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 임고강변 민간인 희생자 위령탑에서  

[시로 쓰는 민간인학살] 임고강변의 민간인 학살사건

우리의 현대사는 이념갈등으로 인한 국가폭력으로 격심하게 얼룩지고 왜곡되어왔습니다. 이러한 이념시대의 폐해를 청산하지 못하면 친일청산을 하지 못한 부작용 이상의 고통을 후대에 물려주게 될 것입니다. 굴곡진 역사를 직시하여 바로잡고 새로운 역사의 비전을 펼쳐 보이는 일, 그 중심에 민간인학살로 희생된 영령들의 이름을 호명하여 위령하는 일이 있습니다. 이름을 알아내어 부른다는 것은 그 이름을 존재하게 하는 일입니다. 시간 속에 묻혀 잊힐 위기에 처한 민간인학살 사건들을 하나하나 호명하여 기억하고 그 이름에 올바른 위상을 부여해야 합니다. <프레시안>에서는 시인들과 함께 이러한 의미가 담긴 '시로 쓰는 민간인학살' 연재를 진행합니다. (이 연재는 문화법인 목선재에서 후원합니다) 편집자

영천 임고강변 민간인 희생자 위령탑에서

I

올 겨울 가장 추운 바람이 몰아친 임고강변

심장까지 검푸르게 얼어붙은 강물의 하얀 핏줄들이 쩍쩍 갈라지고

칼바람에 맨살 드러내고 해지는 쪽으로 고개 숙인 누런 억새들 억억 우는데

사람 발길 하나 없는 백골의 민간인 위령탑 옆에

오백이십 여 혼령이 부복한 채 우우우우 울고 있네

II

암울하고 비참했던 속박의 밤을 이기고 맞이한 해방된 조국

푸른 산천은 굶주린 백성의 품에 풍요의 결실을 안겼으나

내 것이 내 것이 아니고 네 것도 네 것이 아니라며

부당하게 앗아가는 강제공출의 갈퀴에 마음까지 찢긴 채 ,

땅은 땅을 일구는 사람의 것

땅 주인은 그 땅에 생명 불어넣는 사람이라며

땅 제 주인에게 돌려 달라 부르짖던 마흔일곱 10월 항쟁 희생자

III

좌익이 뭔지 우익이 뭔지 들어도 알지 못하고

다 서로 어깨 부딪고 등 어루만지는 이웃으로 보듬고 살던 순박한 양민들

이념의 총검으로 좌익 사상 미리 들어낸다며 나무기둥에 묶고 목숨 거둬

미리 파놓은 구덩이에 돌덩이처럼 굴려 묻어버린 보도연맹 이백육십 희생자

IV

국가는 국민 위해, 국민은 국가 위해

서로 밀고 끌고 한 방향으로 가는 게 땅에 붙박고 사는 일인 줄 알았는데

힘없고 순박한 백성들 지키고 보호하고 배불려 살리지도 못하는 난리 중에

오지도 않은 빨갱이 들어오면 도울 위험 지레 겁먹고 애꿎게 앗아간

세상 아무 관련도 없는 애먼 주민들 목숨까지 이백열아홉 혼령들

V

땅에 박은 말뚝에 묶여 포승줄로 손까지 결박당한 채 총구 앞에 두고

빤히 나를 쳐다보는 그의 어두운 눈동자에 심장이 멎고 발길 멈출 때

위령탑 위로 까마귀 한 마리 날아와 앉아 날카롭게 울더니

총알에 관통 당하고 쓰러져 구덩이에 널브러진 그의 피 흘리는 모습이 겹쳐지고

인적 없는 임고강변 칼바람 한 줄기 훅 불어 갈색 억새들 우우우우 울고

푸르고 푸른 겨울 하늘은 부복한 오백이십 여 혼령 위로 하얀 소복 같은 눈물을 뿌리고 있네

▲ 임고강변 위령탑. ⓒ여국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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