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통계, 언제부터인가 조작과 왜곡이 개입됐다

[원광대 '한중관계 브리핑'] 문화대혁명, 톈안먼 사건의 정확하지 않았던 통계 반복되지 않아야

복 받은 나라였던 중국

시간, 공간, 인간이 역사를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라는 점에서 과거 중국은 복받은 나라였다. 흔히 '중화 5천년'이라 이를 정도로 중국의 역사는 오래됐다. 그에 상응하여 오랫동안 세계 최고의 문화적 수준을 자랑했다.

중국문명의 최초 시작은 공간적으로 점에 불과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중국의 강역은 점차 확대되어 진시황 무렵 이미 현재 중국 면적의 절반 이상에 달하는 광대한 국토를 형성했다. 지대물박(地大物博)이라는 표현에서 보이듯이, 광대한 영토에 풍부한 산물은 인간생활에 필요한 모든 물자를 자급자족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줬다.

수많은 인간이 각자의 영역에서 활동하면서 중국인들은 당시 세계 최고의 선진적인 기술을 활용하여 인류문명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많은 발명품들을 만들어냈다. 중국인이 발명한 종이와 활판인쇄술은 아라비아를 거쳐 유럽에 기술이 전파되면서 중세 유럽의 문예부흥을 가능케 했다. 역시 아랍인을 통해 유럽에 전해진 나침반은 대항해시대의 시작을 가능하게 하여 세계사의 지형을 완전히 바꿔놨다.

기록과 통계를 중시한 중국, 중국인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랜 문자 가운데 하나인 한자를 만들어낸 중국인들은 기록을 중시했다. 명확한 문자기록에 근거한 중국의 통계는 오랫동안 과학적이고 신빙성이 높은 것으로 널리 인정됐다. 고대 중국에서 생산된 통계가 얼마나 정확했는지 잘 보여주는 것이 반고(班固)가 지은 한서·지리지(漢書·地理志)에 기록된 국토, 호구, 인구 관련 통계다.

이 책에 보이는 한나라의 국토는 동서가 9302리에 남북이 1만 3368리이다. 당시 호수는 1223만 3062호에 인구는 5959만 4978명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2000년 전에 써진 책에 보이는 통계라고 하기에는 놀라울 정도로 정밀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중국의 통계는 조작과 왜곡이 개입되어 믿을 수 없는 것으로 치부되기 시작했다. 특히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발표된 많은 통계의 신빙성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았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 지난 1월 5일 중국 베이징의 한 병원 응급병동 복도에서 환자들이 정맥주사를 맞고 있는 가운데 한 여성이 들것에 누워있는 연로한 친척을 돌보고 있다. 노인들이 대부분인 환자들은 들것에 누워있는가하면 산소를 흡입하거나 휠체어에 앉아있다. ⓒAP=연합뉴스

왜곡되기 시작한 통계

1957년 11월 13일 <인민일보>(人民日報)의 사설에서 '대약진'이라는 구호가 출현한 것을 시작으로 마오쩌둥(毛澤東)을 위시한 중국공산당 고위층이 발동한 대약진운동이 중국 전역에서 다음해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됐다. 7년 안에 영국, 8-10년 안에 미국을 따라 잡는다는 야심찬 목표를 설정하고 공업화가 진행됐다.

강철 생산량 증대 등에 과도한 농촌노동력이 투입되어 농지가 황폐화 되고 농작물을 수확할 일손마저 부족한 상황이 전국 곳곳에서 발생했다. 농업생산력의 급격한 저하로 농업경제가 파탄하고 국민경제가 전면적으로 후퇴했다. 1960년의 식량생산량은 1957년에 비해 30% 가까이 감소했다.

1958년 겨울부터 이미 식량부족 현상이 나타나고 굶어죽는 사람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전국을 휩쓴 기황으로 비정상적인 사망자가 속출하고 곳곳에서 사람이 사람을 먹는 비극이 발생했다. 정부에서 소식을 봉쇄한 까닭에 기황으로 인한 사망자의 정확한 숫자는 당시에는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았다.

2011년에야 중국당국은 1960년의 인구가 전년도에 비해 1000만 명 가량 감소했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많은 전문가들은 대약진운동 기간 비정상적인 사망자가 적게는 2100만 명에서 많게는 약 4500만 명에 달한다고 결론지었다.

대약진운동 당시 양식부(糧食部) 주임이었던 인사의 회고에 따르면 비정상적인 사망자가 수천만 명에 달한다는 국가통계국의 보고를 받은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의 지시에 따라 관련 보고는 폐기되었다.

문화대혁명 광풍에 스러진 인민

1966년 봄부터 시작하여 마오쩌둥 사망 한 달 뒤인 1976년 10월까지 통상 문혁(文革)으로 불리는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이라는 광풍이 전 중국에 휘몰아쳤다. 문혁 기간 정상적인 경제활동과 교육이 이뤄지지 못하고 역사유물, 종교와 문화관련 시설들이 철저히 파괴됐다. 거대하고 전면적인 파괴가 10년 동안 진행되었기에 문혁 기간을 '10년 내란' 혹은 '10년 동란'이라 부르기도 한다.

문혁 직전 마오쩌둥은 대약진운동의 철저한 실패로 수천만 명이 비정상적으로 사망한 책임을 지고 어쩔 수 없이 정치일선에서 물러나 있었다. 마오쩌둥은 자본주의 추종자들의 부활을 막고 당과 정부에 만연한 부패, 특권, 관료주의 등 현상을 척결하기 위해 문혁을 발동했다.

소련수정주의 반대, 미 제국주의 반대를 구호로 내걸고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주자파(走資派)를 공격했다. 중국대륙 전역에서 홍위병(紅衛兵)이 활개치며 전방위적인 계급투쟁을 전개했다. 대약진운동 시기만큼은 아니지만, 문혁 기간에도 중국대륙에서는 비정상적인 사망자가 속출했다.

10년 문혁 기간 비정상적인 사망에 이른 숫자에 대해서도 중국 관방의 발표와 연구자들이 제시한 통계에 많은 차이가 있다. 1996년 발간된 책에서 중공중앙은 문혁 기간 비정상적인 사망자가 172만 여 명에 달한다고 밝혔다. 중공중앙이 밝힌 숫자는 곧 중국정부의 공식적인 통계라 할 수 있다.

미국의 한 연구자는 문혁 기간 비정상적인 사망자가 773만 명에 달한다고 했다. 중공중앙 부주석을 지냈고 인민해방군 10대원수(大元帥)의 한 명인 예젠잉(葉劍英)은 문혁 기간 비정상적인 사망자가 2000만 이상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톈안먼의 비극

1989년 중국에서는 청년학생이 중심이 되어 공산당과 국가의 부패문제 해결, 언론자유 보장, 정치민주화를 목표로 하는 운동이 전개됐다. 6·4사건 혹은 89민주화운동이라 불리는 이 운동은 넓은 의미에서는 1989년 4월 중순 후야오방(胡耀邦)에 대한 추모활동이 도화선이 되어 근 두 달 간 톈안먼광장(天安門廣場)에서 전개된 학생운동을 칭한다.

좁은 의미에서는 6월 3일 저녁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인민해방군과 무장경찰에 의해 시위 참가 학생들을 해산시키는 과정에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한 사건을 이른다. 중화인민공화국 역사에서 하나의 전환점이 된 이 사건 이후 중국의 정치환경은 더욱 좌경화, 보수화 되고 개혁개방의 속도는 늦춰지게 되었다.

중국정부가 관례적으로 구체적인 자료를 공개하지 않은 탓에 6·4사건 사망자수에 대한 주장 역시 극명하게 엇갈렸다. 6월 6일 정례 기자회견에서 국무원 대변인은 군인과 학생, 민간인을 포함하여 근 300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같은 해 발간된 중화인민공화국국무원공보(中華人民共和國國務院公報)에서는 근 200명이 사망했다고 했다.

사건 발생 후 20여년이 지난 2014년, 미국 백악관이 기밀해제한 문건에는 사망자가 10,454명이라고 명시됐다. 이 문건은 중국의 정치심장인 중남해(中南海)의 내부문건을 근거로 작성된 것이다. 2017년 말 영국 국가기록원이 공개한 자료에는 1989년 톈안먼사건 민간인 사망자만도 1만여 명에 달한다고 했다.

통계는 진실을 담아야 

1950년대 이후 발생한 중대한 역사적 사건으로 인한 비정상적 사망자수가 의도적으로 축소되어 발표된 사례는 비일비재하다. 이는 책임을 회피하려는 중국정부와 공산당 지도층의 의향이 반영된 결과였다.

정치적 고려의 결과인 사망자 축소가 직접적으로 인민과 국제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팬더믹에서 엔더믹으로 전환기 중국이 공포한 관련통계의 왜곡과 축소는 직접적으로 그 영향이 인민과 국제사회에 미치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다. 혼란스러운 이 시기 좀 더 투명한 통계자료의 제공이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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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광대학교 한중관계연구원

'중국문제특성화' 대학을 지향하면서 2013년 3월 설립된 원광대학교 한중관계연구원은 중국의 부상에 따른 국내외 정세 변화에 대처하고, 바람직한 한중관계와 양국의 공동발전을 위한 실질적 방안의 연구를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산하에 한중법률, 한중역사문화, 한중정치외교, 한중통상산업 분야의 전문연구소를 두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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