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동원 추도비 철거, 일 언론도 반대하는데 정작 한국 정부는…

한국 대법원 강제동원 판결은 무시하더니…일본 최고재판소 판결 존중하는 정부

일본 군마현 다카사키(高崎)시 현립 공원 '군마의 숲'에 위치한 일제강점기 조선인 노동자 추도비 철거가 결정된 가운데, 일본 언론에서도 이를 중지하라는 목소리나 나오고 있지만 한일 관계가 중요한 한국 정부는 적절한 곳으로 이전하는 것이 우선적 해결 방안이라는 입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30일 일본 일간지 <아사히신문>은 사설에서 "군마현은 어제부터 과거를 기억에 남기고 반성하며 우호로 이어간다는 많은 사람들의 염원이 담긴 조선인 추도비를 철거하기 시작했다. 이해할 수 없는 폭거"라며 "야마모토 이치타 (군마현) 지사에게 즉시 중지할 것을 요구한다"고 밝혔다.

해당 추도비는 지난 2004년 시민단체 주관으로 군마현 의회의 동의를 얻어 해당 장소에 건립됐다. 비석 앞면에는 한국어와 일본어, 영어로 "기억 반성 그리고 우호"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조선인에게 큰 손해와 고통을 준 역사의 사실을 깊이 반성, 다시는 잘못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표명"한다고 명시돼 있다.

이 추도비는 10년 기한으로 지어졌는데 2014년 6월 철거를 주장해던 일본 우익단체인 '소요카제'(산들바람)가 추도비 철거 청원을 냈고 이를 현 의회가 채택했다. 이후 현 당국은 7월 기간 연장 불허를 결정했고 시민단체가 이에 반발하면서 법원에서의 다툼이 시작됐다.

일본의 우익 단체는 추도비 앞에서 정치적 행사를 하지 않겠다는 것이 설립 조건이었는데 이를 어겼다며 철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이 문제를 삼은 정치적 행사의 발언은 2차 세계대전 중 일본에 의해 강제동원된 노동자들을 기억해야 한다는 수준이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시민단체와 군마현 간의 법정 다툼은 2022년 일본 최고재판소의 결정으로 마무리됐다. 최고재판소는 2021년 도쿄 고등재판소가 군마현 측의 손을 들어줬던 판결을 그대로 유지했다. 이에 군마현은 지난해 4월 철거명령을 내렸고 이날 실제 철거에 돌입하는 행정대집행을 실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 29일 일본 군마현 다카사키(高崎)시 현립 공원 '군마의 숲'에 위치한 일제강점기 조선인 노동자 추도비의 철거가 결정된 가운데, 이를 집행하기 위한 공사 안내 표시가 세워졌다. ⓒ연합뉴스

<아사히신문>은 이에 대해 "현은 정치적 행사를 금지한 설치 조건에 위반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강제 연행 사실을 호소하고 싶다' 등의 발언이 있었던 것은 단체측도 인정하고 있지만 그 이후에 추도비 앞에서 집회를 자제하고 있고 지난 10년 여 간 '문제'는 일어나지 않았다"며 설립 조건에 위반한다는 법원 판단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신문은 "일찍이 현 의회도 만장일치로 설치에 찬성해 정부 견해에 따라 아시아의 평화와 우호를 바라는 내용을 새긴 비"라며 "(우익) 단체 측의 발목잡기 식으로 철거까지 하는 것은 균형을 잃은 것이 아닌가"라고 따져 물었다.

이어 신문은 △재판소의 판결은 철거하라는 명령이 아니라 기간 연장을 불허하겠다는 데 있었다는 점 △2021년 도쿄 고등재판소의 2심 판결이 형식적 규칙 위반을 강조하면서 헌법이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에 미치는 악영향에 대해 살피지 못하고 있어 승복하기 어려운 내용이라는 점 △추도비가 설치된 공원에서 강제 연행을 말하는 것을 일률적으로 금지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 등을 거론하며 2심 판결 및 군마현 대응의 문제점을 꼬집었다.

신문은 "전쟁 전 일본을 미화하는 풍조가 강해지는 가운데 현이 일부 세력으로부터 항의를 받고 정치적 중립을 내세워 무사안일에 빠져 있다면 이는 역사 조작에 도움을 줄 수도 있는 것"이라며 "매우 위험한 사태"라고 진단했다.

신문은 "군마현 지사는 추도비의 목적이나 비문의 내용에 문제는 없으나 운영방식에 규칙 위반이 있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목적을 살릴 수 있는 방안을 생각해야 할 것"이라며 "야마모토 지사는 지금이라도 비석을 남길 길을 찾기 위해 다시 한 번 단체와 대화해야 한다. 현이 해야 할 일은 과거사에 대해 열린 논의를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지 스스로 논의의 장을 막는 것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추도비 철거에 대한 비판 여론이 일본 내부에서도 나오고 있지만 한국 정부는 이 사안이 한일 양국의 우호관계를 저해하지 않아야 한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임수석 외교부 대변인은 이날 정례브리핑에서 "이 사안에 대해서는 이미 일본 시민단체 그리고 또한 일본 최고 재판소의 판결 등으로 일본 내에서도 필요한 절차가 진행되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며 "한일 양국 간 필요한 소통을 통해 이 사안이 우호 관계를 저해하지 않는 방향으로 해결될 수 있도록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는 이미 철거가 집행된 추도비를 다시 그 자리에 세울 수는 없으며, 최고재판소 결정에 따라 적절한 부지로 이전하는 것을 우선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는 입장인 것으로 전해졌다. 시민단체와 군마현 간에 이견이 있으나 지자체 쪽에서 적절한 대체 부지를 제공할 의사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일본의 법 절차에 따라 이미 철거가 진행됐기 때문에 다른 대안을 생각해야 한다는 정부의 입장을 두고, 유독 일본에만 저자세로 나가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일본 최고재판소의 판결을 수용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라면 상호주의 원칙 및 주권존중의 입장에 따라 일본도 한국 대법원의 판결을 존중해야 하는데, 일본 정부는 지난 2018년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일본 기업이 배상을 해야 한다는 한국 대법원의 판결에 대해 반발하고 있는 상태다.

이런 가운데 한국 정부는 한국 대법원의 판결을 지키지 않고 있다. 정부는 지난해 3월 행정안전부 산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하 재단)에 민간 기금을 모금해 대법원의 판결로부터 법정 채권을 얻게 된 피해자들에게 일본 기업 대신 판결금을 지급하겠다는 강제동원 해결책을 내놨었다.

또 정부는 재단으로부터 판결금을 수령하지 않겠다는 피해자들의 법정 채권을 없애기 위해 지방법원에 판결금을 공탁하기까지 했다. 다만 이 공탁은 피해자의 의사에 근거에 연이어 불수리 결정이 내려진 바 있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한일 관계에서 보인 이같은 행보를 고려했을 때 정부는 이번 추도비 철거 국면에서도 강제동원 피해자들이나 시민단체보다는 일본 최고재판소 및 군마현의 결정에 따르면서 한일 우호 관계에 저해됨이 없이 사건이 마무리되기를 바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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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호

외교부·통일부를 출입하면서 주로 남북관계를 취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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