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누구라도 익명화 될 수 없는 특별함을 말하다

[프레시안books] 유진화의 <빛나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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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라는 말처럼 평범하면서도 강력하게 우리를 규정짓는 단어가 또 있을까? 일상을 살아간다는 것, 그것은 생물학적 생명을 보존하고 사회문화적 정체성을 유지하며, 그로써 삶을 자신의 것으로 확인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확보되는 일상이 진정 자신을 만족시키고 스스로를 의미 있는 존재로 만들어주는지는 또 다른 문제이다. 대개의 우리는 일상을 ‘살아간다’기보다, 일상에 ‘끌려’다니며 하루하루를 ‘생존’하기에 바쁘지 않은가? 급박하게 내달리는 일상을 뒤쫓기 바쁜 나머지, 만족은 언제나 연기되고 의미는 짐짓 사치스러운 꿈처럼 여겨지곤 한다. 그런 뜻에서 일상은 의미가 망각되고 존재가 몰각하는 늪이자 수렁처럼 지각되기 일쑤다. 일상과 ‘다른’ 삶은 과연 가능할까?

역사적으로 모든 혁명은 일상을 뒤바꾸려는 시도와 다르지 않았다. 예컨대 정치적 억압을 깨뜨림으로써 모두가 자유롭게 원하는 대로 사는 세상을 추구한다든지, 경제적 불평등을 타파함으로써 누구 하나 부족함 없이 살아가는 삶을 꿈꾼다든지, 혹은 문화적 역량과 가능성을 극대화함으로써 정신과 몸의 발전을 촉진하려는 열망이 그에 속한다. 이 모든 것은 삶 전체의 완전한 변혁을 달성하려는 노력이지 않을 수 없다. 그로써 현재와는 ‘다른’ 삶, 이전과는 구별되는 ‘삶으로서의 일상’을 구성하려는 욕망이 나타난다. 근대의 분기점을 표시하는 대혁명들, 즉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이나 1917년의 러시아 혁명 등은 이렇게 삶과 일상의 완전한 일치를 노정했던 사건들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근대 혁명들이 펼쳐놓은 세계가 그 같은 이상의 성취에 미흡했음을 우리는 잘 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는 여전히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불평등이 판을 치고, 문화적으로도 완전히 발전해 있지 않다. 일상은 부조리에 포위된 채 진정 바라는 삶의 모습으로부터 동떨어져 있는 것이다. 근대의 혁명은 실패했는가?

어쩌면 혁명이라는 단어를 통해 흔히 연상하는 것들, 가령 기성의 국가조직을 붕괴시키고 현존하는 사회적 구조를 철폐한다는 ‘큰 그림’에 우리가 너무 매달려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일상은 그런 큰 그림의 하부에 존재하는 미세하고 작은 조각들로부터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러시아 혁명의 주역 중 하나였던 레온 트로츠키는 대혁명이 성공한 후, 한동안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사회문화 비평에 몰두했다. 예를 들어, 1920년대 초엽에 그가 쓴 글들의 제목은 ‘러시아인들이 잘하는 욕’ ‘평어와 경어’ ‘보드카, 교회, 영화’ ‘정중함과 예의바름’ 등으로 일상생활의 시시콜콜한 부면들을 다룬 것이었다. 레닌이 반신불수가 된 이후, 당내 헤게모니 투쟁에 전념해야 할 시기에 ‘한가롭게’ 문화비평이나 하고 있던 그에 대해 ‘재능을 낭비한다’는 비아냥이 나올 정도였다. 왜 트로츠키는 정치의 전면으로부터 일상의 배면으로 후퇴했을까? 아마도 그는 국가를 쓰러뜨리고 새로운 사회를 대체하는 것만으로는 혁명이 완수될 수 없다고 믿었던 듯하다. 달리 말해, 제도를 제도로 바꾸는 것, 낡은 규범을 새로운 규범으로 갈아치움으로써 동일한 권력의 메커니즘을 반복하는 것은 진정한 혁명이 아니라고 보았던 것이다. 혁명은 제도와 규범의 파괴·재건만으로 성취되지 않는다. 삶의 공식적 측면을 비공식적 측면에서, 즉 일상의 차원에서 보완할 때 비로소 완성될 수 있다. 트로츠키는 이렇게 물었다. 새로운 사회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공동의 관계를 만들 수 있을까? 사람들이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면 어떻게 축하해 주어야 할까? 누군가 죽었을 때 애도하는 방법은 무엇이며, 어떻게 슬픔을 달래줄 수 있을까? 어떤 일상으로부터 사람들은 충만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가?

삶은 생존이나 연명과 다르다. 일상을 삶으로 살기 위해서는 자질구레하고 시시콜콜한 생활의 면면들을 어떻게 의미와 보람으로 채울 수 있을지에 대한 치열한 고민과 실천이 필요하다. ‘일상생활의 혁명’이란 바로 그 같은 나날의 노력을 가리키는 이름이라 할 수 있다.

▲ <빛나는 날> ⓒ희망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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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화의 신간 <빛나는 날>(희망읽기, 2023)은 일상생활의 혁명이라는 주제를 지금-여기의 시점에서 풀어본 책이다. 본문만 200여 쪽을 조금 넘는 분량이지만 어딘지 도발적인 표지나 속을 가득 채운 글자들이 예사롭지 않다. 제목을 꾸미는 수식 역시 거창하다. ‘최고가 아닌, 최적의 삶을 위한. AI시대의 일상혁명 이야기.’ 무언가 거대하고 원대한 혁명의 발상, 그렇게 도래할 엄청난 미래에 대한 웅변을 기대한다면 내려놓으시라. ‘빛나는 날’은 부르주아 혁명이나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같은 근대의 거대 사건들에 대한 서술이 아니다. 오히려 저자는 지금-여기라는 지극히 현재적이고 평범한 삶의 현장에서 불거져 나오는 일상의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싶어 한다.

총 4장에 50갈래 이야기들로 이루어진 이 책은 종래의 장르적 구별을 따르지 않는다. 첫 세 장을 이루는 42가지 이야기 갈래들이 이채롭다. 우선 짝수 갈래를 이루는 글들은 7세 소녀 나나, 17세 청소년 오푸름, 27세 여성 길유, 37세 남자회사원 한태양, 47세 전업주부 남우누리, 57세 중년 남성 박범, 67세 지리산 할머니 양지애가 화자 내지 주인공이 되어 자신들의 일과나 사건에 대해 서술한다. 분량도 일정하지 않고, 뉴스에 나올 법한 ‘큰 일’을 다루고 있는 것도 아니다. 친구들과 만나 나눈 이런저런 대화들, 학교 운동회와 가족모임과 여행, 친구들에게 보내는 편지, 아이와 다녀온 유치원 이야기…. 글의 주어를 우리들 중 어느 누구라 불러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일상사의 다채로움이 묻어나는 단편들이 그것들이다. 하지만 세상 누구라도 익명화될 수 없는 특별함을 갖는다고 한다면, 이 단편들이야말로 정말 특별할 것 없는 특별한 이야기들의 정수를 보여주는 게 아닐까 싶다.

홀수 갈래로 나아가는 글들은 짝수 갈래의 이야기들에 화답하는 에세이로 구성된다. 전자가 인물과 배경, 사건으로 만들어지는 소설적 풍경을 보여준다면, 후자는 그에 대한 성찰적 내면 풍경을 선사한다고 해도 좋을 듯하다. 이 양 갈래의 이야기 계열들은 도심 소극장에서 열리는 ‘일상다큐축제’로 모아지며 점점 풍성해지는데, 사실상 오십 가지 이야기들 전체야말로 그 다큐축제의 주된 내용이라 할 수 있다. 글의 초입부터 모든 등장인물들이 일상다큐축제에 대해 대화를 나누며 기대감과 흥미, 관심사를 나누는데, 실상 일상다큐축제란 바로 그들 자신의 이야기에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을 읽는 독자의 이야기 또한 그 축제의 한 부분을 ‘이미’ 형성하고 있다고 말해도 틀리지 않을 성싶다. 그렇다. 책을 읽는다는 경험 자체가 이미 책이 함축하고 있는 모종의 축제, 일상성의 혁명에 동참하고 있는 셈이다.

그럼 어떤 내용들이 이 갈래들을, 이야기들의 한 마당을 채워 넣고 있을까?

1장 ‘몸의 자유’는 빡빡한 현대 사회에 포위된 우리의 일상이 어떤 이면을 동시에 품고 있는지, 그 이면으로 나아갈 가능성과 방법은 무엇인지 돌아보는 장면들이다. 4번째 갈래의 남우누리의 사정을 들어보자. 마흔 일곱에 이른 그녀는 폐경에 접어들며 지난 인생을 반추한다. 여느 집 가정주부들이 대개 그렇듯, 그녀 역시 전업주부라는 틀에 매여 반평생을 남편과 아이를 수발하며 살아왔고, 이제 문득 자신이 여성으로서 ‘사그라들고’ 있음을 깨닫는다. 물리적으로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묻는다. 여자로서 이 세월은 지나갔지만, 여자로서 그렇게 흘려보낸 시간을 인간으로서 다시 살아보겠다고. 다시 한 살로 태어나야겠다고. 누구도 기억 못 하는 자신의 생일을 가족들에게 알리자 당장 짜증 섞인 반응이 되돌아왔지만, 온전히 자신만의 시간을 보내며 늦잠을 잔 그녀는 깜짝 놀란다. 무관심하던 식구들이 자신의 재탄생을 축하해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우누리가 우리에게 건네고 싶던 말은, 무엇보다도 스스로 먼저 태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안 하던 것을 해 보고, 하지 말라고 금하는 것을 먼저 하기 시작하는 것, 거기서 우리는 늘 다시 태어날 수 있다. 몸은 그 첫 번째 방법이라 할 만하다.

아홉 번째 이야기가 여기에 상응하는 느낌을 준다. 몸이 아파 며칠을 앓아 지낸 경험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며칠의 시간은 몸이 쉬고, 마음이 쉬고, 다르게 변신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일종의 타임머신으로서 병앓이는, 강제적인 방식으로 우리를 다른 시공간으로 옮겨다 놓는다. 결국 몸이다. 몸이 먼저 나서고, 마음이 따라간다. 우리는 그렇게 변화에 자기도 모른 채 탑승하는 것이다.

2장 ‘공간의 감정’과 3장 ‘관계의 흥’도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등장인물의 체험을 경유해 이를 성찰적으로 되돌아보는 과정을 거쳐 점차 증폭된다. 흔히 감정은 우리 정신에 내장된 기분처럼 받아들이지만, 그것은 창조되는 것이다. 예컨대 19번째 갈래의 이야기를 살펴보자. 아마도 폐휴지를 수거하는 화자는 거기서 어떤 여자의 변화를 목도한다. 매번 그녀는 색색의 매직과 형광펜으로 시간표를 만들고 버려왔기에. 오십대 중반으로 평범한 여성으로 밝혀지는 그녀가 시간표대로 살아가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대신, 매번 시간표를 그리는 행위를 통해 그녀가 자신의 하루를, 일주일을, 이어지는 날들을 설계하고 창조하고 있음을 즐기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거기에는 자신이 욕망하는 삶, 이루고자 하루하루 다가서는 생명의 궤적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34번째 갈래는 그 같은 창조의 과정에 개입하는 언어의 힘을 절실히 보여주고 있다. 아내와 다툰 한태양은 화해를 위해 함께 본 영화에 대한 감상문을 적기 시작한다. 회사문서나 만들던 그가 영화감상문을 쓴다는 것은 나름 대단한 모험이었다. 처음에는 기승전결에 맞춰 도식적으로 내용을 전개하더니, 점차 역사와 사회, 개인과 그의 감정에 대해 자기만의 이해와 감상을 써내려간다. 영화는 <동주>였고, 한태양은 어느새 윤동주에게 감정이입하다가 현재의 자신을 되돌아보며 자유와 저항의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분명 그가 쓴 감상문은 프로페셔널하지도 않고, 숙련된 감상평에도 못 들어갈 것이다. 하지만 그런 따위는 문제가 아니다. 글의 말미에 덧붙여진 것처럼, 한태양은 나이, 성별, 직업, 취미, 특기, 재산, 경쟁, 성공에 대한 열망 등 일상을 옥죄는 주제들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감각과 지성 앞에 솔직히 자기를 내보였기에 자유를 느꼈다. 아마도 그것은 영화를 보기 이전, 더 정확히 말해 글을 쓰기 이전의 자기와는 달라진 자신에 대한 낯선 감각이었을 것이다. 창조란 그렇게, 이질적인 삶의 발견이 아닌가?

우리 자신을 투여할 만한 수많은 이야기 갈래들을 일일이 적기에는 지면이 모자라다. 눈치빠른 독자라면 총 4장에 50갈래 이야기들 중 마지막 4장과 8가지 갈래는 대체 무엇인지 궁금해할 것이다.

4장의 제목은 ‘마음의 축제’이다. 여기에는 ‘마음’ ‘감각’ ‘오성’ ‘욕망’ ‘이성’ ‘감정’ ‘판단력’ ‘이야기’의 여덟 가지 이야기가 들어 있다. 다소 딱딱한 소제목들이지만 내용은 소설처럼 부드럽고 흥미롭게 읽힌다. 가령 오성을 다루는 45번째 갈래는 단 두 문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침에는 세 개, 저녁에는 네 개를 주다 반발에 부딪히자 순서를 바꾸는 주인. 이에 속는 자들은 왜 숫자가 달라졌는데도 여전히 배고픈지 모른다. 하지만 전체 7개라는 숫자와 그 개념을 이해하는 자들에게 조삼모사는 통하지 않는다. 이를 이해하고 정당한 분배를 요구하는 것은 그 자체로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세상을 이해하려는 노력 없이 변화는 오지 않는다. 오성, 즉 지적인 인식이란 그 같은 노력을 필요로 한다. 이 책이 범상한 철학교과서와 다른 부분이 여기 있다. 이를 더 큰 차원에서, AI와의 관계로 다루는 부분이 46번째 갈래인 ‘욕망’인데, 독자들이 직접 꼭 읽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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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이즈음에서 제목을 수식하던 ‘AI시대’는 대체 무얼 뜻하느냐고 묻는 이들도 있을 성싶다. 이 책은 기술공학적 발전이나 과학적 전망에 대한 것이 아니기에 더욱 궁금증이 커져 있을 수도 있다. 저자는 AI로 대변되는 과학기술적 성과를 거부하거나, 그와 무관한 삶을 지향하는 게 아니다. 이야기 갈래 곳곳에서 로봇과 기술, AI 등에 대한 언급들이 등장하며, 등장인물들 역시 우리 시대를 주도하는 그 같은 혁신들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오히려 과학기술의 지배가 전면화되는 이 시대에, 그래서 인간적 삶의 일상이 무용해질 듯한 이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 묻고 답하는 지점들을 살펴봐야 한다.

‘빛나는 날’이란 인간과 인간, 인간과 비인간, AI와 AI가 서로 교차하고 접속함으로써 만들어내는 협력의 네트워크를 가리킨다. 인간은 인간끼리, 비인간은 비인간끼리, AI와 같은 기술적 매체들로만 이루어진 협의의 네트워크가 아니라 모든 존재자들이 공동으로 일구어내는 협력적 공동체의 일상이 바로 ‘빛나는 날’이라는 뜻이다. 근대 세계가 각기 구별되는 네트워크들로만 만들어져 인간의 소외뿐만 아니라 비인간의 소외도 낳고 말았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네트워크들의 총합을 통해 어떤 존재도 소외되지 않고 상호 연결됨으로써 일상을 진정한 삶으로 변형시키는 과정에 참여하는 시대이다. 그렇다면 왜 저자가 이 책의 등장인물들을 평범한 생활인들, 누구의 이름을 넣어도 보편적으로 대체가능한 사람들로 했는지 충분히 이해할 것이다. 우리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그 같은 협력의 네트워크로부터 빠져서는 안 되는, 전체의 충만한 공동체가 새로 구성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일상의 혁명은 나날의 권태와 무기력을 떨치고 항상 즐겁고 유쾌하기만 한 동화 같은 시간들이 아니다. 그와 반대로, 등장인물들이 겪고 있는 것과 같은 갈등과 고민, 투쟁과 좌절의 다양한 순간들을 포함하며, 그것을 어떻게 돌파해 가는지, 그로써 새로운 날들을 만들어 갈 수 있는지에 따라 결정된 미지의 순간들이다. 주변의 이웃과, 주어진 조건과 어떻게 협력하며 공생하고 공존할 수 있는가, 그렇게 어제와는 다른 오늘을, 내일을 만들 것인가? 저자가 이 네트워킹을 ‘희망의 춤’이라 부르는 까닭을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문제는 이 글을 읽는 독자 자신도 그에 참여할 것인지 결정하는 데 있다. Shall we dance?

사족. 저자는 우리 시대의 미학과 문화연구에서 대표적 지식인인 심광현 교수의 부인이다. 이런 설명이 ‘빛나는 날’을 만들어낸 저자의 이름을 가릴 리 없다고 믿는다. 다만, 일상의 혁명을 섬세하고 유려한 필치로 그려낸 저자의 작업을 심광현 교수의 해제를 통해 보충한다면 독서의 감응력은 한층 배가될 것이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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