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영희, 개인이 곧 역사인 삶

[다시! 리영희] 스승 없는 세상, 그이가 그립다

2007년 어느 봄날 리영희 선생이 "이제 더는 집필이나 독서가 불가능하니 책들은 인근 도서관에 기증할 예정인데, 민주화운동과 관련된 개인 자료들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 기증하고 싶으니 가지고 가라"고 내게 연락하셨다. 상고이유서나 사면장, 복권통지서 등 민주화운동 과정에 선생이 투옥되며 만들어진 자료와 그가 교류했던 외국기관이나 개인과의 서신이 대부분이었다. 댁에서 가져온 문건들을 살피다가 한 장의 엽서가 눈에 띄었다. 앞면엔 1977년 12월 30일 광화문우체국 소인과 '검열필'이 찍힌 엽서의 발신인 리영희 옆에 수인번호 '3710'이 괄호 안에 쓰여 있었으며 주소는 당시 서울구치소가 위치했던 서대문구 현저동 101이었다. 지금은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이 된 자리다. 그런데 보낸 이와 받는 이가 특이하게도 모두 '리영희'였다. 읽어 보니 그가 감옥에 갇혀있던 동안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어머니를 못내 그리며 어머니께 보낸 짧은 글이었다.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어머니 영전에 바칩니다. 평소에 불효자식이더니 끝내 세상을 떠나시는 자리에서 임종도 못한 죄인이 되었으니 한(恨)만이 앞섭니다. 어디로 간다고 말씀도 드리지 못한 채 집을 나와 지금 이곳, 몸의 자유를 잃고 있는 그동안 어머니가 아들을 찾는 소리와 그 몸짓을 늘 듣고 보는 듯하였습니다. 좁은 방속에 주어지는 음식과 과일을 고이 놓고 멀리서 하루 세 번 어머니의 명복을 비오니 부디 극락 가셔서 먼저 가신 아버지를 만나 영원히 행복하시옵소서."

선생은 평소 주로 만년필로 글을 쓰셨는데 유장한 달필이었다. 눈물로 얼룩진 그 엽서를 읽으며, 나는 세상을 떠난 나의 아버지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임수경 방북사건으로 공개수배를 받기 이전부터 독일에서의 활동으로 인해 이미 공안당국의 주시를 받던 나는 아버지가 숙환 끝에 돌아가셨는데도 귀국하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굴렀다. 그때가 1989년 봄이었는데, 불효자의 심정을 어찌하지 못하며 많은 날을 눈물로 지낸 경험이 있기에 그 엽서에 담긴 선생의 애끊는 마음을 조금은 가늠할 수 있었다.

리영희, 개인이 곧 역사인 삶

당시 내가 보았던 그의 적지 않은 법정자료들은 그대로 한국 민주주의의 수난사를 의미한다. 리영희 선생의 표현에 따르자면 '반문화적 권력의 박해'에 대한 확실한 물증이다.

민주화운동 관련 사료들이 그렇듯이, 리영희 선생의 그것이야말로 한 때 이 나라의 권력층과 그들이 만들어 낸 체제에 길들여진 의식 없는 사람들의 편견의 역사이기도 하려니와, 리영희 선생의 파란 많은 사회적 행적의 증언인 셈이다.

그가 남긴 삶의 궤적을 새삼 언급한다는 것은 객쩍은 일이다. 그는 평생을 언론인과 학자로서 살았다. 사람들은 그를 '행동하는 지성' 또는 한 단어로 뭉뚱그려 '자유인'이라 일컫는다. <자유인>은 그가 1990년 상재(上梓)한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자유인이면서 동시에 그는 사표(師表) 없는 시대의 진정한 스승이었으며 참된 지식인이었다. 모두가 숨죽이고 자신의 생존만을 지키기에도 어려운 시대에 그가 쓴 기사 한 줄과 그의 책 원고 한 획 한 획은 그대로 살아있는 사자의 포효였고, 한 시대의 우뚝 선 좌표였다. 동시에 그는 불의와 독재에 맞서 싸우는 저항인, 즉 '호모 레지스탕스'의 전형이었다.

▲독일에서의 벗들과 함께 산본의 수리산 기슭에서 리영희 선생 윤영자 여사와 함께 찍은 사진. 뒷줄 오른쪽 두 번째가 필자 어수갑. 이렇게 함께 모이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고 한다. ⓒ리영희재단

반공법과 국가보안법이라는 법망

우리가 친미와 반공으로 세뇌 받고 무장되었을 때, 그리하여 지금 더는 사용하지 않거나 존재하지 않는 이름인 '중공'이나 '월맹'을 타도해야 할 원수의 나라 정도로 생각하고 있을 때 그가 <8억 인과의 대화>나 <전환시대의 논리>로 우리 사고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일으킨 것은 세상이 아는 바다.

그런 그가 영어(囹圄)의 몸에서 벗어나 잠시나마 자유로웠던 시기에 독일(당시 서독) 하이델베르크에 소재한 개신교 연구소의 초청으로 독일에서 잠시 거주했다. 그의 나이 57세였다. 원래 이글은 리영희 재단의 요청으로 그의 독일 체류 당시 오고 간 서한 등 현존하는 문서의 해제를 통한 리영희 선생의 당시 행적을 구체적이고 실증적으로 알리고자 함을 목표로 한 서술이 되었어야 했다. 그러나 워낙 오래된 일이고 기억의 망실에 따른 주관적 재단의 위험 때문에 주어진 자료를 바탕으로 아는 만큼만 밝히도록 한다.

리영희 선생이 임헌영 선생과 대담 형식의 자서전 <대화>에서 독일 체류 중에 교류했던 이들의 이야기를 하시면서 "독일 각지의 유명 대학에서 유학 중이던 정범구, 유재찬, 박상환, 어수갑, 박호성....등 많은 학생들이 찾아오기도 하고, 많은 간담회에서 토론이 있었지. (615쪽)"라는 글이 재단 관계자가 필자에게 원고를 부탁한 이유가 아니었을까 추측해본다.

원래 독일 측에선 이미 1984년 가을부터 리영희 교수 초청 계획이 있었다. 실무 책임자였던 크리스티네 리네만 박사가 연구소 이사회에 제출한 보고서의 내용을 보면, 제3세계(당시 우리나라는 제3세계에 속해 있었다) 학자들을 초청하여 평화세미나를 개최하려는 시도의 일환으로 리영희 선생을 초청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유럽의 지속적인 평화 확보 노력이 극동지역에 미치는 영향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그녀는 리영희 교수의 논문 '한반도 주변 정세의 질적 변화와 우리의 과제'가 이미 독일어로 출판되었음을 상기시켰다.

그리하여 하이델베르크 소재 개신교 학술연구소(Forschungsstatte der Evangelischen Studiengemeinschaft, FEST) 소장인 클라우스 폰 슈베르트 교수가 1985년 4월 1일부터 1985년 9월 30일까지 그를 초청했다. 하지만 당시는 오늘날처럼 서신 연락이나 출입국이 쉬운 시절이 아니어서 공식 초청장을 수령하고 준비하지 못한 상태인 1985년 2월 1일, 그는 일단 먼저 계획한 도쿄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의 초청에 따라 일본길에 오르게 된다. 일본에 도착한 후 뒤늦게 독일과 연락을 취하고 일정을 조정한 끝에 그는 6월 2일에야 일본을 떠나 독일 여정에 오르게 된다.

리네만 박사는 그에게 "1983년에 발표된 이른바 '하이델베르크 평화 보고서'에는 핵 억제 전략과 그것이 분단된 유럽 지역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분석이 담겨 있습니다. (해당 보고서의 영문 사본을 받으실 예정입니다.) 평화 보고서와 FEST의 다른 활동들에서 우리가 고려한 것은 동서 갈등과 유럽의 전쟁과 평화와 관련된 질문으로 한정되어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유럽의 관점을 극동지역과 같은 세계 다른 지역에서 군사적 수단을 통해 평화를 보장하려는 전략과 연관시키고자 합니다. 고립된 '팍스 에우로페아(Pax Europaea)'가 극동 지역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은 무엇인가? 미국과 소련이라는 슈퍼파워와 관련하여 동북아시아의 상황은 유럽의 상황과 어떻게 비교될 수 있는가? 리 교수님은 '한반도 주변 정세의 질적 변화와 우리의 과제'라는 글에서 이러한 질문들을 다루셨습니다. 동북아시아에서 군사적 수단으로 평화를 보장하는 문제를 분석하여, 미국과 소련의 갈등이라는 주어진 상황에서 유럽과 극동 평화의 연계성에 대해 FEST에서 논의 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며 제3세계 및 반-산업화 국가들의 개발 문제와 관련해 현재 진행 중인 연구에 조언을 기대하면서 체류기간 동안의 학문적 성과를 위한 구체적인 제안을 한다.

그에 따르면 "연구소가 한 달에 1500마르크 (총 6000마르크)를 지급하고, 이 금액에서 체류기간 거주할 아파트 월세로 매달 250마르크를 지불해야 하는데, 아파트는 하이델베르크의 좋은 지역에 위치해 있으며 2와 1/2 개의 방, 주방 및 욕실이 있었다."

독일에서의 호시절

필자는 독일에 온 1981년 첫 한 학기를 하이델베르크에서 지냈기에 지금도 그곳이 눈에 선한데, 800년 된 하이델베르크 대학을 아우르는 높은 지역에 붉은 사암으로 만들어진 옛 성이 보이는 네카 강변 옆 '철학자의 길'이라 일컫는 곳 가까이에 있던 주변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곳에 그이의 거처가 있었다. 동료 유학생들과 함께 찾아가 선생께 술도 얻어 마시고 토론도 하며 여행도 했다. 한번은 박재일 선생을 뵈러 리 선생 등과 함께 내 작은 차로 암스테르담까지 갔다. 한살림 운동을 했던 인농 박재일 선생은 마침 암스테르담 근처 로테르담에 위치한 농업 관련 연구소에 체류 중이라 리영희 선생을 포함한 몇 분들과 관광 겸 그를 만나러 간 것이었다. 때마침 거리를 지나가던 카니발의 무리에 섞여 벽안의 미녀들에 둘러싸여 춤까지 추셨던 선생의 장난기를 이젠 더 뵐 수가 없다.

그가 독일 생활을 마치기 전인 1985년 7월 12일부터 16일 동안 베를린과 함부르크를 방문하고 클라우스 폰 슈베르트 연구소장에게 보냈던 같은 해 7월 18일자의 보고서 형식 글을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중부 독일의 대학도시 기센에서 7월 12일 금요일 저녁부터 13일 토요일 오전까지 기센, 마르부르크, 프랑크푸르트 지역의 한국 유학생들과 만나 그들이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 완화 진전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과 수단 등을 토론했다. 그리고 같은 날 북부독일에 위치한 함부르크로 가서 함부르크 한인교회의 박명철 목사 및 한인 교인들과 만나 현재 한국 상황을 주제로 연설했다. 다음날인 7월 14일엔 베를린으로 넘어와서 과거 나치 잔재, 도시의 분단 상황, 제2차 세계대전의 흔적을 중심으로 서베를린을 시찰하고 펠트 목사가 주관하는 독일아시아선교센터에서 교민과 교인들을 만나 강연했다.

다음 날인 7월 15일에는 한국 민주화운동을 물적으로 꾸준히 지원했던 개신교 수장인 샤프 주교를 그의 집에서 만났다. 쿠르트 샤프 주교는 독일개신교교회협의회 의장이자 베를린 및 브란덴부르크 주의 주교로 에큐메니칼 운동을 주도했했으며 평소 한국의 민주화운동에 많은 관심을 보인 분이다. 그는 "1)한국의 전반적인 상황, 2)인권운동의 진흥을 위한 한국교회의 활동, 3)북한의 '개방' 정책 진전 평가, 4)북한 주민 간 기독교 봉사의 존재에 관한 정보, 5)한국의 야당 정치지도자 김대중과 민중신학자 안병무 박사의 근황, 6)FEST 프로그램 종료 후 본인(리영희)의 귀가에 위험이 있는지 여부, 7)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서울 활동현황, 8)서독교회가 한국의 민주화와 인권을 위한 투쟁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분야, 9)남북대화의 진전, 10)FEST와 독일에 대한 본인(리영희)의 느낌"을 물어보았다.

선생은 또 최근 한반도 정세 전개를 주제로 베를린 자유대학 교수 및 제3세계 저널 <페리페리(Periphery)>편집위원들과 토론했다. 마지막으로 그가 독일을 떠나면서 초청단체에 남긴 논문은 '한국의 전쟁위기와 평화의 전망'이었다.

훗날 생각해보니 그에게는 혹 그때가 잠시 다가온 인생에서의 호시절이 아니었을까. 4년 후 그는 <한겨레신문> 창간기념으로 북한취재단 방북을 기획했다는 이유로 환갑을 앞두고 또 구속되는 수모를 겪는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보관하고 있는 서대문형무소에서 써서 집으로 보낸 리영희의 어머님 임종 소식을 접한 후의 엽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그로부터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그는 꾸준히 왕성한 집필과 강의로 균형 잡힌 지적 인식욕에 늘 목말라했던 이 땅의 지식인들에게 생각의 지평을 넓혀주었다. 그의 글(말)만큼 명확한 근거와 진실만이 가질 수 있는 도도함을 견줄 만한 게 드물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갑자기 찾아온 뇌출혈로 인한 우측 반신마비로 그의 활발했던 활동은 중단된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형형한 눈빛으로 시대의 전조를 꿰뚫고 예언자와도 같은 모습으로 우리 안에 우뚝했고 어디로 가는지조차 모르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를 때론 준엄히 가르치고 때론 자애롭게 다독였다.

내가 우여곡절 끝에 귀국하여 당시 이사장이었던 함세웅 신부의 권유로 기념사업회에 발을 디디게 될 때, 경기도 산본의 수리산 자락에 위치한 선생의 자택을 찾아뵈었다. 마비되어 운신조차 힘든 몸을 가눠 떨리는 글씨로 추천서를 써주셨으니 그 일을 어찌 한시라도 잊겠는가.

선생은 격변의 역사를 살아오느라 헤진 몸과 마음을 추스르며 조용히 생의 여적(餘滴)을 누리시던 중 2010년 겨울 간경화로 세상을 떠났다. 지나간 반이성의 시대를 정의롭게 살아가길 꿈꾸었던 모든 이들의 정신적 사표였던 리영희 선생. 그이의 빈자리가 너무도 크다. 스승 없는 세상, 향방 잃은 우리. 거짓과 온갖 반동적인 광풍이 휘몰아치는 세상, 그이가 몹시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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