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와 오빠 친구 상만이는 친구가 아니랍니다

[시로 쓰는 민간인학살] 충남 부여지역 민간인학살사건

우리의 현대사는 이념갈등으로 인한 국가폭력으로 격심하게 얼룩지고 왜곡되어왔습니다. 이러한 이념시대의 폐해를 청산하지 못하면 친일청산을 하지 못한 부작용 이상의 고통을 후대에 물려주게 될 것입니다. 굴곡진 역사를 직시하여 바로잡고 새로운 역사의 비전을 펼쳐 보이는 일, 그 중심에 민간인학살로 희생된 영령들의 이름을 호명하여 위령하는 일이 있습니다. 이름을 알아내어 부른다는 것은 그 이름을 존재하게 하는 일입니다. 시간 속에 묻혀 잊힐 위기에 처한 민간인학살 사건들을 하나하나 호명하여 기억하고 그 이름에 올바른 위상을 부여해야 합니다. <프레시안>에서는 시인들과 함께 이러한 의미가 담긴 '시로 쓰는 민간인학살' 연재를 진행합니다. (이 연재는 문화법인 목선재에서 후원합니다) 편집자

오빠와 오빠 친구 상만이는 친구가 아니랍니다

해코지 당할라 그 근처에는 가지 마러

할머니는 귀한 손자에게 올해도 신신당부를 했습니다

오빠 친구 상만이는 수업시간에 실패한 인간의 자세에 대하여 발표하고 칭찬을 받았다고 합니다 상만이는 사리문 밖을 나가지 않는 할아버지가 몸을 낮추고 낮추어 구부정하게 허리를 굽혀 하늘을 쳐다보지 못하고 땅만 바라본다고 했습니다 마당을 서성이는 자세가 할아버지 옆으로 탱크가 아홉 번 지나간 후 생겼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할머니도 상만이 할아버지도 일어서기 위해서는 몸을 낮춰야 한다고 말합니다

할머니와 상만이 할머니는 고사리를 꺾으러 산에 가고 빨래하다가 냇가에서 허연 허벅지를 내놓고 장난치는 사이였답니다 공깃돌 놀이는 우리 할머니가 잘했고 전기수처럼 이야기는 상만이 할머니가 더 잘했답니다 일제 치하에서도 끌려가지 않고 시집가서도 윗마을 아랫마을에 살면서 자식들을 순풍 순풍 낳았답니다

없어유 아부지 없나유 아무도 없슈

아부지 대답 좀 해 봐유 찬이가 왔슈 찬이가 아부지

열일곱 살 소년은 서대전 형무소 곳곳을 다니며 외쳤습니다. 외침은 소리 소리들에 묻혔습니다 시신이라도 찾겠다는 사람은 부여에서 온 아버지 일행만이 아니었습니다 인근 야산으로 우물로 시체가 채이고 시체를 넘었지만 시체만 있을 뿐 할아버지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소년의 눈에는 하늘도 땅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총살은 가장 좋은 죽음이었다고 누군가 말했습니다 곡괭이로 찍어 죽이고 산 채 우물에 처넣었다는 피비린내 나는 소리는 소년의 평생을 따라다녔습니다

이데올로기는 피해자와 피해자만 남겨놓았습니다

할아버지는 부여 민간인 000명과 함께 서대전 형무소로 끌려가서 돌아오지 못했고 상만이 할머니는 소문이 온몸을 덮쳐 뒷산 소나무가 거두었다는 또 다른 풍문이 떠다녔습니다

오빠와 오빠 친구 상만이는 서로를 친구라 부르지 못했습니다 같이 뜀박질하고 같이 노래 부르고 같이 교실청소를 했지만 함부로 내뱉지 못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6·25가 끝나고 강산이 변한 후 태어난 아이들도 주홍글씨처럼 새겨져 내침을 당했습니다 단단한 경계 사이에 일면식도 없는 사이로 소문을 만들어야했습니다

▲ 반공순국애국지사추모비. 2차 민간인 희생자 부여군 000명에 대한 추모비가 부여읍 동남리 남령근린공원에 세워져 있다.Ⓒ이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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