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치를 오독한 대통령이 포퓰리즘과 만날 때

[이관후 칼럼] 윤석열 정부 '법치주의' 실체

윤석열 정부는 어떤 정부인가? 지난 1년 여간 사람들의 입에 가장 많이 회자된 것은 '검찰 공화국'이다. 무엇보다 전 정부의 검찰총장이 곧바로 야당의 대선후보를 거쳐 대통령이 되었다는 사건이 상징적이다. 검찰 공화국의 현상적 실체는 검사 출신들이 국가권력을 장악했다는 주체의 측면에서 직관적으로 이해된다.

구체적으로는 지난 3월 참여연대가 발표한 대로, 대통령실을 포함해 국가의 주요 요직에 130여명이 넘는 검찰 출신이 포진한 점이 두드러진다. 지난해 말 주요 국정과제 중 3대 개혁으로 지목한 교육, 노동, 연금 분야의 핵심 공직에 검찰 출신이 차례로 임명되었다는 사실도 눈에 띈다. 이 정부는 정치를 작동시키는 데 적합한 통치의 주체로 확실히 검찰 출신을 신뢰하고 있는 것이다.

주체의 성격이 그렇다면 그것이 발현되는 방식은 무엇일까? 정부는 그 실체를 '법치주의'라고 강조해 왔다. 윤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자유가 대한민국의 정체성임을 강조했다. 그렇다면 윤석열 정부는 스스로를 '자유를 법치주의로 확립하는 정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은 자유의 적은 '반지성주의'이고, 이를 방지하고 '모두가 자유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공정한 규칙을 지켜야'한다고 강조했다.

여기서 공정한 규칙을 잘 지킨다는 것의 내용은, 지난해 말 화물연대 파업에 정부가 대처하는 방식과 올해 초 신년사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화물연대 파업에 대해 정부가 대처한 방식은 취임사에서 짧게 언급한 '양극화와 사회갈등'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자유가 대신 정치를 배제한 채 준법만을 강조함으로써 합법과 불법의 이분법으로 문제에 접근하는 것이었다.

신년사에서는 '노사 법치주의'가 '노동개혁'의 출발점이라고 밝혔다. 그 결과는 엊그제 우리가 본 그대로다. 민주노총의 집회를 앞두고 경찰청장은 기동복을 입고 회의에 참석했다. 심지어 '캡사이신 분사'라는 구체적인 진압 방법을 공개적으로 거론했다. 캡사이신 분사를 언급하면서도 '강경 진압'이라는 용어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다고도 했다.

같은 날 경찰은 농성 현장에서 한국노총 간부를 연행하면서 과도한 공권력을 행사했다. 금속노련 위원장을 아스팔트 바닥에 쓰러뜨리고 뒤로 수갑을 채웠고, 농성장에 혼자 있던 사무처장을 곤봉으로 구타해서 피투성이로 만들었다. 노동조합의 간부들을 살인·강도를 저지른 중대범죄자를 현행범으로 체포하듯이 다룬 것이다. 경찰은 상황이 위험했다고 주장했지만, 현장 영상을 공개한 것은 오히려 노조측이다.

사실 이번 민주노총의 집회는 어느 정부를 막론하고 노동 관련 쟁점이 있을 때마다 관성적으로 열리던 집회 중의 하나일 뿐이다. 그것이 너무나 '관성적'이라서 정치적으로 올바른 선택인지에 대해 논란이 있고, 또 시민불편의 차원에서 문제가 된 적은 있다. 그러나 이것이 어느 민주국가에나 보장받아야 하는 노동조합의 기본적 권리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핵심적인 질문은 이런 것이다. 윤석열 정부의 '법치주의'란 무엇이고, 왜 이것을 작동시키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월 26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법무부·공정거래위원회·법제처 등에 대한 업무보고에 한동훈 법무부 장관, 이원석 검찰총장 등과 함께 입장하고 있다. ⓒ연합뉴스

법에 따른 통치 vs 법을 활용한 통치

최근 윤석열 정부의 법치주의와 관련해 아주 흥미롭고도 핵심적인 문서가 하나 확인되었다. 한상희 참여연대 공동대표는 법무부가 '검수완박'법에 대한 권한쟁의심판 청구서에서 이 정부가 법치주의를 정의한 대목을 공개했다. 법무부는 이 법이 법치주의의 원칙을 위배했다면서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법치주의는 법에 의한(rule by law) 통치를 의미하는 개념으로서 오늘날의 법치주의는 단순히 국가가 법률의 구속을 받는 것을 넘어 법률을 비롯한 입법·행정·사법 등 모든 국가행위는 그 내용 역시 정당해야 하며 사회정의 실현에 그 목적을 두어야 한다는 원칙…"

과문한 탓인지 모르겠으나, 정치학이나 법학 교과서에서 법치주의를 '법에 의한 통치(rule by law)'로 정의한 것을 보지 못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법치주의는 대체로 법의 통치(rule of law)로 이해된다. 법치주의는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국가의 권력을 법으로 제한한다는 민주적 헌정주의와 제한정부의 원리다. 그래서 이 법치주의는 국가의 적극적인 공권력 집행을 통한 질서를 확립한다는 식의 통치 이데올로기와는 거리가 있다.

종종 특정한 맥락에서 법치주의가 '법에 의한 통치'로 불릴 때가 있다. 이 때의 용법은 '법치(法治)'가 '인치(人治)'와 구별될 때다. 이 때의 인치는 단순히 사람의 통치가 아니라, 통치자 개인이 아무런 기준 없이 다스리는 '자의적인 통치'를 말한다. 그래서 여기에 대응되는 법치를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법에 따른 통치'가 된다. 그리고 이 맥락은 '법치주의(rule of law)'와 상통한다.

법치주의를 우리말로 '법에 의한 통치'라고 쓰면서 'rule by law'라는 표현을 강조했다면, 그 의도는 하나다. 법치주의를 '법을 활용한 통치(rule by law)'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식의 개념에 대해서 세계적으로 많은 연구자들은, 종종 사법만능주의로도 해석되는 '법률주의(legalism)'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법률주의와 기술관료-포퓰리즘

사실 윤석열 정부의 '법치주의'는 법을 활용한 통치나 법률주의라고 부르기에도 애매한 대목이 있다. 이 통치에서 강조되는 것은, 실은 법 자체가 아니라 법의 해석과 적용권한을 가진 자의 권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법치는 오히려 '법률가 통치(rule by lawyer)'나 '검사 통치(rule by prosecutor)'라고 불러야 더 적절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런 '법률주의'를 어떻게 정치적으로 이해해야 할까? 단순히 윤석열이라는 개인의 출현으로 인해 한국에서만 우발적으로 나타난 예외적인 현상일까? 물론 그런 측면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적 맥락과 보편적 차원에서의 정치현상의 측면을 이어보면 적어도 하나의 흐름이 존재한다. '기술관료-포퓰리즘(Technocrat-Populism)'이다.

우선 법률주의는 포퓰리즘에서 자주 활용되는 정치 전술이다. 법률주의는 포퓰리즘이 가진 정치적 비전의 결핍과 불명확한 이념적 지향성을 덮을 수 있는 유용한 정치적 수단이기 때문이다. 포퓰리즘적 집권세력은 수사와 기소라는 사법적 수단을 통해서 다른 정치세력을 정치의 장에서 배제함으로써 정치적 논쟁과 타협을 효과적으로 회피할 수 있다.

즉, 자신의 정치적 미숙함을 법률주의 전략으로 압도함으로써 사법적 논란 이외에 다른 정치적 쟁점이 등장할 계기를 아예 만들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정치와 관련한 사법적 수사의 빈번함을 통해 정치혐오 정서를 강화시키면서, 정치 자체를 순수하게 중립적인 어떤 것으로 변질시키는 반정치적 기획이기도 하다. 포퓰리즘과 법률주의의 결합은 이렇게 정치의 종결을 가져온다.

기술관료주의 역시 전통적으로 포퓰리즘과 연관성이 높다. 포퓰리즘 자체가 반정치적 성격을 가지면서, 정치 엘리트들을 배제하고 '중립적인 전문가'를 그 대안으로 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중립적 전문가의 신화는 한국에서 오랫동안 '공무원 관료'에게 투영되곤 했다.

실제로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직후 임명한 차관인사에서 20명 전원을 남성으로 임명하면서 18명을 50대의 관료출신으로 채웠다. 첫 내각에서 장관 후보자 18명 중 15명이 남성이었고, 서울대 출신이 9명으로 절반을 차지했다. 명분은 '일하는 실력'이었다. 이후에는 검찰 출신의 약진이 두드러진다.

그래서 윤 정부가 행정고시 출신들을 행정부처의 전면에 배치하고, 사법고시 출신들인 검사들이 정부 고위직을 사실상 독점하는 현상은, 기술관료-포퓰리즘의 한 유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본인처럼 '시험'을 거쳐서 선발된 행정과 사법 엘리트들로 운영되는 국가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 중 더 핵심적인 역할은 더 어려운 시험을 통과한 '검사'들에게 부여된다.

이처럼 윤석열 정부는 법률주의를 기반으로 한 검찰 중심의 기술관료-포퓰리즘을 통치수단으로 적극 활용하고 있다. 수사와 기소가 가장 핵심적인 정치적 수단이며, 이것이 정책에 투영되면 공권력의 적극적 활용을 통한 억압적 사회 통제로 나타나게 된다. 말 그대로 '법과 질서(law and order)'를 통한 자유의 확립을 지향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도 우리 국민이 선택한 하나의 통치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법과 질서라는 것은 대체로 민주국가에서 법무부의 역할이지 정부 전체의 역할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법무부의 역할이 국가 전체의 역할과 비전이 되면, 아마도 그 국가의 성격은 대통령이 천명한 '자유민주주의'에서 크게 벗어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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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후

16대, 17대 국회에서 보좌진으로 일하고, 영국 런던대학교(UCL)에서 '정치적 대표'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와 경남연구원에서 일하고, 행정안전부 장관정책보좌관, 국무총리 메시지비서관을 지냈다. 정치의 이론과 현실에 모두 관심이 있다. 건국대 상허교양대학 교수로 있으며, <프레시안>을 비롯해 <경향신문>, <한겨레>, <피렌체의 식탁>에 칼럼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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