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빛 같은 숨결로만

[시로 쓰는 민간인학살] 전남 화순군 학살사건

우리의 현대사는 이념갈등으로 인한 국가폭력으로 격심하게 얼룩지고 왜곡되어왔습니다. 이러한 이념시대의 폐해를 청산하지 못하면 친일청산을 하지 못한 부작용 이상의 고통을 후대에 물려주게 될 것입니다. 굴곡진 역사를 직시하여 바로잡고 새로운 역사의 비전을 펼쳐 보이는 일, 그 중심에 민간인학살로 희생된 영령들의 이름을 호명하여 위령하는 일이 있습니다. 이름을 알아내어 부른다는 것은 그 이름을 존재하게 하는 일입니다. 시간 속에 묻혀 잊힐 위기에 처한 민간인학살 사건들을 하나하나 호명하여 기억하고 그 이름에 올바른 위상을 부여해야 합니다. <프레시안>에서는 시인들과 함께 이러한 의미가 담긴 '시로 쓰는 민간인학살' 연재를 진행합니다. (이 연재는 문화법인 목선재에서 후원합니다) 편집자

물빛 같은 숨결로만

어머니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습니까, 당신은 황급히 제 입을 틀어막습니다

아들아, 세상에는 저 물빛 같은 숨결로만 느껴야 하는 이름이 있단다 오로지 자음과 모음으로만 그리워해야할 세 음절

역사는 지우고 당신은 망각하고 세상과 나는 몰라야 하는 그날 우리는 무엇이었습니까

반군을 잡겠다던 토벌군에게 주민들은 청야淸野의 대상

화순읍 열두 개 면, 백아산과 모후산 화학산과 천태산 또 또, 천왕산과 두봉산은 사람을 품어내느라 안간힘을 썼으나 국가는 국민을 위해 무엇을 했습니까

인공기를 앞세운 인민군복장의 인민군들, 인민공화국만세를 강요했으나 알고 보니 빨치산과 부역자 색출을 위해 파 놓은 토벌대의 함정

총구 앞에 허름해진 목숨들은 제 집 마당에서 김채골에서, 봉동마을에서, 도장마을과 동두산 마을에서 원천리에서, 복암리 구봉산아래서 유마리 마을앞 논바닥에서 다산리 마을회관에서 주산리에서 삼미마을에서, 용촌마을에서 송단리에서, 서리에서 수양산 기슭 월산마을에서 야사리에서, 동유마을에서 와천리에서 암곡리에서, 마산리에서 장동리에서, 천변리에서 ... 망개 열매처럼 붉은 피 쏟으며 넘어갔습니다

어떤 목숨들은 빨갱이 부역자로 지목당해 넘어가고 어떤 목숨들은 잠결에 어떤 목숨들은 잠재적 빨치산으로 간주되고 어떤 목숨들은 군경에 쫓겨 산사람이 된 아들 대신 대살 되고 또 어떤 목숨들은 이유가 없고

이들 중 또 어떤 목숨들은 "돈을 가져오면 내 준다" 는 교환 값으로

군경의 군홧발이 지나가자 다시 국가는 남은 피붙이를 향해 분쇄작업에 돌입했는데……. 당신은

당신은 당부하셔요

입을 봉쇄해라

저 물빛 같은 숨결로만 느껴라

▲ 화순군 민간인 희생자 봉헌관 일부와 추모탑. ⓒ김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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