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호의 우리말 바로 알기] ‘곡학아세(曲學阿世)’와 ‘불수진(拂鬚塵)’  

대학에 처음 입학하고 강의 시작하던 날이었다. 모두 긴장해 있었는데 당시 막 교단에 서신 젊은(?) 교수가 칠판에 대문짝만하게 글씨를 썼다. “‘곡학아세(曲學阿世)’라는 글의 의미를 아느냐?”고 물었고, 학생 중 하나가 “학문을 왜곡하고 세상에 아부한다.”는 말이라고 답했다. 그리고 그 젊은 교수는 “잘 했다.”고 하면서 세상을 살되 절대로 학문을 왜곡하면서까지 세상에 굴하지 말라고 당부의 말씀을 전했고, 그 말이 평생 필자의 가슴에 남아 지금까지 세상과 타협하면서 살지 않는 지침이 되고 있다. 과거 금산에서 인삼 종주지에 관한 연구를 해달라고 해서 <금산인삼 1600년사>를 집필한 적이 있다. 군청에서는 ‘개삼터’가 종주지인 줄 알고 연구를 맡겼으나 결과는 진산면의 월외리(月外里=달밝골=月明洞)로 나왔다. 결국 “인삼종주지를 바꿀 수 없다(역사를 왜곡할 수 없다)”는 필자의 고집으로 그 연구 결과는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곡학아세라는 말은 사마천의 『사기』<유림열전>에 나오는 말이다. 중국 한나라 떼 ‘원고 생’이라는 학자 있어서 학식이 높아 박사 벼슬에 있으면서 동궁의 스승이 되기도 했다. 강직한 성품으로 윗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바른 말을 서슴지 않았다. 어느날 두태후와 <노자>라는 책에 관해 논하다가 원고 생이 “그와 같은 책은 종들의 말에 불과합니다.”라고 하여 두태후의 노여움을 샀다. 그래서 돼지 사육장으로 쫓겨나 돼지 잡는 일을 하게 되었다. 얼마 후 왕은 그를 다시 태부로 임명하였다. 후에 공손홍이라는 사람이 그를 꺼리며 비방을 하자 원고 생은 꾸짖으며 말했다. “바른 학문에 힘쓰며 직언을 하도록 하라. 배운 것을 왜곡하여 세상에 아부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했다.

불수진(拂鬚塵)이라는 말도 있다. 이 말은 “수염의 먼지를 털어 준다.”는 뜻으로, 윗사람의 환심을 사려고 아첨하거나 윗사람에 대한 비굴한 태도를 비유하는 말이다. 『송사(宋史)』〈구준전(寇準傳)〉에 나오는 말이다. 송(宋)나라에 구준(寇準)이라는 재상이 있었다. 그는 유능하지만 관운이 따르지 않은 젊은이들을 과감히 발탁하여 나라의 일꾼으로 만들었다. 참정(參政:종2품) 정위(丁謂)도 그런 젊은이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정위는 비록 유능한 인재였지만 윗사람에게 비굴할 정도로 아부하여 주변 사람들에게 신뢰를 잃었다. 조정 중신들과 함께 회식하는데, 구준이 국을 잘못 떠 그만 수염에 국 찌꺼기를 묻혔다. 이때 이 모습을 본 정위는 쏜살같이 달려와 자신의 소맷자락으로 공손히 구준의 수염에 묻은 음식 찌꺼기를 털어 주었다. 이에 구준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아부하는 정위를 보고 “참정이라면 한 나라의 중신인데 상관의 수염까지 털어 줄 것까지 없지 않겠소(拂鬚塵).”라고 냉정하게 꾸짖으며 그의 아부하는 버릇을 일깨워 주었다. 그러자 정위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고개도 들지 못한 채 그 자리를 떠났다고 한다.(<다음카페> ‘세상 사는 이야기’에서 요약 인용함) 불수진(拂鬚塵)은 줄여서 불수(拂鬚)라고도 한다.

아부(阿附)라는 말은 “마음에 들려고 비위를 맞추면서 알랑거리다”이며, 아첨(阿諂)이라는 말은 “남의 마음에 들려고 비위를 맞추면서 알랑거림”이라고 사전에 나와 있다. 세상에는 많은 사람이 있지만, 그 중에 나한테 잘하는 사람을 좋아하게 마련이다. 미워하는 것보다는 옆에서 잘해주면 좋겠지만 지나치게 아부하는 사람을 곁에 두면 사달이 난다. 아첨이나 아부로 출세한 사람은 그가 높은 자리에 이르면 그보다 더 아부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아부의 악순환이 시작되는 것이다. 역사는 항상 순환한다. 과학은 발전하더라도 인간의 본성은 그리 달라지지 않게 마련이다. 아직도 곡학아세하며 불수진하는 사람이 참으로 많다.

늘 이야기하지만 역사는 승리자가 기록한다. 승리자의 입장에서 기록하다 보니 주변의 이야기는 소홀해질 수밖에 없다. 미국을 발견한 사람이 ‘콜럼버스’라고 하는 것은 서양인의 시각이다. 그가 도착하기 이전에 살던 원주민이 발견자이고 개척자임을 명심하자. 서양인의 시각으로 곡학아세하지는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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