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길 따라 걷다보니 3000리…근대수리시설은 농업 역사의 '보물창고'"

[인터뷰]전북 근현대 수리시설 따라 1200㎞ 걸은 김장근씨

만경강 ‘대간선수로’ 걸으며 관련 역사 유적 탐사

동진강 도수로까지 도보여행하며 주민들 만나 기록

그동안의 답사기 SNS에 남겨…단행본도 발간 예정

만경강 상류인 전북 완주군 고산면 어우보에서 군산시 옥구면 옥구저수지를 잇는 63Km의 수로가 있다. 일제 강점기때 준공된 이 수로의 이름은 ‘대간선수로(大幹線水路)’다. 호남평야를 관통하는 농지에 물을 대기 위한 ‘큰 줄기 물길’인 셈이다.

이 대간선수로는 지금으로부터 꼭 100년 전인 1923년 준공됐다. 대아저수지와 함께 준공된 대간선수로는 당시 일제의 조선총독인 사이토가 참석할 정도로 큰 관심을 끌었던 대단위 토목사업이었다. 그런데 100년이 되는 올해 주목을 끌만한 데도 해당 기관이나 지자체, 언론 등에서는 일절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일제에 의해 식민지 수탈의 목적으로 건설된 탓에 일부러 눈길을 주지 않았거나 단순한 농업용 수로로 생각해 관심을 받지 못한 이유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일찌감치 근대 수리시설에 관심을 가지고 직접 현장을 찾아 시설을 살펴보고 주민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온 연구자가 있었다.

NH농협은행 전북본부장을 퇴임하고 현재는 우석대학교에서 관광경영학 박사 논문을 준비 중인 김장근(59)씨가 그 주인공이다.

김 전 본부장은 2021년 가을부터 전북지역 수리시설과 강, 하천에 관심을 갖고 도보탐사에 나서 지금까지 48회에 걸쳐 1260여㎞를 걸었다.

한반도의 남북을 잇는 것이 삼천리라고 한다면 그는 한반도를 남북으로 종단하고도 남는 거리를 걸어온 셈이다.

<프레시안>은 그가 걷는 이유와 무엇을 발견했는지, 그 결과를 어떻게 담아낼 지에 대한 궁금증이 일어 그의 도보탐사에 무작정 동행했다. 다음은 그와 나눈 대화, 서면 인터뷰 등을 정리한 것이다.

▲김장근 전 NH농협은행 전북본부장. ⓒSNS

프레시안: 전북의 근대 수리시설과 강, 하천에 대한 답사를 시작하게 된 배경과 이유가 궁금합니다.

김장근 전NH농협은행전북본부장(이하 김장근): 농협에 근무했던 영향인지 근대 농업사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책과 인터넷에서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진 근대 수리(水利) 유산들이 지금도 사용되고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해방 후 유지 보수 노력과 개량을 통하여 전라도 평야지역의 풍년농사에 절대적으로 기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2021년 가을 무렵에 대아저수지와 연동된 대간선수로에 관심이 갔습니다. 그래서 자료들을 보았으나 충분치 않았고 갈증이 있었습니다. 공부한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전모를 현장에서 내 눈으로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급기야 바로 전 구간에 대한 도보 답사를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프레시안: 그동안 탐사를 위해 다닌 대략적인 코스와 총 거리는 얼마나 되나요.

김장근: 답사는 두 개의 트랙으로 진행됐습니다. 하나는 수로 시스템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강과 하천(만경강 수계, 동진강 수계)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강과 하천은 수로 시스템과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즉 강과 하천은 농업용수의 원천이기도 하고 또 배수로 역할도 하기 때문입니다. 전북에는 상징성과 역사성 그리고 효용성과 미래자산으로서 가치가 있는 간선수로급 이상이 모두 4개가 있습니다. 대간선수로와 김제간선수로, 정읍간선수로 그리고 동진강 도수로입니다.

이 네 개의 수로를 19번에 걸쳐서 모두 걸었고 걸은 누적 거리는 모두 438㎞에 달합니다. 1100리 정도 되는 거리입니다. 특히 대간선수로는 두 번을 걸었고, 걸은 거리에는 포함되지 않는 자전거 답사도 1회를 했습니다. 강과 하천은 만경강과 동진강 수계를 모두 28회에 걸쳐 답사를 마쳤습니다. 걸은 거리는 783.3㎞ 정도 됩니다. 새만금 독립 수역도 41.8㎞걸었습니다. 수로와 강, 하천을 모두 더 하면 1263.1㎞고 대략 3100리가 좀 넘는 거리입니다.

프레시안: 탐사를 언제부터 시작했으며 한 달에 몇 차례나 답사에 나섰나요.

김장근: 답사는 2022년 2월 19일부터 시작됐고 현재까지 총 48회 나갔으니 대략 한 달에 2~3회 정도입니다. 한번 나가면 평균 25~26Km 정도 걷습니다. 이외에도 수시로 차량답사, 등산답사 나가는 것까지 포함하면 거의 매주 1회 이상 나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의욕만큼 많이 나가지는 못 합니다. 학업(우석대학교 관광경영 박사과정)을 병행하고 있고 사회생활도 다양하고 왕성하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프레시안: 답사 중에 생긴 잊지 못할 에피소드가 있습니까.

김장근: 큰 에피소드 같은 것은 없었어요. 굳이 들자면, 대간선수로를 걷다가 나이 드신 농부 내외를 만나 인터뷰를 시도하였고 남자 어르신과 여러 가지 문답을 한참 주고받았는데, 옆에 계시던 여성분 표정이 점점 굳어지더니 느닷없이 “당신 누구야? 누군데 그런 것을 어디다 쓸라고 꼬치꼬치 물어?”하며 화를 내셔서 경을 치른 적이 있었습니다.

또 답사 사전조사를 위해서는 <전북농조88년사>라는 책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는데 지인의 도움을 받아 겨우 빌린 책을 보니 ‘마지막 남은 책이니 보신 후 꼭 반환해 달라’는 내용이 책 표지에 적혀 있었습니다. 1400쪽이 넘는 두꺼운 책이어서 겨우 특수 복사를 하고 돌려준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다른 지인이 제가 그 책을 찾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본인이 소장한 책을 기꺼이 내 주기도 해 많은 도움이 되기도 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축조된 수리시설 곳곳에는 당시 공사 책임자들의 휘호가 걸려 있다. 사진은 목천포천 잠관 입구에 새겨져 있는 박영철(당시 전라북도 참여관)이 쓴 공리주급(功利周及) 서판. ⓒ김장근씨 제공

프레시안: 수리시설 주변을 답사하면서 관리부실이나 여러 가지 아쉽다고 생각했을 것도 많았을 것 같습니다.

김장근: 아쉽다기보다 안타깝다고 해야 할까요. 현재 대한민국의 농촌 문제가 적나라하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수로 주변의 마을의 황폐화가 심각하고 정주 환경이 매우 열악하다는 것입니다. 흉·폐가 같은 빈집들이 곳곳에 방치되어 있고 마을 안에 빈 축사나 공장들도 있습니다. 쓰레기 문제도 매우 심각합니다. 치우지 않은 쓰레기가 여기저기에 있고, 생활쓰레기를 수로변에 버리거나 불태우는 곳이 비일비재합니다. 국가나 지자체의 공적 서비스가 매우 미흡한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둘째는 마을에 가보면 고령화 현상이 심각함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아이나 청장년을 만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대신 연세가 많으신 어르신들이 농촌을 지키고 농업을 영위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셋째는 수로 주변은 경작금지이고 또 농로 등으로 이용할 수 있는 상당한 여유 공간이 있는데 잘 관리되지 않아 보였습니다. 무단 경작이 많았고, 통행을 차단한 채 사적으로 부지를 이용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수로변의 부지나 도로가 관리되지 않아 잡목 등이 너무 무성하여 따라 걸을 수 없는 곳들도 많았습니다. 수로 내 오염 현상도 많이 있었습니다.

프레시안: 반면 답사를 하는 과정에 놀라웠던 점이나 대단하다고 느낀 점도 있었을 것 같은데요.

김장근: 준공된 지 100년이 넘거나 곧 다가오는 시설들인데도 여전히 현역으로 잘 작동하고 있는 것에 놀랐습니다. 이것은 관리기관의 부단한 개량과 유지 보수 노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농업용수 공급시스템이 매우 거대하면서도 또 정교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간선수로, 지선, 지거 그리고 용수로와 배수로, 다양한 수문(취입수문, 제수문, 분수문 등), 양수장 등의 거대한 수리시스템이 정교하게 작동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수로와 결합한 다양한 수리시설들 덕분에 이례적인 재난을 제외하고는 항구적인 풍년농사가 보장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프레시안: 답사과정에 새로운 것을 발견해 보람을 느낀 일도 있었습니까.

김장근: 풍년 농사를 가능하게 하는 호남평야의 근간인 전북 서부의 거대 수리시스템의 존재를 알린 것에 대해 보람을 느낍니다. 이런 물적 토대는 근대 농업유산 또는 수리 유산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들의 존재의의가 좀 더 부각됐으면 좋겠습니다. 새로운 발견도 있었습니다. 특히 일제강점기 때 처음 건설된 대간선수로와 김제.정읍 간선수로에 당시의 일본인 고위관리(일본인 도지사, 총독부 국장 등), 조선인 친일반민족행위자(박영철, 이진호)들의 기념 휘호가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답사와 연구를 통해 대부분 그 내용과 휘호를 남긴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김장근 전 NH농협은행 전북본부장이 동진강도수로 도보탐사에 나서 동진강 도수로탑을 촬영하고 있다. 이 탑에는 동진강 도수로 건설과정과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유시 등이 새겨져 있다.ⓒ프레시안

프레시안: 보통 답사에 앞서 사전 취재는 어떻게 이뤄지나요.

김장근: 지도를 보며 수로의 코스를 검토하고 인근의 수리시설이나 마을 등을 미리 보아 둡니다. 헛걸음을 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고 또 보아야 할 것은 꼭 봐야하기 때문입니다. 기본 정보는 인터넷을 통해서 하고 좀 더 구체적인 정보는 기관에서 발행한 ‘◯◯년사’를 참고합니다.

프레시안: 일반적이지 않은 분야여서 관련 자료를 다양하게 확보하는게 어려울 것 같습니다.

김장근: 자료를 구하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건설된 지 이미 상당한 시간이 경과했고 또 일제강점기여서 많은 자료가 유실된 것으로 보입니다. 일단 기본 자료는 <전북농조88년사>, <동진농조 70년사>와 같은 관리기관의 공식발간 자료입니다. 그리고 대간선수로의 경우는 이종진 선생님의 <만경강의 숨은 이야기> 정도가 책으로 나와 있습니다. 또 연구자들의 다양한 논문들을 검색하여 활용하였고, 농업 관련 정부기관이나 연구기관들의 비매품 책자나 절판된 책들을 중고책 시장에서 고가에 매입하여 공부하고 있습니다. 인터넷 검색도 도움이 됩니다. 일제강점기 때 자료도 있지만 언어장벽으로 인하여 만족스럽게 활용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자료들도 대개는 단편적이고 분산된 조각 정보들을 담고 있는 정도여서 늘 자료에 대한 갈증을 느끼고 있습니다.

▲김장근 전 본부장이 동진강 도수로 현장답사를 다니면서 촬영한 사진(아래)과 과거 통수식 사진을 같은 자리에서 촬영해 비교했다. ⓒ

프레시안: 기록에는 있지만 현장에서는 찾지 못한 유물이나 자료도 있겠어요.

김장근: 간선수로 곳곳에 공사관계자를 기록한 석판과 휘호가 있습니다. 그런데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들이 있고, 또 훼손이나 주변의 수목 등으로 제대로 판독하지 못한 것들이 있습니다. 역사를 제대로 복원하고 또 미래세대에 남겨주어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는 면에서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관리기관이나 지자체에서 나서서 체계적으로 이 일을 해 주셨으면 합니다. 꼭 찾고 싶었는데 아직 못 찾은 자료가 있습니다. 대아저수지나 경천저수지, 간선수로, 낙양보 등은 대규모의 토목공사이고 또 많은 인력이 동원된 난공사인데 어디에도 희생자에 대한 기록이 없습니다.

프레시안: 그동안 모은 답사 결과물은 어떻게 정리되고 어떻게 발표할 계획인가요.

김장근: 대개는 저의 개인 페이스북을 통해 답사기 형식으로 정리해 공개하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계획은 우선 공부를 더 심화시키는 것입니다. 근대농업유산 또는 근대수리유산이라는 관점은 아무래도 학술적인 연구가 필요하니 논문형식으로 정리될 수 있을 것이고, 이것이 완성된다면 차후에 대중서적으로도 발간할 수 있을듯 합니다.

프레시안: 전북의 근현대 수리시설을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제안한다면.

김장근: 농업용수 공급이라는 기본임무에 더하여 새로운 가능성을 예비하는 자원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역사자원, 문화자원, 관광자원, 생태자원 등 수로의 다원적 기능에 주목하자는 것입니다. 조금만 손보면 바로 가능한 것이 ‘수로 따라 걷기’나 ‘자전거 여행’ 코스 등이 될 것입니다. 또 큰 마을이나 도시 부근을 통과하는 구간을 친수공간화 또는 공원화 하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곳이 익산시 동산동 은하수로 구간입니다. 지자체와 농어촌공사 등이 협의하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장근 전 NH농협은행 전북본부장이 동진강도수로 도보탐사에서 만난 주민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프레시안

프레시안: 그동안 수리시설 답사로 얻은 가장 이점이 있나요. 일테면 건강이나 자료 획득, 지역에 대한 이해 등등.

김장근: 뭐 다 있다고 봐야겠죠. 그래도 공부한다는 기쁨이 제일 크지요, 또 지역을 더 잘 알 수 있게 되고 그러니 더 지역을 사랑하게 되기도 합니다.

프레시안: 답사에 대한 주변의 반응은 어떻나요. 가족들의 걱정도 있을 것 같습니다.

김장근: 한 번에 20~40Km를 걷는 것에 대해 이야기들을 많이 하고요, 페이스북에 올린 글의 양과 내용의 전문성에 대해 격려를 많이 해주십니다. 고정 팬들도 있어서 다음 이야기는 언제 나오냐고 기다리는 분들도 더러 계십니다. 물론 걱정하는 분도 있습니다. 주로 혼자 다니는 것 때문이죠. 아무래도 교통이 불편한 농촌지역으로 나가고, 걷는 거리도 장거리이고, 또 인적이 드문 곳을 혼자 다니니 안전 문제가 걱정이 되죠. 그래서 안전 장비를 추가하고 사전 준비도 꼼꼼히 하게 됩니다.

프레시안: 끝으로 그동안 도움을 준 분들에 대한 감사 인사 말씀을 드린다면.

김장근: 친절을 베풀어 준 농민들, 이것저것 묻는데 흔쾌하게 답변해 주신 마을 주민들이 제일 고맙죠. 또 그동안 시설을 잘 관리해 준 기관의 관계자들 노고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한국농어촌공사에서는 귀하게 보관하고 있는 <전북농조88년사>와 <동진농조70년사>를 빌려 주셔서 답사에 절대적인 도움을 받은 바 있었습니다. 모든 분들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김장근 전 NH농협은행 전북본부장이 동진강도수로 도보탐사에 나서 도수로를 걷고 있다.ⓒ프레시안

◇ 김장근 전 본부장은?

1964년생으로 전북 전주시 효자동 출생. 전주신흥고와 우석대학교를 졸업한 뒤 기갑장교로 군 복무 후 농협중앙회 입사. 주로 전북에서 일하다가 간부 직원이 되어 전주·완주 농정국장, 임실군지부장, 본사 언론국장, 홍보국장, 농협은행 전북본부장을 역임했고 본사 상호금융 자금부장을 끝으로 퇴직. 재직 중 전북대에서 경영학 석사취득 및 서강대 금융MBA와 서울대 금융ABP 과정 수료. 퇴직 후 우석대학교 관광경영학과 박사과정에 입학해 올해 수료. 농협 재직 중에는 폭넓은 대인관계와 업무추진 능력, 성과 창출 능력을 인정받아 기획, 총무, 경영지원 등 주요 보직을 거쳤으며 NH농협생명변산수련원 건립사업 과정에 총괄 책임을 맡아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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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홍

전북취재본부 김대홍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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