리코에 발이 묶여 있다고 설명했다. 신문은 9일 루이스 아비나데르 도미니카 공화국 대통령이 안보상의 이유로 "(앙리) 총리가 여기 있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니다"라며 입국을 거부했다고 설명했다.

미국과 카리브해 국가들도 앙리 총리에 선거를 치를 것을 압박하고 있다. 매튜 밀러 미 국무부 대변인은 지난 6일 언론 브리핑에서 미국과 카리브해 국가 연합체인 카리브 공동체(CARICOM)가 "앙리 총리를 포함한 이해관계자들에 아이티인들의 이익을 위해 양보할 것을 지속적으로 촉구해 왔다"며 앙리 총리에 "사임을 촉구하거나 압박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의 길을 닦을 것"을 강조했다.

카리브 공동체는 지난달 29일 성명에서 앙리 총리가 2025년 8월31일까지 선거를 치르겠다고 약속했다고 못박았다.

셰리지에가 반정부 기조에 편승해 갱단 폭력을 혁명으로, 자기 자신을 포퓰리스트 정치인으로 자리매김하려 한다고 <파이낸셜타임스>는 짚었다. 셰리지에는 자신들이 "전체 시스템을 바꾸려는 전투"를 벌이고 있다고 주장한다.

9개 갱단의 연합(G-9)을 이끌던 경찰 출신 셰리지에는 조직에 다른 무장 조직들을 끌어들이고 모이즈 대통령 살해 뒤 권력 공백을 메우며 세력을 키웠다. 신문은 보안 및 의료 서비스 제공업체 인터내셔널 SOS의 줄리안 모로 지역 보안 국장이 셰리지에가 갱단 폭력을 "혁명"이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갱단의 "공항, 항구 등 전략 자산 탈취 시도가 더 늘 것"이라고 예측했다고 전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분쟁전문 싱크탱크 국제위기그룹의 아이티 전문가 디에고 다 린은 셰리지에가 "어머니의 날엔 여성들에게 선물을 주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낼 여유가 없는 가정엔 돈을 준다"며 그가 빈민가의 대변자로 자처하는 근거가 아주 없진 않다면서도 "하지만 주민들은 그(셰리지에)가 그들이 겪는 악몽의 주요 책임자 중 하나라는 걸 알고 있다"고 지적했다고 전했다.

셰리지에는 자신의 별명 '바비큐'가 포르토프랭스 거리에서 프라이드 치킨을 팔던 어머니의 직업으로부터 비롯됐다고 주장하지만 많은 이들은 이 별명이 희생자를 소각하는 그의 잔혹한 행위에서 비롯됐다고 본다고 매체는 덧붙였다. 셰리지에는 2018년 최소 71명이 사망하고 7명의 여성이 강간 당한 포르토프랭스 라살린 지역 공격을 계획하고 참여한 혐의 등으로 미국과 유엔 제재 대상에 올랐다.

UN은 G-9 등 갱단이 포르토프랭스의 80%를 통제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파이낸셜타임스>는 갱단이 사업체에서 돈을 갈취하고 주민을 납치해 몸값을 뜯어 낼 뿐 아니라 각 갱단이 빈민가를 구역별로 영지처럼 통제하며 식량을 나눠주고 비정부기구에 운영 허가를 내준다고 설명했다. 신문은 많은 갱단이 아이티 엘리트들과 연결돼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고 덧붙였다.

유엔에 따르면 아이티에선 지난해 이미 8400명 이상이 살해, 부상, 납치 등 갱단 폭력의 희생양이 됐고 난민 20만 명이 발생했다. 유엔세계식량계획(WFP)에 따르면 아이티 인구의 44%인 435만 명이 심각한 식량 불안을 겪고 있다.

최근 갱단 폭력이 격화되며 사태는 더 심각해졌다. <뉴욕타임스>(NYT)는 의료구호단체 국경없는의사회를 인용, 총상 환자들이 점점 더 많이 찾아 오고 있으며 깨끗한 물이 공급되지 않아 콜레라 위험이 늘고 있다고 설명했다고 전했다.

신문은 주민들이 폭력이 잠시 멈추는 틈을 타 식료품 조달 등 필수적인 일을 위해서만 집 밖으로 나가고 있으며 바깥 상황이 너무 위험해 일을 하러 나가지도 못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장 마르탱 바우어 WFP 아이티 국장은 이 같은 상황이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많은 주민들의 재정 상태를 불안정하게 하고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아이티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대량 기아의 장기화"라고 지적했다.

신문은 주민들이 물품 비축을 위해 슈퍼마켓에 몇 시간이나 줄을 서고 있지만 전문가들이 도로 운송이 너무 위험하고 갱단이 항구를 장악한 상태에서 물품을 구하기 더 어려워질 것으로 보고 있다고 덧붙였다.

▲미군이 10일(현지시간) 아이티 수도 포르토프랭스 주재 미국 대사관에서 비필수 인력을 군용기로 철수시킨 가운데 경찰들이 대사관 밖을 감시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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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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