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여년 전부터 금융세력은 중앙은행의 독립을 추진해왔다

[임수강의 진보금융 찾기] 중앙은행의 민주적 통제가 더 중요하다

<프레시안>이 임수강 금융평론가의 진보적인 금융 정책 대안을 찾는 '임수강의 진보금융 찾기'를 매월 1회 독자 여러분께 소개합니다. 한국의 경제·금융 기사와 칼럼은 절대적으로 보수적이고 신자유주의적인 가치에 기울어 있습니다. 대안을 이야기하는 목소리를 찾기가 점차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임수강의 진보금융 찾기'는 기존과 다른 시각, 기존과 다른 깊이로 독자 여러분께 어려워만 보이는 금융의 오늘을 진단하고, 그 진보적인 대안을 짚어드릴 예정입니다. 임수강 박사는 금융기관에서 실무경험이 많은 전문가입니다. 국회, 금융경제연구소 등에서 일했고 <지속가능한 공정경제>, <달러제국과 한국경제> 등의 저서를 공저했습니다. 최근에는 아담 레보어의 <바젤탑>(더늠 펴냄)을 번역해 국내에 출간했습니다. 앞으로 '임수강의 진보금융 찾기'에 큰 관심 바랍니다. 편집자. 

왜 지금 중앙은행 독립이 문제인가?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한국은행이 정부로부터는 독립했지만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연준)로부터는 그렇지 않다는 발언을 한 바 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중앙은행의 독립을 달성해야 할 바람직한 상태로 본다. 사실 한국은행 총재만이 아니라 일반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정부로부터 독립한 중앙은행이 화폐가치의 안정을 이루는데 더 좋은 성과를 낸다는 주장은 널리 받아들여진다. 이러한 주장은 함부로 도전해서는 안 되는 공리처럼 간주되기도 한다.

더욱이 우리나라에서는 중앙은행 독립성이 진보적인 가치를 갖는 것처럼 여겨지는 듯하다. 이렇게 된 데는 우리나라에서 중앙은행 독립 주장이 나온 독특한 배경이 한 몫 했다. 우리나라에서 한국은행 독립 주장은 1987년 6.29 선언 직후 경제 민주화 요구가 분출하던 국면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당시는 정부가 은행 업무의 세세한 부분까지 간섭하는 이른바 관치금융의 폐해가 쌓여 있던 때라 뭔가 개혁이 필요하다는 데에는 일정 부분 사회적인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한국은행 독립은 관치금융의 폐해를 극복하는 개혁의 지렛대이며 나아가 경제 민주화의 한 요소라는 인식이 생겨났다. 그렇지만 역사적인 맥락에서 보면 중앙은행 독립 개념은 매우 보수적인 지적 전통에 끈이 닿아 있다. 시카고학파-통화주의-신자유주의의 흐름 속에서 태어난 '워싱턴 컨센서스'의 주요 항목 가운데에 중앙은행 독립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나, 국제 금융자본의 이해에 깊게 엮인 국제통화기금(IMF)이 구제금융을 제공할 때 중앙은행 독립을 요구한다는 데에서 이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는 중앙은행 독립의 필요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들이 나오는 계기를 만들었다. 전례 없는 규모의 위기에 대응하면서 중앙은행과 행정부는 긴밀하게 협력해야 했다. 특히 여러 나라 중앙은행들이 유통 화폐량을 늘리기 위해 정부가 발행한 국채를 사들이면서 두 정책주체의 협력 필요성은 더욱 커졌다. 이러한 상황은 중앙은행이 정부로부터 굳이 독립해야 할 이유가 따로 있는지를 묻게 했다. 그 물음의 연장선상에서 재정정책과 금융정책을 통합하는 것이 낫다는 논의가 나타나기도 했다.

중앙은행들의 양적완화가 만들어낸 분배 효과는 중앙은행 독립성 문제를 따져보게 하는 또 다른 요인이었다. 양적완화로 생겨난 돈은 상품과 서비스 지출로 향하기보다는 주로 자산시장으로 흘러갔다. 이는 자산가격 거품을 만들어냈다. 위기 이후에 부동산 가격이 크게 오른 것은 이러한 주요 중앙은행들의 양적완화 정책과 관련이 깊다. 부동산이나 유가증권과 같은 자산가격이 오르면서 생긴 이득은 대부분 소수의 자산가 계층에게 돌아갔다. 그리하여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 교수도 얘기하듯이 중앙은행들이 편 양적완화 정책은 커다란 (특정 계층에게 유리하게 작용하는) 분배 효과를 만들어냈다.

중앙은행의 정책이 분배에 영향을 주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중앙은행 독립성의 중요한 전제이다. 정치의 영역에서 벗어난 중립적인 전문가들이 특정한 계급이나 계층의 이익에 치우치지 않으면서 나라 전체의 이익을 고려하여 정책 판단을 내린다는 가정이 중앙은행 독립성 논리의 바탕에 깔려 있다. 만약 어떤 정책이 특정한 계급이나 계층에 유리하게 기능한다면 그것은 이미 전문가 영역이라기보다 정치의 영역이다. 중앙은행의 독립적인 정책이 부의 편중을 부르는 분배 효과를 낳는다면 그것이 누구에게 이익인가를 먼저 묻는 것이 자연스런 이치이다.

이러한 사정들이 중앙은행 독립성을 향한 의문이 생겨나는 배경이다. 여기에 더해서 우리는 중앙은행 독립성을 따져보아야 할 이유를 하나 더 가지고 있다. 아담 레보어가 <바젤탑>에서 설명하듯이 2008년 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미국 연준의 양적 완화 정책은 미국뿐만 아니라 주변국의 자산가격도 끌어올렸다. 이창용 총재의 말대로 한국은행이 미국 연준으로부터 독립적이지 못했던 탓에 연준 정책의 영향이 우리나라에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문재인 정부 시기 우리나라의 집값이 크게 오른 이유는 이것이었다. 그런데 한국은행이 정부로부터는 독립적이었기 때문에 집값이 급등할 때조차 문재인 정부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 우리는 자산가격 안정을 비롯하여 정부와 중앙은행이 협력하여 해결해야 할 숱한 과제를 안고 있다. 예를 들어 불평등 문제를 완화하기 위해서는 정부가 적극적인 재정정책을 펴야 하는데, 여기에는 중앙은행의 뒷받침이 필요하다. 또한 정부가 금융배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금을 마련하고자 할 때도 역시 중앙은행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럼에도 중앙은행의 정치적인 독립성이라는 허울이 정부와 중앙은행 사이의 협력을 가로막는 걸림돌 역할을 하고 있다.

중앙은행이 자산가 계층의 이익을 보호하는 쪽으로 나아가는 것을 막으면서 동시에 불평등을 비롯한 여러 사회 문제의 해결에 나서도록 하기 위해서는 중앙은행의 정치적인 독립이라는 신화에서 벗어나야 한다. 중앙은행 독립성을 향한 시각을 교정하는 것이야말로 진보 금융을 찾아 나서는 첫걸음이라 할 수 있다.

중앙은행 독립이 필요한 이유에 관한 설명들

그렇다면 중앙은행 독립성이란 무엇인가? 최근 미국 연준의 파월 의장은 중앙은행 독립성 개념을 언급한 바 있다. 올해 초 스웨덴 중앙은행이 주최한 심포지엄에서 파월은 중앙은행 독립성이 "통화정책 결정을 단기적인 정치적 고려로부터 차단한다는 이점을 가진다"며 "지금처럼 인플레이션율이 높을 때 물가안정을 회복하도록 인기가 없지만 필요한 조치(금리 인상을 통한 경제 둔화)를 정치적 고려 없이 취할 수 있게" 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는 정책 기관에 대한 "독립성 부여는 단기적인 정치적인 고려로부터 보호가 명백히 필요한 사안들"로 엄격하게 제한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여기에서 보듯 파월은 중앙은행 독립을 선출된 권력으로부터 독립하여 정치적인 고려 없이 정책 결정을 한다는 의미로 사용한다. 독립을 얘기할 때는 누구에게서 독립한다는 것인지 그 대상이 있어야 한다. 파월은 그 대상을 선출된 권력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 대상은 외국 중앙은행 정책이나 금융시장 참가자들이 될 수도 있다. 연준 부의장을 역임한 앨런 블라인더 교수는 중앙은행이 금융시장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한편 중앙은행 독립이 정부 내 기능상의 독립인지 정부 자체에서 독립인지의 구분이 있지만, 이는 중앙은행이 정부에서 완전히 독립한 것은 아니라는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한 목적 외에 특별한 의미를 갖지는 않는다.

사실 중앙은행 독립성을 얘기할 때 대부분은 선출된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한다는 의미로 사용한다. 중앙은행은 왜 정치와 정부로부터 독립해야 한다는 것인가? 중앙은행 독립 주장에는 기본적으로 정치인들의 속성에 대한 불신이 깔려 있다. 선거를 통해 평가받아야 하는 정치 권력은 먼 미래가 아니라 당장 눈앞의 선거 결과에 끼칠 영향을 생각하면서 정책을 선택하기 때문에 기회주의적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중앙은행 독립론자들은 만약 정부가 금융정책을 맡는다면 선거를 의식하여 선심성 정책을 펼 수밖에 없고 그러면 확장 정책에 따른 인플레이션이 생길 것이라고 얘기한다. 그렇기 때문에 금융정책을 정치에서 떼어내서 유권자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는 전문가들에게 맡기는 것이 더 나은 경제적 성과를 보장할 것이라고 그들은 주장한다.

중앙은행 독립성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좀 더 세련된 근거는 1980년대 초에 완성된 정책의 동태적 비일관성 개념이다. 쉽게 얘기해서 이 개념은 중앙은행 정책이 효력을 내는 데는 길고 변덕스러운 시간이 흘러야 하는데, 현재 주어진 정보를 가지고 최적이라고 판단한 정책이 나중에도 최적으로 남아 있을지는 알 수 없다는 논리에 바탕을 둔다. 그러므로 단기적인 이해관계에 빠질 수 있는 선출 권력을 대신하여 장기적인 시야를 가진 전문 기술관료에게 금융정책을 맡기는 것이 이 문제에 대한 해법이라고 중앙은행 독립론자들은 주장한다.

IMF처럼 중앙은행의 독립을 지지하는 그룹은 중앙은행 독립성이 강한 국가들에서 더 낮은 인플레이션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나라들 사이의 비교연구를 통해 뒷받침하려고 했다. 그리하여 중앙은행 독립성의 정도가 강할수록 물가안정이 이뤄지고 경기 변동 폭도 작다는 많은 실증 연구들이 제시되었다. 그렇지만 둘 사이의 상관관계가 별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연구 결과도 만만치 않았다. 경험 연구를 통해서는 중앙은행 독립이 실제로 낮은 물가를 보장하는지 확인하기가 쉽지 않았다.

중앙은행 독립과 물가안정 사이의 관계를 밝혀보려는 사람들을 특히 괴롭힌 문제는 이른바 '일본 문제'다. 일본은 중앙은행 독립성이 강하지 않은 나라로 알려졌지만 물가는 상대적으로 안정된 모습을 보였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일본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전문가들은 중앙은행 독립성 개념을 법과 제도상의 독립성과 실질적인 독립성으로 나누기도 했다. 일본은행은 법과 제도상의 독립성은 약하지만 실질적인 독립성은 강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베 정권의 요구에 따랐던 구로다 일본은행 총재의 사례에서 보듯 일본은행의 실질적인 독립성도 결코 강하다고 얘기할 수 없다는 점이 문제였다.

오랜 세월 중앙은행을 연구해온 찰스 굿하트는 중앙은행 독립성과 인플레이션의 관계가 약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놀라운 사실은 중앙은행 독립성이 물가안정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는 넘쳐나지만 그것이 경제성장이나 실업률에는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는 거의 없다는 점이다. 중앙은행 독립성은 물가뿐만 아니라 실업에도 큰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에 그에 관해서도 연구가 이뤄져야 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했다.

▲중앙은행 독립이라는 신화가 한국 사회에서 공고하다. 중앙은행은 외국 중앙은행으로부터, 금융 자본으로부터 최대한 독립해야 한다. 하지만 정부로부터도 그런가.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지난 7일 서울 양천구 방송회관에서 열린 방송기자클럽 초청 토론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중앙은행 독립이 불평등을 키운다

중앙은행 독립의 효용성을 두고는 일찍부터 반론이 제기되었다. 가장 잦은 문제 제기는 국민경제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치는 금융정책을 중앙은행이라는 선출되지 않은 주체가 결정하는 것이 민주주의 원리에 맞느냐는 점이었다. 정부 경제정책과 중앙은행의 금융정책이 꼭 상충하는 것도 아니라는 반론도 제기되었다. 그렇다면 정부와 중앙은행은 분리보다는 긴밀한 협력 관계를 모색해야 할 것이다. 독립성이 강한 중앙은행이 반드시 금융정책을 효율적으로 수행한다고 볼 수 없다는 반론도 있다. 독립성이 강한 중앙은행은 자기의 위상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권력과 가능한 한 충돌을 피하면서 오로지 독립성만을 계속 유지하려 할 수 있다는 것이 이 반론의 핵심 내용이다.

2008년 위기 이후에는 중앙은행 독립성이 불평등을 키울 수 있다는 점이 강조되었다. 2021년에 세계은행이 발간한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1980년대 이후 세계 여러 나라들에서 불평등이 크게 증가한 데에는 중앙은행의 독립성이 자리 잡고 있었다. 세계은행 조사보고서가 제시하는 중앙은행 독립성의 불평등 확대 경로는 세 가지다.

첫째, 사회정책 경로이다. 중앙은행의 독립은 재정정책을 간접적으로 제한하여 정부의 재분배 능력을 떨어트렸다. 이는 사회복지 지출의 삭감으로 이어져서 저소득층에 불리한 결과를 가져왔다.

둘째, 금융정책 경로이다. 중앙은행의 독립은 정부로 하여금 금융시장 규제 완화의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했다. 그 이유는 정부가 줄어든 복지를 모기지 확대와 같은 대출로 메우려 했고 이를 위해서 규제 완화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규제 완화는 자산가치의 상승세를 만들어냈다. 그런데 자산의 대부분은 부유층이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불평등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셋째, 노동시장 경로이다. 정부는 인플레이션 압력을 줄이기 위해 노동자의 협상력을 떨어트리는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중앙은행 독립성이 커질수록 화폐시장 긴축과 실업률 증가를 예상한 정부는 어쩔 수 없이 노동시장 규제 완화로 대응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그리하여 중앙은행 독립은 비정규직 노동자, 파트타임 노동자의 증가 현상을 만들어냈고 결국 불평등을 키웠다.

세계은행 조사보고서는 중앙은행 독립이 직접 불평등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라는 단서를 단다. 그럼에도 중앙은행 독립이 정부 정책을 바꾸도록 밀어붙이는 역할을 함으로써 결국 불평등을 키운다고 이 보고서는 설명한다. 이 보고서는 121개국의 1980~2013년 데이터를 이용하여 포괄적인 경험 연구를 한 결과를 보여준다. 이에 따르면 중앙은행의 독립성과 불평등은 밀접히 연관되어 있고 불평등을 일으키는 세 가지 경로도 확인된다.

중앙은행 독립에 누가 가장 큰 이해관계를 갖는가를 따져봄으로써 중앙은행 독립성이 불평등의 확대로 연결된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중앙은행 독립에 가장 큰 이해관계를 가지는 그룹은 금융부문이다. 금융부문은 정부가 통제하는 중앙은행보다 정부로부터 독립적인 중앙은행을 통할 때 더 유리한 거래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따라서 금융부문은 중앙은행의 독립을 선호한다. 중앙은행가들은 독립의 가장 강력한 옹호자이다. 그 이유는 독립한 중앙은행을 통해서 자기의 위치를 가장 안전하게 확보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들이 알기 때문이다.

노동조합은 독립한 중앙은행이 실업률을 낮추는 데보다 물가를 안정시키는 데 더 큰 비중을 둘 것이라고 점친다. 따라서 노동조합은 중앙은행의 독립을 선호하지 않는다. 노동조합은 정치 영역에서 금융정책이 다뤄지기를 바라는데 그 이유는 거기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기가 더 쉬울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비금융 기업들은 산업 분야, 재무 구조, 무역 의존도 등에 따라 중앙은행 독립에 대한 선호도가 다르다. 예를 들어 차입이 많은 기업은 긴축 정책보다 완화 정책을 선호하고 따라서 중앙은행 독립에 덜 우호적인 태도를 보인다. 보통의 비금융 기업들은 대체로 경제의 안정성이 장기투자를 보장한다고 보아 중앙은행 독립을 선호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비금융 기업들은 중앙은행 독립이 전반적인 금리 수준을 높이고 자금 사정을 어렵게 하지 않을까를 걱정한다. 그런 면에서 비금융 기업들의 중앙은행 독립성에 대한 태도는 이중적이다.

문제는 중앙은행이 금융시장의 영향력에서 독립하는 것이다

중앙은행의 정치적인 독립은 금융세력이 항상 꿈꾸어 왔던 목표였다. <바젤탑>의 저자 아담 레보어에 따르면 금융세력은 중앙은행의 정치적인 독립을 이뤄내기 위한 목적으로 국제결제은행(BIS)의 설립을 추진했다. 중앙은행들의 모임인 국제결제은행이 설립된 것은 1930년이다. 그러므로 거의 100여 년 전부터 금융세력은 중앙은행의 독립을 조직적으로 추진해 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금융세력은 항상 중앙은행의 독립을 추진해 왔지만 그것이 일직선으로 나아가는 걸음걸이는 아니었다. 세계대전 중에는 중앙은행 독립이 있을 수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이후에도 1970년대 초까지는 중앙은행의 독립성이 별로 강조되지 않았다. 케인스주의가 지배하던 당시에는 중앙은행의 여러 기능 가운데 재정 확장을 뒷받침하는 "정부의 은행"이라는 측면이 강조되었다. 이때는 정부의 일자리 창출 정책에 기여하기 위한 중앙은행의 국채 인수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중앙은행의 독립성이 새삼 강조되기 시작한 계기는 1970년대 초반 브레튼우즈 체제의 붕괴와 그에 이은 급격한 인플레이션의 발생이었다.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자산 가치가 줄어드는 것을 걱정한 금융자본은 자기의 목소리를 본격적으로 내기 시작했다. 구체적으로 금융세력은 중앙은행이 정치와 정부의 영향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또한 그들은 중앙은행이 그동안 정부의 재정 확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수행해 왔던 역할을 줄여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부상한 중앙은행 독립성 개념은 1980년대에 이론적 체계화를 거친 다음 1990년대에는 세계 여러 나라들로 퍼져나갔다.

중앙은행의 정치적인 독립성이 강조되던 시기에 중앙은행들은 금융시장의 관리자 역할이 아니라 후견인 역할을 주로 수행했다. 예를 들어 미국 연준의 경우 주식시장이 무너질 때는 항상 그 뒤를 돌봐주었고 위기에 빠진 금융기관들에는 대마불사의 원칙에 따라 거액의 구제금융을 제공했다. 그리고 2008년 위기 이후 자산가격이 무너질 때는 중앙은행이 스스로 나서서 시장 조성자 역할을 함으로써 자산가격의 회복을 도왔다.

중앙은행들은 정치적인 독립이라는 구호 뒤에서 금융시장으로부터의 독립성을 점차 잃어갔다. 중앙은행 정책에 정치가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은 자본의 개입을 허용하자는 주장과 동의어가 되었다. 중앙은행들은 시장과 소통한다는 명분으로 시장의 기대와 요구를 만족시키는 역할을 더 잘 수행하는 데에 힘을 쏟았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이 지속된다면, 정운찬 교수가 얘기하는 바와 같이, 금융정책의 "사실상 사유화"가 이뤄질 것이다. 이런 점 때문에 연준 부의장을 지낸 앨런 블라인더 교수(정운찬 교수의 지도교수) 같은 경우는 중앙은행이 금융시장으로부터 독립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중앙은행은 금융시장 참가자들의 영향을 받기가 쉽다. 그런데 금융시장 참가자들은 누구인가? 재벌 대기업, 금융그룹, 부유층이 금융시장의 주요한 참가자들이다. 실제로 중앙은행이 이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것이 정치적인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는 세계 중앙은행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최근 세계적인 인플레에 대응하기 위해 강력한 긴축정책을 펴는 미 연준으로 인해 전 세계 경제가 흔들리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중앙은행 정책의 중요성과 진보적인 정책의 방향

중앙은행은 금융정책의 수립이라는 임무를 떠안고 있다. 이것은 재정정책과 함께 거시경제정책을 떠받드는 두 축이다. 오늘날 중앙은행은 금융의 지휘자 역할을 수행한다. 중앙은행은 이자율이나 유통 화폐량을 조절해 화폐가치에 영향을 끼치고 이를 통해 경제 활동이나 자산가격의 전반적인 움직임에 변화를 줄 수 있다. 부동산, 유가증권 등 자산가격의 변동은 분배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 현대사회에서 중앙은행이 차지하는 중요성은 더 강조할 필요조차 없다. 이제 중앙은행 독립과 관련이 있는 몇 가지 진보적인 정책 과제를 생각해보기로 하자.

첫째, 중앙은행 독립성 개념을 올바르게 세워야 한다. 그래야만 사회·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 수행해야 할 중앙은행의 역할을 제대로 정할 수 있다. 중앙은행 독립 개념은 정부와 정치로부터의 독립, 외국 중앙은행(연준)으로부터의 독립, 금융시장으로부터의 독립이라는 세 가지 차원을 갖는다. 여기에서 중앙은행의 정치적 독립은 진보와 거리가 먼 개념이다. 우리가 중앙은행의 정치적인 독립이라는 신화에 갇히면, 문재인 정부가 그랬듯이, 중앙은행에 꼭 요구해야 할 임무를 제기조차 못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이와 달리 중앙은행이 연준이나 금융시장으로부터 독립하는 문제는 앞으로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둘째, 특수 이익보다 일반 이익을 우선하는 중앙은행 거버넌스를 갖춰야 한다. 이것은 중앙은행이 연준이나 금융시장으로부터 독립하는 문제와도 연결되어 있다. 중앙은행은 그 속성상 노동자들의 이해보다는 금융업자나 재벌 기업의 이해에 기울기가 쉽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중앙은행의 의사결정 기구가 대체로 특수 이익만을 반영하는 구조로 짜여 있기 때문이다. 민주적인 책임성을 갖는 중앙은행이라면 일반 이익을 반영할 수 있는 의사결정 구조를 갖춰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은행 의사결정기구인 금융통화위원회의 구성을 바꿔야 한다. 현행 금융통화위원회는 금융업자나 기업들의 특수 이해만을 반영하는 비민주적인 구조로 이뤄졌다. 금통위를 일반 이익을 대변하는 기구로 바꾸기 위해서는 거기에 노동자, 소상공인, 농민 등의 대표를 포함시켜야 한다. 미국의 경우도 연준이사회의 감시를 받는 연준 지역은행이사회에는 농업, 상업, 서비스업, 노동자, 소비자의 이해를 대변하는 장치가 마련되어 있다고 한다.

셋째, 중앙은행이 더 많은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파월 미국 연준 의장은 중앙은행이 법이 규정한 범위를 넘어서 너무 많은 것을 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는 중앙은행의 임무를 최소한으로 좁혀야 한다고 보는데, 사실 이러한 견해는 보수주의자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불평등, 금융배제, 기후위기와 같은 여러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중앙은행의 임무를 확대해야 한다. 나아가 정부와 중앙은행의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

한국은행법은 금융통화위원회에 막강한 권한을 부여하고 있다. 금융통화위원회는 그러한 권한을 사용하기는커녕 사문화하고 있다. 한국은행에 더 많은 임무를 부여함으로써 그러한 권한을 실제로 사용하도록 해야 한다. 예를 들어 한국은행법에 규정된 대정부 직접 여신이나 국채 직접 인수와 같은 조항을 활용하여 특별 기금을 만든다면 금융배제와 같은 사회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도움받은 자료>

송종운, "중앙은행 전성시대, 새로운 실험대에 올라선 한국은행", <참세상>, 2014.5.9.

아담 레보어 저, 임수강 역, <바젤탑>, 더늠, 2022.11.

앨런 블라인더 저, 정운찬 역, <소리 없는 혁명-중앙은행 현대화>, 2009.

조지프 스티글리츠 저, 박형준 역, <유로>, 2017.

한국은행 워싱턴 주재원, "현지정보" 2023.1.10.

Adam Tooze, "The Death of the Central Bank Myth", FT, 2020.5.13.

Michaël Aklin, Andreas Kern, Mario Negre, "Does Central Bank Independence Increase Inequality?", World Bank, Policy Research Working Paper 9522, 2021.

Thomas F. Cargill, "The Myth of Central Bank Independence", MERCATUS Working Paper,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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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수강

임수강 금융평론가(linsk@hanmail.net)는 정치경제학을 전공한 독립 연구자이다. 증권회사에서 채권 트레이더로 일했고 은행 경제연구소와 금융경제연구소 등에서 연구 활동을 했다. 최근 국제결제은행(BIS)의 역사를 다룬 <바젤탑>을 번역해서 출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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