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후 19개월 울면서 떠난 한국에서 제 흔적을 찾고 싶습니다"

[372명 해외입양인들의 진실 찾기] (22) "내 생일·이름 모두 정확하지 않습니다"

1976년 9월 21일. 내 (입양) 이야기는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사실 알 수 없는 사건이 이날까지 이어졌습니다.

처음 두 장의 사진은 서울에 있는 입양기관 홀트에서 찍은 것입니다. 사진 중 한장에서 나는 울고 있습니다. 다른 사진에서 나는 울지 않지만 행복해 보이지도 않습니다. 내가 갖고 있는 다음 사진은 덴마크의 코펜하겐 공항에서 낯선 사람 (홀리스 씨)이 나를 (양)어머니에게 넘겨주는 사진입니다. 그녀는 매우 행복해 보입니다. 그때 나는 생후 19개월로 추정됩니다.

▲필자가 입양될 당시의 모습. ⓒ루이스 힐러럽 한슨

내(입양)부모님은 저를 데려와서 얼마나 기뻤는지 말씀하셨습니다. 또 내가 도착했을 때 얼마나 배가 고팠는지. 처음으로 내 얼굴이 밝아진 것은 (양)오빠(그도 한국 입양인입니다)를 처음 봤을 때입니다. 나는 걸을 수 있었습니다. 내 서류에는 한국어로 두 단어로 된 짧은 문장을 말할 수 있다고 적혀 있습니다.

그런 다음 다시 시작해야 했습니다. 나는 돌보기 쉬운 아기라고 들었습니다. 나는 밤에 9시간을 내리 잤습니다. 나는 2세 때 덴마크어를 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3세 때 나이프와 포크로 먹는 법을 배웠습니다. 나는 5세 때 덴마크어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나는 공부도 곧잘 했습니다. 나는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사람이라고 들었습니다.나는 덴마크에서 자란 것을 행복하다고 기억하고 그것을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감사'일 것입니다. (양)어머니로부터 나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느꼈습니다. 그게 제 인생을 행복하게 해 준것 같습니다. (양)아버지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그에게서도 사랑을 느꼈습니다.

내가 36세 때 식도암으로 (양)아버지를 잃었습니다. 내가 44세이었을 때 (11년 동안 치매를 앓았던) (양)어머니도 돌아가셨습니다. 이후 나는 생물학적 가족에 대한 정보를 찾기 시작하였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멀리 여행할 돈이 없었기 때문에 한국에 가지 못했지만, 나는 언제든 가족찾기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돌이켜보면 나는 (양)부모님이 항상 충분하고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았기 때문에 (양) 부모님이 살아 있는 동안 생물학적 가족을 찾기 시작하고 싶다는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나는 생물학적 가족을 찾기 위해 입양기관에 편지를 썼고, 그들은 그에 대한 정보가 없다고 늦은 회신을 했습니다. (그들은 내 (양)부모에게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내 DNA 샘플을 마이헤리티지(MyHeritage),앤세스트리(Ancestry), 23앤미(23andMe)에 보냈지만, 이 DNA 데이터베이스에서 생물학적 가족 구성원을 찾지 못했습니다. (이 회사들은 자신들이 확보한 DNA 데이터베이스 내에서 DNA 매칭을 통해 생물학적 가족, 가족의 유전적 이력 등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준다. 해외입양인들의 다수가 입양기관을 통해 친생가족에 대한 정보를 제대로 얻지 못해 이런 방법을 통해 가족을 찾은 경우가 꽤 많다. 편집자주)

44세에 처음으로 내가 태어난 나라인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남편과 함께 서울에 있는 입양기관을 찾았습니다. 그들은 나를 위해 테이블에 크리넥스를 가져다 주었지만, 친부모에 대한 정보는 없었습니다. 유일한 이야기는 내가 9개월 때 거리에 홀로 남겨졌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제 내가 다른 많은 한국 입양인들과 같은 이야기를 공유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입양기관은 내가 남겨졌던 서울의 한 거리의 구글 지도 좌표 세트를 제공해주었습니다. 내가 매년 축하하는 생일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내 서류에서 내 한국어 이름은 무작위로 선택되었습니다. 나는 마지막으로 지푸라기라도 잡아 보기 위해 서울 마포 경찰서에 갔고 거기에 DNA 샘플도 남겼습니다. 서울에서 나는 친절을 만났고 곧 다시 방문하기를 희망합니다.

현재 나는 48세입니다. 나는 부모가 없고 나 자신도 아이를 갖는 운이 없었습니다. 생물학적 가족에 대한 정보도 없고, 이를 찾을 희망은 거의 없습니다. 흔적은 여기서 끝납니다.

후기:

나는 현재 덴마크와 전 세계에서 온 다른 입양인들과 함께 한국의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원회)에 조사를 요청했습니다. 해외입양 과정에서 아동 납치, 서류 조작 등과 같은 불법행위가 저질러져서 발생한 인권 침해에 대한 조사를 돕고 싶습니다. 나와 전 세계의 다른 입양인들을 위해 입양 절차에 대한 진실에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습니다. 이는 과거를 이해하고 미래에 침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방지할 수 있습니다. 

2022년 9월, 283명의 해외입양인들이 진실화해위원회에 입양될 당시 인권침해 여부를 판단해달라는 조사 신청서를 제출했다. 지난 11월 15일, 12월9일 두 차례에 걸쳐 추가로 신청서를 제출하면서 372명으로 늘어났다. 1970년대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권위주의 시기에 한국에서 덴마크와 전세계로 입양된 해외입양인의 입양과정에서 인권 침해 여부와 그 과정에서 정부의 공권력에 의한 개입 여부에 대한 조사를 요청한 것이다. 다행히 진실화해위는 12월 8일 '해외 입양 과정 인권침해 사건'에 대해 조사 개시 결정을 내렸다고 발표했다. 이는 한국이 해외입양을 시작한지 68년의 첫 정부 차원의 조사 결정이다. <프레시안>은 진실화해위에 조사를 요청한 해외입양인들의 글을 지속적으로 게재할 예정이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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