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여 년 전 서울시 마포구의 평온한 저녁. 자려고 누웠는데 옆집에서 소리가 들린다. 다투는 듯한 소리와 함께 물건이 부딪히는 소리. "싸우나?" 생각이 드는 순간 옆집 현관문이 우당탕 열리더니 사람 뛰는 소리가 들린다. 오래된 아파트 복도를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다다다다" 맹렬하게 달려가는 소리가 스테레오로 들린다. 맨발이다.
세월이 흘러 부산시 사하구 바다가 보이는 주말 오후. 거실 소파에서 나른한 오후 낮잠이 들려는데 옆집이 시끄럽다. 발코니를 통해 바람결을 타고 전해지는 여성의 목소리. "제발 그만 좀 때려." 아내를 코너에 몰아넣고 사람 하나 잡듯 때리나보다. 경찰에 신고할지, 아니면 시간이 급하니 내가 직접 맞은편 집 벨을 누를지 고민이 시작됐는데 순간 옆집 현관문이 확 열린다. 얼마나 거칠게 열었는지 우리집 현관문이 덜컹거릴 정도였다.
옆집 여성이 탈출해 아파트 계단을 '다다다다' 달려 내려간다. 말로만 듣던 '걸음아 날 살려라.' 역시 맨발이다. 발소리가 사라져 가는데 곧 '쿵'하는 소리에 다시 문이 열리더니 이번엔 '두두두두' 남편이 쫓아 달려 내려간다. 나는 마음을 다해 옆집 아주머니를 응원했다. 그 와중 다시 옆 집 문이 열린다. 조용히. 그 집 아들이다. 천천히 부른다. "엄마... 아빠..."
며칠 후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한 여성과 마주쳤다. 어두운 곳이었는데 긴머리 풀어헤치고 선글라스까지 끼고 있었다. "우리 동네에 영화배우가 사나?" 생각이 드는 순간 "아!" 하며 옆집 여성임을 깨달았다. 서로 말 없이 지나쳤다. 동네 가게에 갑자기 맨발로 들어온 여자가 있으면 여자들은 안다. 말없이 슬리퍼를 내준다.
과거 우리 어머니들과 할머니들은 남편들로부터 많이 맞고 살아야 했다. 맞으면서도 어디 하소연 할 데도 없으니 그걸 통계로 파악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었다. 그래도 21세기 들어 인권에 대한 인식과 폭력에 대한 경각심이 자리 잡으면서 배우자 또는 이성에 대한 폭력이 법의 테두리 안에서 엄히 다루어지고 있긴 하다. 그럼에도 배우자 간, 이성 간 폭력이 아직도 횡행하고 있다. 특히 연인 간 폭력이 해결이 시급한 사회문제로 부상했다.
할아버지, 아버지로부터 배웠나? 데이트폭력 이어가는 MZ세대
<"치마 입지 말랬지" 여친 묶고 이마 박치기 20번> (1월22일),
<"잔다며 친구랑 술 마셔?" 10대 여친 폭행한 40대> (1월22일),
<성관계 거부하자 주먹 날렸다…8년 사귄 남친 정체 '전과 14범'> (1월25일),
<"전남친 성관계 말해"…여친 갈비뼈 부러뜨리고 성폭행한 40대> (2월6일),
<"왜 데이트폭력 신고해" 옛 연인 납치·감금한 20대 구속영장> (2월13일),
<여자친구 성폭행하고 고막 파열시킨 소방공무원…"외도 의심"> (2월14일),
<"너 다른 남자 있지?"…70대 내연녀 살해 시도한 80대 '실형'> (2월14일),
<전 여친에 모르는 사람 성관계 영상 전송… 60대男, 징역 3년> (2월17일),
<여성 무릎에 피... 응급실에 온 수상한 커플, 남성 체포> (2월20일)
최근 한 달 내 눈에 들어온 기사들만 이 정도다. 모조리 여성에 대한 남성의 폭행이다. 물론 데이트폭력엔 남성에 대한 여성의 폭력도 상당히 많다. 그러나 살인에 이르는 폭력, 그리고 심각한 상해를 유발해 언론에 보도될 정도의 폭력은 거의 전적으로 남성들의 폭력이다.
이들 남성들의 폭력은 의사, 변호사, 교수 등 배웠다고 덜 하지 않고, 나이가 들었다고 봐주지 않는다. 몇 년 전에는 심지어 '페미니스트'라는 젊은 논객의 데이트폭력이 문제가 되기도 했다. 특히 최근의 데이트폭력은 여성이 이별을 통보하는 경우 스토킹을 통해 기회를 노리다가 결국 일가족을 살해하는 경우로까지 발전하는 끔찍한 범죄가 되었다.
위 범죄들에 대해 중형을 선고하는 등 법원의 형량이 과거보다 엄해지는 추세다. 그러나 문제는 법의 엄정한 집행만으로 이들을 보호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데이트폭력을 신고했다고 옛 연인을 납치, 감금하고 폭행한다. 작년 충남에서는 가정폭력 행사하는 남편을 세 번이나 신고하고, 법원으로부터 접근금지 명령까지 받았음에도 결국 백주 대낮 길거리에서 남편의 흉기에 목숨을 잃는 세 아이의 어머니 사건도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데이트폭력이나 가정폭력 신고가 들어와 출동했음에도 피해자의 "괜찮다"는 말만 듣고 철수하는 것, 또 폭행을 확인했음에도 파출소에서 이들을 (집으로) 함께 보내는 것이다. 가해자와 피해자를 분리, 격리하지 않고 "싸우지 말고 화해해라"는 주제 넘은 권유를 하며 같이 내보낸다. 피해 여성은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자녀 때문에 또는 이제까지 즐거웠던 기억 때문에, 파출소 밖으로 나가면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하고, 가해자와 함께 파출소 문을 나서는 것이다. 초기부터 분리, 격리해야 하는 이유다.
맞으면서도 헤어지지 못하는 이유
그렇다면 많은 여성들이 왜 남자 친구들의 폭력을 몸소 겪으면서도 이를 끊지 못하고 적절한 이별 시기를 놓지는 것일까. 성장과정 부모 간, 부모 자식 간 폭력에 노출된 영향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 심각성을 제대로, 특히 '제 때' 포착하지 못하고 '살다 보면 겪는 일'이라고, 또 '열심히 잘 살면 해결될 문제'라고 여기는 순응적 성향이 자리 잡았을 것이다. 이러한 환경적 요인 외에 중요한 문제는 '관용적 인식'의 문제이다. 첫째는 "때리는 것만 아니면 참 좋은 사람인데"라는 미련(또는 착각), 두 번째는 "내가 고칠 수 있어"라는 태도이다. 이는 상대 남성을 만나면서 얻게 된 기억과 연동된다. 남자친구와 함께 해서 좋았던 기억이나 추억이 머리속에 잔존하는 가운데 남자친구가 폭력을 행사하면 상당수의 여성들이 갈등을 하다가도 결국 '과거 좋았던 기억' 쪽으로 기울게 된다.
사실 관용적 판단은 성별에 차이를 두지는 않을 것이다. 문제는 자신이 베푼 관용이 배신으로 돌아왔을 때의 피해가 여성에게 너무나 극심하기 때문이다. 상습적 폭행이 되고 심지어 살해되기도 한다. '장점이 많다'라든가 '내가 고칠 수 있어'라는 것은 사실 자신의 판단에 대한 알리바이일 뿐이다. 폭력에 절대 관용적이면 안 된다. 늦기 전에 단호해야 한다. '인생은 타이밍'이라 했다.
사람은 고쳐지지 않는다. 결혼을 하면 또 나이기 들면 더 심해진다. 여자친구를 묶어놓고 이마로 박치기 하는 사람이 가르친다고 바뀌겠나. 배우자나 연인을 살인한 사람들이 항상 하는 이야기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이다. 그들은 가르쳐도 기억 못한다.
결혼 전엔 문제가 없었는데 결혼 하면 돌변하는 경우도 있다. 주변의 부러움 속에 한 선남 선녀가 결혼을 했다. 그런데 결혼 후 곧 남자의 손버릇이 나오기 시작했다. 특히 술을 마시면 심해졌다. 때리려고 술 마시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였다. 결국 아내가 울면서 남편에게 말했다. "오빠, 왜 그래. 옛날엔 안 그랬잖아." 울먹이는 아내에게 남편이 던진 말. "그동안 내가 얼마나 참았는지 알아?"
'국제 공인' 한국 남성들
실제 '사람 고쳐 쓰는 거 아니'라는 말이 있다. 남자친구에게서 손버릇의 조짐만 보여도 이별하는 게 '삶의 지혜'다. 화가 나면 고함을 지르거나 욕을 하는 것, 테이블을 내리치는 것 모두 폭력이다. 전날 밤 술 마시고 주정 부리고 여자친구 따귀 때린 남자친구는 다음날 아침부터 집 앞에 와서 무릎 꿇고 용서를 빌 것이다.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그런 사람은 택시비 줘서 빨리 보내는 게 상책이다. 폭력은 타협의 대상도 아니고, 두 번 생각할 필요도 없다.
요즘 한국에서 공부하는 중국 유학생들이 많은데 아주 재미있는 사실이 있다. 중국 남성 유학생들은 한국 여성과의 결혼을 매우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여성 유학생들은 한국 남자들과의 결혼에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부정적이다. 이제 한국의 남성들은 국제적 인정까지 받은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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