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으로 빌었어요. 제발 좀 살아만 있어다오"

[존엄이 사라진 일터와 남은 사람들] ⑤ 발전비정규직 김용균이 만든 빛 (上)

"전 오늘 또 동료를 잃었습니다. 혼자 근무하다 사고가 발생해, 그가 사망한 시간이 정확히 언제인지도 알 수 없습니다. 이제 더 이상 제 옆에서 동료가 죽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 하청 노동자도 국민입니다. 제발 더 죽지 않게 해주십시오."

2018년 12월 11일 오전 11시, 이태성 한국발전산업노동조합 한전산업개발 발전지부 사무처장은 고개를 숙인 채 울먹이며 말했다. 이태성 씨는 "정규직화는 아니어도 더 이상 죽지는 않게 해주세요"하고 했다.

기자회견이 진행되던 프레스센터는 순간 고요한 눈물의 정적에 휩싸였다. '비정규직 그만쓰개 1100만 비정규직 공동투쟁(약칭, 비정규직이제그만공동투쟁)'의 주최로 열린 기자회견이었다.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 등의 비정규직 정책을 선언한 문재인 대통령과의 면담을 비정규직 당사자들이 요구하는 자리였다.

이태성 씨의 발언이 끝나자 여기저기서 비정규직들이 겪은 산재사망사고의 처참함에 대한 증언이 이어졌다. 넓은 기자회견장은 흐느끼는 소리로 가득했다. 간혹 눈물을 훔치는 기자들도 보였다. 눈물의 기자회견으로 만든 산재사망사건의 피해자는 바로 스물네 살의 발전비정규직노동자 김용균 씨다.

▲2018년 12월 11일 프레스센터, 문재인대통령과의 면담을 촉구하는 비정규직이제그만공동투쟁의 기자회견, 이때 이태성 씨는 김용균 씨의 죽음을 알린다. ⓒ명숙

김용균 씨는 전날인 12월 10일 석탄을 운송하는 설비를 점검하러 갔다가 밤 10시경부터 연락이 끊겼다. 동료들이 새벽 3시 22분쯤에서야 발견했다. 김용균 씨를 처음 발견한 이인구 과장은 그때를 이렇게 기억했다.

"10시 20분에 세 번을 통화했어요. 전화하니까 설비류를 돌고 나서 나한테 온다고 하더라고, 아무리 기다려도 안 왔어요. 얘가 탄을 치우나보다 생각했죠, 시간이 지나도 안 와서 사무실 사람들이 찾았어요. 그런데 12시 반이 되어도 못 찾아서 저도 같이 찾으러 다녔죠. 용균이가 타고 갔던 자전거가 보이지 않는 거야. 타워마다 들러서 찾고 정문도 가고 후문도 가고. 다 가 봤는데 없어. 발전소가 굉장히 넓어요. 자전거 타고 바둑판처럼 생긴 도로를 한시간 반 동안 뒤졌어요. 혹시 누가 차로 치고 달아나지는 않았나 싶어 찻길까지 나가서 봤어요. 속으로 빌었어요. 제발 좀 살아만 있어다오."

이인구 씨는 새벽 3시쯤 담당구역인 9호기와 10호기가 있는 곳으로 다시 왔다. 두 개의 설비가 이어진 계단으로 갔다. 보통 하청노동자들이 계단에서 쉬고는 했다. 없었다. 탑 쪽으로 갔다. 엘리베이터가 없어 걸어갔다. 올라온 김에 갈 때까지 보자 했는데 한쪽 라인은 꺼져 있어 운전되는 라인만 찾아보기로 했다. 출입문을 열어 보는데 점검구에 헝겊 같은 게 보였다. 가까이 가서 보니 손가락이 보였다.

"손을 잡았지. 4시간 지났으니까 얼음장같이 찼어. 분노, 슬픔이 막 끓어올랐어. 평소에 욕을 하지 않는데 욕까지 나왔어."

이인구 씨는 김용균 씨의 죽음을 맞이할 가족이 떠오르니 더 화가 났다고 했다. 분진 속에서 발견한 김용균 씨의 시신은 온전한 모습이 아니었다. 다른 직원들에게 전화를 하고 김용균 씨의 분리된 시신을 마저 찾아야 했다. 컨베이어벨트는 1초에 5미터씩 가니까 순간적으로 1분 1초가 시급했다. 다행히 찾았다. 사무실에 연락했다. 사고가 나면 원청팀 소속의 재난방제팀에 무조건 전화를 하게 돼 있다. 현장 보존 조치가 시작됐다.

앰뷸런스와 경찰도 왔다. 이인구씨는 김용균 씨의 찢긴 모습을 보아 몸과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경찰은 최초발견자라며 경찰차에서 1시간 동안 조사를 했다. 씻고 다시 경찰서에 가서 정오까지 취조실에서 조사를 받았다. 그의 상태에 대한 최소한의 고려도 없었다. 힘들었다. 함께 사고 현장 폐회로텔레비전(CCTV)도 봤다. 김용균 씨의 마지막 모습이 찍혀 있었다.

유가족과 노조의 만남

"새벽 6시 반쯤에 자다가 전화를 받았죠. 태안화력에서 산재 사망사고가 났다고요, 발전기술 하청업체라고 하더라고요. 저는 반사적으로 사망자가 조합원인지를 물었어요. 조합원이 아니면 회사에 대응하기가 어렵거든요."

공공운수노조에서 태안화력발전소 비정규직을 담당하는 박준선 씨는 전화를 받고 어떻게 대처할지 논의했다. 우선 유가족에게 상황을 잘 전달하려면 조합원들이 회사보다 먼저 유가족을 만나야 한다. 유가족들은 오후 1시쯤 병원에 온다고 했다. 지부 간부들이 있지만 경험은 많지 않아 서둘러 태안으로 내려갔다.

그 시각, 구미에 사는 김용균 씨의 어머니 김미숙 씨는 경찰서에서 전화를 받았다. 사고가 났으니 와서 아들인지 확인해달라고 했다. 아들이 일하던 태안으로 향했다. 병원에 도착해서도 설마 하는 마음으로 태안의료원에 도착해서는 응급실로 갔다. 아들이 죽지 않기를 바라서다. 용균이의 인상착의를 말하며 이런 청년이 치료받고 있는지 물었다. 없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영안실에 김용균이라는 사람이 있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했다. 영안실로 향했다. 온통 까맣게 탄가루를 뒤집어 쓰고 있어서 알아볼 수가 없었다. 90% 이상은 아들인 것 같았지만 머리칼이나 피부를 만져봐야 아들인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아들의 죽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얼굴을 만져보았다. 다시 만져도 여전히 보드라운 아들의 얼굴…. 거부할 수 있다면 거부하고 싶었다. 울고 있는 김미숙 씨는 영안실에서 끌려나와 복도에서 남편과 함께 한참을 통곡했다.

한층 더 올라갔더니 회사 사람이 있었다. 그는 자신을 하청업체 이사라고 소개했다. 그는 용균이는 성실한 사람이었는데 가지 말라는데를 가서 사고가 났다며 안타깝다고 했다. 갑작스런 사고 소식에 정신이 없어 회사대표의 말이 처음에 무슨 뜻인지 몰랐다. 되새길수록 화가 났다. 성실한 우리 아들이 그럴 리가 없다. 장례식장 한 켠에 아들과 일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노조라고 했다. 당시에는 노조가 뭔지 몰랐다.

"어머니도 처음에는 다 경계를 했죠. 그런데 회사가 용균이 잘못이라고 몰아붙였을 때, 그에 대해 노조가 거짓말이라고 하니까, 그때부터 우리를 믿게 된 거 같아요. 유족의 첫 요청이 회사를 장례식장에서 물려달라는 거였어요."

2018년 당시 공공운수노조 노동안전을 담당하던 이태의 부위원장의 말이다. 그는 사고 소식을 듣고 당일 오후에 태안의료원에 도착했다. 첫날은 산재사망사고 대응에 대해 유가족이 노조에 위임하지 않은 상태였다. 다음 날 기자회견을 통해 언론에 처음 어머니인 김미숙씨가 나섰다. 그는 김미숙 씨에게 억울한 죽음의 진실부터 밝혀야된다고 말했다. 회사가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데 사실은 열한 번째 죽음이라는 것도 알려줬다.

3월 13일 김미숙 씨는 아들이 일했던 곳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아들의 동료들이 있는 노조 사람들과 함께 숙소로 향했다. 탈의실에 있던 아들의 캐비닛에는 종류별로 컵라면이 있었다. 2016년 산재사망한 구의역 비정규직 '김군'의 가방에도 있던 컵라면! 컵라면은 밥 먹을 시간 없이 바쁘게 움직이는 현실, 강한 노동강도를 말해준다. 발전소에는 화장실 등 노동자를 위한 편의시설이 없었다. 식당도 없어 간식거리나 요기거리를 노동자들이 사놓곤 했다. 제때 식사를 하지 못했던 것이다. 김미숙 씨는 아들이 일한 지 2개월 만에 살이 빠진 이유를 그제서야 짐작할 수 있었다. 밥 먹을 시간조차 없이 일했던 것이다. 그리고 개인 돈으로 산 손전등이 있었다. 비정규직 하청노동자라 제대로 된 손전등이 지급되지 않는 경우가 많아 김용균 씨가 산 것이다. 옷이고 뭐고 온통 석탄가루가 묻어 있었다.

70년대 탄광 같았어

김미숙 씨는 아들의 동료들과 함께 아들이 일했던 곳으로 갔다. 그런데 현장은 청소가 되어 있었다.

"현장 훼손이 돼서 용균이의 죽음의 흔적이 하나도 없었어요. 누명을 씌운 것도 모자라 현장훼손이라니요. 더 놀란 것은 현장이 탄광촌처럼 (분진으로) 까만 거예요. 물로 씻었다는데도 앞이 잘 보이지 않았어요. 70년대 탄광 같았어요. 공공기관이라고 해서 좋고 깨끗한 곳에서 아들이 일하는 줄 알았는데, 그것도 모르고 …. 기가 막힌 것은 용균이가 그렇게 험악하게 죽었는데 그 옆에서 기계룰 돌리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말했어요. 이거 멈춰야 한다고, 그리고 옆에 있는 용균이 동료들에게 말했어요. 빨리 여기서 나가라고. 그래야 산다고."

아들이 일하던 현장을 보고 김미숙 씨는 마음을 다졌다. 이태의 부위원장은 미숙 씨에게 용균이 죽음을 밝히기 위해서 사람들이 모여 있다. 노조만으로는 안 되니 더 많은 사람들이 모아 대책위를 꾸려야 죽음의 진상을 밝힐 수 있다고 말했다. 그 후 태안의료원 장례식장 한 켠은 대책회의 상황실이 되었다. 박준선 씨 등 공공운수노조 담당자들과 대책회의 사람들이 사건을 파악한 내용을 공유하며 그곳에서 회의를 했다. 충남지역에 있는 노동안전단체들도 대책위 활동을 함께 했다. 유가족인 김미숙 씨도 매일 저녁 점검회의에 참여했다. 언론이든 지역이든 찾아가 아들의 억울한 죽음을 알렸다. 12월 13일부터 매일 태안터미널에서는 추모문화제가 열렸다. 공공운수노조를 비롯한 민주노총 건물에는 분향소가 설치됐다.

12월 14일 서울프란치스코회관에서 사고 현장을 조사한 결과를 발표했다. 회사는 사고 당일 새벽 5시반 경 고용노동부 보령지청이 내린 작업중지 명령을 어기고 1시간20분간 컨베이어벨트를 재가동한 사실을 폭로했다. 동료들의 증언과 메시지 기록을 통해 태안화력 9·10호기를 1시간 가량 재가동한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12월 16일 ‘태안화력 비정규직 청년노동자 故김용균 사망사고 진상규명 및 책임자처벌 시민대책위원회(이하 시민대책위)’ 구성하는 첫 회의를 했다. 다음 날인12월 17일 대통령이 있는 청와대 앞 분수대에서 시민대책위의 요구 및 활동계획을 밝히는 기자회견을 했다. △문재인 대통령 사과, △철저한 진상규명 및 책임자 처벌, 재발방지대책 수립 및 배상, △위험의 외주화 금지법안인 산업안전보건법 개정 및 중대재해기업처벌법 12월 임시국회 내 처리, △비정규직 노동자의 직접고용 정규직 전환, △현장시설 개선 및 안전설비 완비를 요구했다. 이태의 씨는 시민대책위 공동집행위원장을 맡았다. 기자회견 후 서울 광화문광장에도 시민분향소를 차렸다.

"유족들이 싸움을 하도록 격려를 해준 사람들 중에 다른 참사유족들의 역할도 컸어요. 유가족으로서 싸운 경험이 있으니까. 세월호 유가족들이 왔어요. 힘들어도 시민사회단체나 노조와 손잡고 진상규명을 위해 싸운 경험이 있으니까 아무래도 설득이 되었겠죠, 유가족들은 가족을 잃은 아픈 경험이 비슷하니까. 반올림의 유가족도 오시고 현장실습생 유가족들도 오셨어요."

먼저 싸운 유가족들과의 대화로 김용균 씨의 유가족들은 노조나 대책위에 대한 신뢰가 커질 수 있었다. 이태의 집행위원장은 김미숙 씨를 포함한 유가족들에게 이 사안을 싸워서 해결하려면 최소한 한 달 이상 걸린다고 말하고 유가족과 친지 전체의 동의를 받았다.

생전에 든 피켓에서 알게 된 용균씨의 요구

김용균 씨의 죽음은 전형적인 죽음의 외주화였다. 비정규직이라서 안전장치도 없이 위험한 곳에서 혼자 일했다. 2인 1조가 지켜져서 컨베이어벨트를 누군가 멈추었다면 목숨은 구했을 것이다. 입사한 지 3개월밖에 안 된 젊은 노동자가 구의역 산재사망에 이어 또 죽었다는 사실은 사회적 공분을 일으켰다.

무엇보다 김용균 씨가 생전에 비정규직 제도의 개선을 요구하는 인증샷 사진 공개는 공감대를 불러일으켰다. 고인도 비정규직 제도의 문제에 대한 정부 책임을 생각했구나. 2017년 5월 출범한 문재인 정부는 ‘공공부분 비정규직 제로 정책’을 선언했으나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하지 않고 자회사로 전환했다. 형식만 바꾸었을 뿐 간접고용을 그대로 유지했기 때문이다. 민간 분야의 비정규직 제도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대통령은 재벌들을 청와대로 불러 경제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비정규직들과는 만나 비정규직 제도 개선에 대한 해법에 대해 논하지 않았다. 그래서 비정규직이제그만공동투쟁은 <문재인대통령, 비정규직 노동자와 만납시다!>라는 인증샷 찍기 캠페인을 통해 비정규노동자들의 요구를 모으고 있었다. 김용균 씨도 생전에 이 인증샷 캠페인에 함께 한 것이 사진으로 알려졌다. 피켓에는 ‘나 김용균은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석탄설비를 운전하는 비정규직 노동자입니다’라고 써 있었다.

비정규직이제그만공동투쟁은 김용균 씨의 뜻을 청와대에 전달하기 위해 집회를 개최했다. 다시는 비정규직이라고 억울하게 죽는 일이 없어야 한다며 12월 21일 서울고용노동청에서 청와대까지 행진했다. 비정규직 대표단 100인은 하얀 민복을 입고 앞에 섰다. 비정규직이라고 일하다 죽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외쳤다. 행진에는 노조 조합원이나 시민사회단체 회원들, 그리고 일반 시민들도 함께 했다. 청년들이 태안화력발전소를 2시간 동안 기습 점거하는 시위도 했다. 각계각층의 분노가 여러 행동으로 드러났다.

▲고 김용균 씨가 생전에 들었던 인증샷 피켓. 피켓에는 ‘문재인대통령, 비정규직 노동자와 만납시다. 노동악법 없애고, 불법파견 책임자 혼내고 정규직 전화는 직접고용으로!’라고 쓰여 있다.ⓒ비정규직이제그만공동투쟁

상경투쟁과 28년만의 산안법 개정

김미숙 씨는 사방팔방으로 발로 뛰어다녔다. 진상규명만이 아니라 더 이상 노동자들이 죽지 않게 하기 위해 국회의원도 찾아갔다. 노동안전 전문가들과 만나고 산업안전보건법(산안법)에 비정규직노동자의 안전 보장이 제대로 명시되지 않은 것도 알게 됐다. 지지부진했던 12월 27일 산안법 일부 개정안이 국회에서 통과됐다. 산안법이 만들어진 지 28년 만의 일이다. 김용균투쟁 중에 시민들의 지지를 받고 하청노동자의 안전에 대한 원청의 책임을 명시한 개정안이기에 일명 김용균법이라고도 불렸다. 원청 사업주가 지정·제공하고 지배·관리하는 장소라면 하청노동자라도 원청 업체가 원칙적으로 안전보건 조치 의무를 지도록 정했다. 산안법의 적용 대상이 '근로자'에서 '노무를 제공하는 자'로 확대했고, 유해·위험 작업의 도급을 금지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그러나 진상규명과 비정규직 정규직화, 책임자처벌에 대해서는 크게 진전이 없었다. 해가 가기 전인 2018년 안에 장례를 치르고 싶었으나 해를 넘겼다. 2019년 1월 8일 시민대책위는 한국서부발전 등을 고발했다. 16일 고용노동부는 특별근로감독 결과를 발표했다. 태안화력발전소 산업안전보건법 위반사항 1029건이며, 이에 대해 형사 입건과 과태료 6억 7천만 원을 부과했다. 겨우 4주 조사했는데 산안법 위반사항이 그렇게 많다니! 지난 8년간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산재로 사망한 노동자는 김용균 씨를 포함해 총 12명이다. 2017년 11월 발생한 보일러 협착사고로 비정규직 노동자가 산재사망했을 때도 노동부는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68건을 적발하고 과태료 1억 1천만 원을 부과하고, 안전보건진단 명령도 내렸다. 그러나 안전보건진단 명령은 이행되지 않았다. 이때 제대로 이행됐다면 김용균 씨는 살았을 것이다. 정부가 제대로 관리감독했더라도 아무도 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회사나 정부는 제대로 응답하지 않았다.

1월 18일 비정규직이제그만공동투쟁의 비정규직 노동자 6명은 청와대 앞 영빈관 앞에서 기습시위를 했다. <김용균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비정규직 이제그만>, <공공부문 제대로 된 정규직 전환>, <불법파견 사용자처벌, 정규직 전환>이란 현수막을 들고 짧은 구호를 외쳤다. 그러나 청와대 경호원들이 순식간에 달려들어 김수억 씨를 연행했다. 어떤 폭력도 없었으나 강제로 연행했고 구속영장까지 청구했다. 정부는 진상조사위 구성에 대한 요구에 여전히 답하지 않았다.

▲2019년 1월 18일 비정규직노동자 6명이 청와대 앞에서 김용균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등을 요구하는 현수막 시위를 벌였다. ⓒ비정규직이제그만 공동투쟁

김용균 씨는 장례도 치르지 못한 채 차디찬 영안실에 있어야 했다. 그렇다고 싸움을 여기에서 마무리할 수는 없었다. 이태의 집행위원장은 왜 진상조사위원회가 필요한지에 대해 유가족들에게 설명했다.

"사실 유가족의 입장에서 장례를 못 치르고 연기하는 일은 정말 견디기 어려운 일이에요. 저는 유가족들에게 두 가지를 설명했어요. 일반 시민의 입장에서 억울한 죽음이 없도록 대책이 나와야 한다는 것, 즉 사회적 과제가 해결되어야 한다고 설명했어요. 그리고 유가족의 입장에서도 지금 장례를 치르면 회사는 용균이의 잘못으로 몰고 걸 것이다. 회사가 기껏 해줄 수 있는 거는 산재 처리 신청하는 건데 회사가 방해할 수 있다, 그렇게 설명했어요. 사실 부검했을 때 용균이의 위에 있는 내용물에 대해 약물 조사도 철저하게 했거든요. 우리나라 법체계에서는 조사체계가 충분하지 않으니까, 정부가 우리 요구를 받아 특별조사단를 꾸려야 진상규명이 가능하다고 설명했어요."

만약 김용균 씨가 먹은 것 중에 약물이나 알코올이 나왔다면 개인과실로 몰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 많은 산재사망사고에서 부검은 개인과실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 실시되기도 한다. 진상조사위원회 구성과 관련해 국무총리 임명권, 시민대책위 위원 포함 등 일부 진전된 안이 포함됐으나 조사범위나 재발방지 대책 등에 대한 내용은 빠졌기에 시민대책위는 수용할 수 없었다.

더 힘을 몰아붙여야 했다. 1월 22일 태안에서 서울대병원으로 옮겼다. 김미숙 씨는 아들을 차가운 곳에 계속 두는 것이 아팠지만 도리가 없었다. 시민대책위 사람들이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신부와 목사 등 종교인들이 참여하고, 교수학술단체도 동조 단식에 참여했다. 태안화력지회는 매일 출근선전전과 점심선전전도 했다. 현장과 서울에서 투쟁이 이어졌으나 정부는 응답하지 않았다. 시민대책위는 적어도 설 명절인 2월 5일 전에는 장례를 치러야 한다고 시민선전전도 하며 호소했다.

설날인 2월 5일 정부는 당정협의회를 거쳐 '석탄발전소 특별노동안전조사위원회 구성' 계획을 발표했다. △석탄발전소 특별노동안전조사위원회(진상규명위원회) 조속히 구성·운영해 사고의 구조적 원인을 조사하고 재발방지방안 마련, △석탄발전소 작업현장에서 2인 1조 근무체제 시행 등 긴급안전조치 철저히 이행, △연료·환경설비 운전 분야의 공공기관으로의 정규직 전환 완료 △경상정비 분야는 노·사·전 통합협의체를 구성해 '위험의 외주화 방지'라는 원칙 하에 근로자의 처우 및 정규직화 여부 등 고용의 안정성을 근본적으로 개선하는 방안 마련, △당·정은 이상의 방안이 충실히 이행될 수 있도록 (가칭)'발전산업 안전강화 및 고용안정 TF'를 구성, 운영 등의 5개 내용이 담겨 있었다. 명절 연휴 첫날부터 협상이 시작되어 사흘동안 이어졌다. 시민대책위는 유가족과 함께 논의해 장례 일정 등 입장을 발표했다.

62일 만에 치른 장례

2월 9일 광화문 광장에서 김용균 씨의 장례식이 열렸다. 날씨가 추웠는데도 산재유가족들과 세월호참사유가족, 스텔라데이지호유가족 등 재난참사 유가족들과 노동자들 3천 명이 참여했다. 김미숙 씨는 흐느끼며 아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했다.

"어쩔 수 없이 냉동고에 너를 놔둘 수밖에 없어서 엄마가 너한테 너무 미안하고 죄스럽구나. 하지만 엄마는 너의 억울한 누명을 벗겨야 했고, 너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많은 사람이 너를 오랫동안 잊지 않고 기억하길 간절히 바랐다. 정부와 서부발전, 네가 속해있던 한국발전기술에서 공식 사과문을 발표해, 너의 잘못이 없다는 것을 선포했단다."

그리고 진상을 규명하고 살인을 저지른 책임자를 강력하게 처벌하겠다며 함께 해준 시민들에 대한 고마움도 전했다.

"혹시 저희처럼 억울하게 이런 사고를 당하면 숨지 말고 저희처럼 당당하게 억울한 일 벗을 수 있게(싸우세요), 혼자 할 수는 없지만 이렇게 같이 해주시는 분들이 많으시니까 힘내서 저희처럼 싸워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동안 함께해 주셔서 감사드리고요. 오늘로 이렇게 끝나는 건 아니고 앞으로도 이렇게 싸워야 한다는 거를 말씀드리고 싶었는데 작별 인사를 드리는 것 같네요. 함께 해 주셔서 오늘이 있었고 또 내일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말주변이 없어서 저는 마음으로 전합니다. 고맙습니다."

▲2019년 2월 9일 발전비정규직 김용균 장례식 행렬들, 머리띠에 ‘내가 김용균이다’라는 머리띠와 비정규직 이제그만을 쓴 피켓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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