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는 민주주의를 어떻게 망치는가?  

[인문견문록] 마이클 샌델의 <당신이 모르는 민주주의>

철학자 마이클 샌델의 책을 오랜만에 읽었다. 원래 영어 제목은 <민주주의의 불만(Democracy's Discontent)>이다. 책 이름부터 범상치 않다. 샌델은 미국 민주주의가 정상괘도에서 이탈했다고 판단한다. 미국은 상당 기간 민주주의 그 자체였다. 그러나 국회의사당 폭동 등을 복기해본다면 미국 민주주의가 심각한 위기에 처한 것을 알 수 있다. 트럼프에 대한 검찰의 기소는 봉합될 수 없는 갈등이 미국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어쩌다 상황이 이렇게 되었을까? 샌델은 민주주의가 이렇게 타락하게 된 과정을 찾아 나선다.

샌델은 미국 사회에 팽배한 불만을 두 가지로 정리한다. 첫째는 "개별적으로나 집단적으로 각자의 삶을 지배하는 힘의 통제권을 잃어가는 것"이다. 둘째는 "공동체의 도덕적 결속이 느슨해지고 있다"는 인식이다. 미국 대중들이 이런 불만을 가지게 된 원인을 샌델은 미국 사회가 '공공철학'을 비판적으로 성찰하지 않아서라고 생각한다. 공공철학은 "우리가 실천하는 행동에 내재된 정치 이론, 즉 시민의식과 자유에 대한 여러 가정들"을 의미한다. 달리 말하면 사회에서 암묵적으로 승인되어 개인의 행동의 근거가 되는 정치철학관이 공공철학이다. 우리는 미국의 민주주의를 수백년간 단일한 개념이었던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샌델은 미국민주주의가 공화주의라는 초기 이념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나왔다고 본다. 공화주의는 시민의 소유적 자유, 개인적 선택의 자유보다 덕성(德性)을 보유한 시민의 참여가 더 중요하다고 보는 사상이다. 샌델이 심중에 두는 정치는 미국 건국의 아버지이자 제3대 대통령이었던 토머스 제퍼슨이다. 그는 제퍼슨으로부터 이야기를 풀어간다.

미국에서 자유는 건국 초기부터 중요한 이념이었다. 또한 자유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특정한 방식의 물적 토대가 필요했다. 건국의 아버지이자 제3대 대통령이었던 토마스 제퍼슨은 농업적 삶의 방식이 자치에 적합한 도덕적 시민을 만든다는 것을 이유로 거대제조업의 진흥을 반대했다. 오늘날의 상식과 다르다. 왜 이렇게 생각했을까? 그에 따르면 대규모 제조업은 공화주의 시민의식의 전제조건인 독립성을 약화시키기 때문이다. 제조업이라는 거대 조직 속에서 독립성이 퇴화한 시민들로서는 미국 민주주의의 핵심인 자치를 수행해나갈 수 없다고 제퍼슨은 판단했다. 제퍼슨은 "자유에는 자치가 필요하고 거꾸로 자치는 시민적 덕목에 의존한다는 발상이 공화주의의 핵심"이라 생각했다. 이런 생각은 제퍼슨만의 것은 아니었다. 발명가이자 사상가로 잘 알려진 벤저민 프랭클린도 "오로지 적절한 소양을 갖춘 도덕적 사람만 자유를 누릴 역량을 가진다"고 했다. 이런 생각은 당시에는 양식 있는 이들의 상식이었다.

'시민의식의 정치경제학'이라 샌델이 칭하는 국민의 삶을 우선시하는 공화주의 모델은 또 다른 건국의 아버지 알렉산더 해밀턴에 의해 거부된다. 해밀턴은 연방정부 차원에서의 재정정책을 수립했고 대규모 제조업을 부흥시키려 했다. 해밀턴은 기업 보조금정책을 긍정했다. 이런 정책은 공화주의자들에게는 부정부패를 만연케할 위험한 것이었다. 당시의 공화주의자들은 소작농이 아닌 자작농에 의한 자치가 수행되는 공동체를 공화주의적 이상으로 생각했다. 토크빌이 감동했던 미국 민주주의는 소규모 마을인 타운에서 수행되는 참여민주주의였다. 그러나 자본주의라는 해일이 미국을 덮쳤다. 제퍼슨식 모델은 밀려나고 해밀턴의 비전으로 사회는 점점 변해 갔다. 이에 따라 물질적 성장만이 가장 중요한 것이 되었다.

변화의 와중에서도 경제적 독립성이 시민의식의 필수적 전제조건이라는 데에는 많은 이가 동의하고 있었다. 이때의 '경제적 독립성'은 우리가 생각하는 독립성과는 다른 개념이다. 19세기 내내 임금노동은 임금노예제라 불릴만큼 인간의 독립성을 저해하는 시스템으로 부정당하곤 했다. 존 콜드웰 칼훈같은 논객들은 북부의 자본주의적 임금시스템을 노예제보다 더 나쁜 제도라며 경멸했다. 그들은 노예에게 제공되는 평생 고용과 기본적 복지가 북부 임금노동자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남부노예제 이론가였던 조지 피츠휴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은(북부기업가-필자주) 노예소유주이다. 그런데 노예주이면서 노예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 노예주에 불과하다." 

경제적 독립이란 자작농을 의미했다. 당시에는 임금노동에 대한 대중적 반감이 상당했다. 자본주의가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임금노동에 대한 심리적 저항이 사라져야 했다. 친자본적인 임금노동 옹호론자들은 남북전쟁 이후 '자유노동'이라는 시민적 개념을 폐기하기 시작했다. '자유노동'은 누군가의 속박을 받지 않으면서 노동할 수 있는 권리를 말했다. 시민의 권리로서의 '자유노동'은 어느새 일자리를 선택할 자유로 의미가 축소되었다. '자유노동'을 대신해 '자발주의'란 개념이 도입되었다. 이제 노동도 고용주와 피고용인 사이에 맺어진 자발적 계약의 산물로 포장되었다. 친자본측은 이런 노동계약이 기존의 '자유'개념과 부합한다고 선전했다. 1895년 발생한 로크너 사건이 계기였다. 뉴욕주 제과점주였던 로크너는 당시 1일 10시간 주 60시간을 초과할 수 없다는 뉴욕주의 법을 위반해 벌금형을 받았다. 로크너는 강제가 전혀 아니었고 종업원과의 상호합의였다고 항변했다. 연방대법원은 로크너의 편을 들어 뉴욕주 법이 계약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판결했다. 계약의 자유가 시민의 온전하고 독립적 삶보다 더 중요한 가치로 선포되는 전환점이었다.

노동에서의 '자발주의적 계약'이라는 관념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자발주의적 자유관'으로 확장된다. 이런 자유관은 '자발주의적 자아상'에서 기원한다. 샌델에 따르면 자발주의적 자아상은 "자신은 무엇이든 자유롭게 선택하는 독립적 자아"라는 생각이다. 이런 자아상은 20세기 중반 이후 주류의 위치에 오른다. 샌델은 자발주의적 자아상 덕분에 복지국가와 개인의 권리확대라는 소중한 성과가 가능했다고 판단한다. 이런 자아상과 자유관은 자유주의(liberalism)와 상호 공명한다.

이런 자아상, 자유관, 자유주의 덕분에 미국인은 행복하게 되었을까? 샌델은 단호하게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샌델의 말이다. 

"지난 수십년간 개인의 권리와 혜택이 확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을 지배하는 요소들을 스스로 통제하는 미국인의 통제력은 오히려 줄어들었다." 

"역설적이게도 자발주의적 자유관의 승리는 개인의 통제력이 또는 영향력이 점점 줄어드는 가운데서 나타났다." 

심지어 샌델은 이런 주장까지 하고 있다. 

"오늘날 미국에서 자유 민주주의가 겪는 어려움은 특정한 좌절감에서 비롯됐다기보다 자유민주주의를 뒷받침하는 자발주의적 자아상이 부족해서 나타났을지도 모른다." 

자발주의적 자아상은 공동체와 유리된 무연고적 자아를 상정한다. 자유주의는 이런 인간의 개체적 속성에만 주목함으로써 인간의 또 다른 속성인 공동체적 속성을 외면한다고 샌델은 보고 있다.

샌델은 권력을 절차주의에 제한한 자유주의자들을 비판한다. 정치권력이 자본권력을 제어하지 못할 때 사회는 망가진다. 샌델의 말이다. 

"이민자를 배척하는 우파적 파퓰리즘이 득세하는 현상은 일반적으로 진보정치가 실패했음을 예고하는 징후다. 자유주의자들이 경제권력을 민주적으로 묶어둠으로써 권력을 가진 집단으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하지 못할 때, 사람들은 다른 곳을 바라보게 마련이다." 

샌델은 자발주의적 자아상에 기초한 자유주의가 결국 미국 사회를 실패로 이끌었다고 생각한다. 정치권력이 절차적 정당성에만 매몰될 때 공화국은 무너진다.

샌델을 비롯한 공동체주의자들의 비전은 타운에서의 삶에 대한 동경을 기본적으로 깔고 있다. 공화주의, 공동체주의에 대한 그의 천착은 공화주의적 감성이 흥성거렸던 건국 초기 타운 생활을 배경으로 한다. 공동체라는 유대감은 기본적으로 타운이라는 공간을 빼놓고서는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토크빌에 따르면 미국 자치의 핵심인 타운은 규모가 이삼천명에 불과했다. 토크빌은 타운의 규모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한편으로는 너무 크지 않기 때문에 그 주민들의 이해관계가 상충하지 않을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작지 않기 때문에 업무를 관장할 수 있는 사람들을 언제라도 그 시민들 가운데서 구할 수 있을 것이다."(<미국의 민주주의>(알렉시스 드 토크빌 지음, 한길사 펴냄))

다른 공동체주의 철학자 매킨타이어의 글을 살펴보자. 그의 책에는 근대 이전 시기에 대한 낭만적 동경이 넘친다. 매킨타이어는 이렇게 적고 있다.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에 있어서 공동체는 단지 모든 개인이 스스로 선택한 자신의 '좋은 삶'의 생각을 추구하는 무대이다. (중략) 이와 반대로 고대 및 중세의 시각에서 보면 정치적 공동체는 자기 자신을 유지하기 위하여 덕들의 실행을 요청할 뿐만 아니라, 아이들을 덕을 갖춘 성인으로 키우는 것은 권위 있는 성인들의 과제에 속한다."(<덕의 상실>, 문예출판사 펴냄) 

풀이하자면 현대인은 자기 좋은 것에만 몰두하지만 고대·중세인들은 자신이 유덕한 삶을 살고자 노력했을 뿐만 아니라 자녀에게도 덕있는 삶을 가르쳤다는 말이다. 매킨타이어는 개인주의에 근거한 자유주의의 대안으로 덕에 기초한 공동체주의를 제안한다. 좋은 말이지만 가능한 구상일까?

윤리철학자 황경식은 공동체주의자들의 덕에 근거한 공동체건설이라는 제안을 반대한다. 그의 논문 <도덕체계와 사회구조의 상관성>을 살펴보자. 황경식은 도덕과 사회구조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도덕체계는 그 자체로서 아무리 정합적이고 바람직해 보이는 것일지라도 그것이 실천적 지침으로서 제대로 작동되고 기능을 수행할 수 있을 경우, 다시 말하면 그 체계의 현실적 적용가능성이나 실현가능성에 있어 하자가 있을 경우 사회윤리로서 무력하고 무의미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전통적 윤리와 덕 사상을 현대에 재현하기 위해서는 현대 사회의 제반사항에 대한 사회철학적 숙고가 전제되어야 한다. 말은 부드럽지만 단호하다. 황경식은 혁명을 상정하지 않고는 소규모 지역공동체에 기반한 덕성공동체를 조성해내지 못할 것이라 말한다.

혈연과 연고를 토대로 한 공동사회(Gemeinschaft)에서 형성된 전통적인 공화주의적 덕윤리의 퇴조는 온전히 자유주의 때문만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거대하고 익명성이 강한 사회 가 도래하고 그 속에서 기존의 덕윤리, 공화주의적 에토스를 상실해버렸기에 이를 대체하기 위해 개인에 기초한 자유주의가 도입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칸트, 밀, 롤스가 이런 사회를 포착한 자유주의의 대표적 사상가들이다. 즉 하부구조의 거대한 변화에 조응한 윤리체계가 자유주의인 것이다. 황경식은 이렇게 말한다. 

"현대 사회의 구조에 대한 근본적 개혁이 전제되지 않거나 사회경제적 체제의 변혁이 가능하지 않는 한 규칙-의무의 윤리(자유주의윤리-필자주)는 현대사회의 주도적 도덕체계로서, 특히 성품-덕 윤리의 하부구조이자 기초질서로서 엄존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현대 사회처럼 복잡한 사회에서는 자유주의윤리가 불가피하다는 주장이다.

샌델은 자본주의가 조성하는 사회적 불안을 공화주의로 극복하자고 독려한다. 샌델의 공화주의에 대한 애착은 무언가 부족한 느낌을 준다. 기득권지배층이 설정한 적정한 선 이상을 넘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말이다. 

"케인스의 통찰은 해방적이면서도 우리의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든다. 정치가 우선임을 주장하는 그의 통찰이 무엇보다 해방적이다." 

그의 비전은 신자유주의를 대신해 케인즈주의를 재도입할 배짱있는 공화주의정치를 호명하는 선에 머무른다. 미국은 케인즈주의도 해봤고 신자유주의도 해봤다. 모두 실패로 끝났다. 미국은 현재 실질적 내전상태에 빠졌다.

사상가 백낙청은 남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백낙청은 김용옥과의 대담에서 미국 헌법의 창안자들은 "민주주의를 하지 않겠다는 분명한 의지를 가졌었다"고 말한다. 삼권분립, 상하원 양원제, 대통령 간접선거가 그런 의도로 만들어졌다. 인민의 바램이 여러 장치를 통해 구조적으로 왜곡되는 시스템을 만든 것이다. 이런 구조를 그대로 두고서는 개혁적 시도는 과두제로 귀착될 수밖에 없다. 미국 민주주의가 최종적으로 과두제로 귀착되는 메커니즘을 유지하는 한 거대 경제권력을 극복해낼 정치세력의 형성은 요원하다. 철학자 김용옥의 민주주의 비판은 더욱 급진적이다. 김용옥은 "민주라는 언어의 폭력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민주주의'라는 역사상 존재하지 않았던 개념에 매몰되면 그 개념이 만들어내는 중력장에서 허우적대게 되기 때문이다.

샌델의 공화주의가 조락해가는 미국과 세계의 민주주의에 희미한 빛이라도 비출 수 있을까? 필자는 쉽지 않을 것이라 판단한다. 그럼에도 샌델이 말하는 덕에 기초한 공동체의 건설은 매우 소중한 제안이라고 생각한다. 토착신학자 이은선이 말한 '조숙한 근대국가' 조선이 500년을 지속했던 것도 양반이라는 지식인지배층을 성리학이라는 윤리적 이념체계에 경도시켰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필자는 생각하기 때문이다.

책을 읽고 나면 이런 생각이 든다. 민주주의는 자본주의와 동행하기 참 어렵다.

▲ <당신이 모르는 민주주의>(마이클 샌델 지음, 이경식 옮김, 김선욱 감수, 와이즈베리 펴냄) ⓒ와이즈베리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 3,000원
  • 5,000원
  • 10,000원
  • 30,000원
  • 50,000원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국민은행 : 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