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 골짜기로 가서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

[2022 평화통일시민강좌]  ⑧ 임재근 평화통일교육문화센터 평화통일교육연구 소장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은 남북의 화해와 평화통일을 위한 시민들의 모임인 평화통일시민행동(대표 이진호)의 '2022평화통일시민강좌'를 연재합니다.

올해로 6회째를 맞이하는 평화통일시민강좌는 국가보안법, 북한바로알기, 한미관계, 미중전략경쟁, 평화기행을 주제로 4월 16일부터 12월 17일까지 매월 세번째 토요일 오후 3시, 신촌에서 진행됐습니다.

아래는 지난 11월 20일 진행된 임재근 평화통일교육문화센터 평화통일교육연구 소장의 강연 주요 내용입니다. 이날 강연에는 대전산내사건희생자유족회 전미경 회장의 간담회도 마련됐습니다.

골령골 발굴 현장에서는 탄피가 발견됩니다. 탄피는 총을 쏘는 쪽에서 튕겨 나갑니다. 탄피가 유골과 함께 발견되었다는 것은 근접사살을 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전쟁 기간이라 해도 국민의 목숨을 지켜야 할 경찰과 군인이 어떻게 이렇게 국민을 죽일 수 있을까, 이 문제를 연구하고 사람들에게 알려야 하겠다는 생각이 제 연구의 시작이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

대전 산내 골령골의 1학살지부터 8학살지까지 대략 1km 구간에 걸쳐 암매장지가 있습니다. 그래서 골령골을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매장지는 유해발굴과 증언에 의해 추정되고 있습니다.

유해발굴은 2007년부터 시작되었는데 2021년의 유해발굴이 가장 대규모로 진행되었고 저에게는 가장 힘든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땅속에서 즐비하게 나무뿌리처럼 사람의 뼈가 나왔습니다. 손가락뼈, 발가락뼈, 갈비뼈와 같은 작은 뼈들은 삭아서 흙이 되었고 다리뼈나 일부 머리뼈만 남아 있던 상태로 언뜻 보면 뼈 밭이라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골짜기로 가서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

'골로 간다'. 어릴 적 친구들과 장난삼아서 했던 이 말은 전쟁 시기에 많은 사람이 겪었던 것처럼 골짜기로 끌고 가서 널 죽여버린다는 어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전 산내 골령골, 청주 분터골, 대구 코발트 광산 등 전국 방방곡곡 골짜기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진실과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2005년부터 2010년까지 여러 지역의 민간인 학살을 조사하여 보고서를 제출했습니다. 그 보고서에 의하면 산내 골령골에서 1950년 6월 28일부터 대략 세 차례에 걸쳐 대전형무소 재소자와 국민보도연맹 학살이 이루어졌습니다. 당시 대전형무소에 있던 사람들은 제주 4.3항쟁과 여순항쟁으로 체포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제주 4.3항쟁 관련자 300여 명이 대전형무소로 수감되었습니다. 제주 4.3항쟁 당시 초토화 작전으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고 24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체포되었습니다. 제주도에는 감옥이 없었기 때문에 이 사람들을 육지로 보냈는데요, 이 중 300여명이 대전으로 이감되었습니다. 제주도의 4.3평화공원에 가면 행방불명자 표석이 있습니다. 대구, 부산, 마산, 서울, 인천, 대전으로 끌려갔다 행방불명된 4천 명의 표석이 있습니다.

대전형무소는 서대문형무소와 마찬가지로 정치범을 수감하는 목적으로 세워졌기 때문에 규모가 컸습니다.

제주 4.3항쟁 진압을 거부하며 봉기했던 여순 사건으로 수많은 군인이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습니다. 적극적으로 봉기에 가담한 사람들은 지리산으로 들어가고 소극적으로 가담했거나, 봉가 사실을 몰랐던 이들이 14연대 소속 군인이었다는 이유만으로 검거되어 대전으로 왔습니다. 이곳에서 임시군법재판소가 세워지고 군법 재판을 받고, 사형집행도 이루어졌습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던 당시, 대전형무소에는 제주 4.3항쟁과 여순사건의 관련자들이 있었습니다. 전쟁이 나면 감옥에 있던 사람들은 안전한 후방으로 이감을 해야 합니다. 다급한 상황으로 이감할 상황이 안 되면 감옥 문을 열어 가석방을 시킵니다. 나중에 전세가 완화되면 그 사람들은 다시 감옥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만약 수감자들이 안 돌아오면 체포하고 가중처벌하면 되지, 목숨을 함부로 빼앗으면 안 됩니다.

▲ 임재근 평화통일교육문화센터 평화통일교육연구 소장 ⓒ평화통일시민행동

공주 왕촌 살구쟁이 학살

1950년 7월 9일 공주형무소의 재소자들을 후방인 대전으로 이감한다며 트럭에 싣고 가다 금강 근처에서 학살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 사건 현장에는 영국의 <픽쳐포스트>(Picture Post)지의 기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몇 장의 사진을 찍어 1950년 7월 29일 보도를 했습니다.

이 기사는 유엔 관계자도 있었다고 전하면서 유엔을 당혹하게 만들었습니다. 아무리 재소자라 하더라도 전쟁이 났다고 해서 죽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 국제법으로도 정해져 있고 그렇다면 이를 막았어야 할 유엔 관계자가 막지 않고 현장에서 지켜보기만 했다는 것이죠. 왕촌 살구쟁이 사건은 진실화해위 조사를 통해 400~700명이 학살되었다는 것이 밝혀졌고 397구의 유해를 수습했습니다.

공주형무소의 재소자들이 대전으로 이감되었다면, 그 사람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대전형무소 재소자들의 운명도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골령골로 간 사람들

대전형무소의 재소자들은 트럭에 실려 골령골로 왔습니다. 적으면 20명, 많게는 40명이 한 번에 총살당했습니다. 당시 총살에 가담했던 경찰과 군인들은 몇 살이었을까요? 고작 스무 살이었습니다. 많아야 30대입니다.

누군가를 죽여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심지어 적이 아닌 국민을 향해 총을 쏘라는 명령을, 그것도 공식 법 집행도 아니고 죽을죄를 지은 사람도 아닌데 총을 쏴서 죽였어야 합니다.

재소자의 등을 밟고 뒤통수에 총구를 대고 방아쇠를 당기는 것은 이 청년들에게는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부당한 명령이라도 거부의 대가는 자기가 총을 겨누고 있던 바로 앞의 14연대 군인들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현재까지 대전에서의 학살은 1950년 6월 28일 시작된 것으로 추정하는데요, 이때를 기점으로 전국 각지에서 학살이 벌어집니다. 이 학살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요?

학살의 책임자들

당시 산내 골령골 살해장소에서는 미 극동군사령부 주한연락사무소의 총책임자 애버트(Abbott) 소령이 미군의 라이카 사진기로 당시 장면을 찍었습니다. 그리고 주한미국대사관 소속 육군무관 에드워드(Bob E, Edwards) 중령은 1950년 9월 23일 워싱턴의 미 육군 정보부로 '한국에서의 정치범 처형'이라는 제목의 보고문을 현장 사진 18장과 함께 보냈습니다.

"이러한 처형명령은 의심의 여지없이 최고위층(top level)에서 내려온 것이다. (중략) 대전에서의 1800여 명의 정치범 집단학살은 3일간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1950년 7월 첫째 주에 자행되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은 1950년 6월 27일 비밀리에 서울역에서 기차를 탑니다. 대구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돌아와 멈춘 곳이 대전이었습니다. 이승만이 대전에 온 다음 날부터 대전에서의 학살이 시작됩니다. 군 통수권을 가지고 있던 대통령이 재소자와 보도연맹 관련자들의 총살을 모를 수 있겠습니까? 지금도 사형집행은 대통령의 재가가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어처구니없는 일은 국민의 생명권을 빼앗는 엄청난 일을 대통령이 재가도 하기 전에 다른 이가 행사하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제임스 해리 하우스만은 해방 직후 군사고문단 참모장으로 부임해 80년 광주항쟁 직후까지 한국에서 근무했습니다. 이 사람이 <한국 대통령을 움직인 미군 대위>라는 회고록을 냈는데 거기에는 이승만이 여순사건의 재판이 공정하게 진행되는지 감시하게 시켰고 자신이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에 대해 대통령보다 먼저 사인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대통령의 재가권을 미군 대위가 행사했다는 것은 치욕적인 장면입니다.

현재 전시의 군 통수권은 미군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군 통수권을 가져본 적이 있습니까? 대전이 임시 수도였던 1950년 7월 14일과 16일 사이에 이승만과 맥아더 사이의 서신 교환으로 군 통수권이 이양되었다고 하지만, 그 이전에는 우리에게 군 통수권이 있었을까요? 미 군정이 끝났지만 미군은 500명의 군사고문단을 남겨놓고 한국군에 대한 통제를 계속했습니다.

사형집행 최종 권한이 대통령에게 있다 해서 미군에게는 책임이 없을까요? 위의 보고서를 작성한 에드워드 중령은 1950년 4월 숙군작업에 대한 보고서도 작성하였습니다. 에드워드 중령은 당시 200명의 한국군을 총살집행 했고 확인 사살하는 장면까지 사진과 영상으로 남겨놓았습니다. 사진을 살펴보면 뒤에 중절모를 쓴 미군의 모습도 보입니다.

너무나 처참하고 가슴 아픈 장면들인데 이런 것까지 미군들은 영상으로 남겨놓았습니다. 미군은 현장에 있었지만 학살을 막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한국군에 대한 실질적인 장악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에도 분명한 책임이 있습니다.

서울과 대전 수복 후 부역 혐의자들이 대전형무소로 끌려오게 되고 이 부역 혐의자들을 미군들이 관리했습니다. 대전지역에서만 한 달 사이에 1만 4천 명 이상이 검거되고 전국적으로 55만 명이 처벌받았습니다. 형무소가 가득 차니 이 사람들을 부산으로 이감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도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합니다. 대전에서 부산까지 가는 기차 안에서 배고픔과 추위로 350명이 죽은 일도 있었습니다. 이 또한 학살입니다.

전쟁 시기 학살은 장기간에 걸쳐 다양한 방식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대전에서의 학살의 규모는 클 수밖에 없습니다. 전쟁 발생 이전 당시 대전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재소자들, 전쟁 직후 끌려갔던 보도연맹원들, 대전 수복 후 잡혀 들어간 부역 혐의자까지 최소 1800명에서 수천 명에 이르는 피해자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 중에 명단으로 확인된 사람들은 현재까지 500여 명에 불과합니다. 이감 기록이 있던 제주 4.3항쟁 관련자들과 재판 기록이 있던 여순사건 관련자들이 대부분이고 나머지는 재소자 명부가 확인되지 않기 때문에 가족들이 끌려갔다는 것을 증빙해야만 희생자로 인정받는 상황입니다.

사진 속 학살 장소를 찾아내기까지

산내 골령골 학살이 있고 72년이 지났습니다. 골령골의 진실 찾기는 1999년에 공개된 미군 보고서의 18장의 사진이 결정적 증거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사진에는 정확한 학살 현장이 어디인지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사진에 찍힌 산 모양을 이리저리 퍼즐처럼 맞추어서 지금의 산내 골령골에서 찍힌 사진임을 알아냈습니다.

당시 사진을 보면 학살의 규모를 추정할 수 있는데요. 사진 중에 사람 키보다 깊은 2~3m 깊이의, 길이만 해도 수십 미터에 달하는 구덩이 사진이 있었습니다. 대규모 유해가 묻혀 있다고 생각이 되었습니다. 그 장소를 너무나 찾고 싶었지만 사진상의 산세로는 도저히 어디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눈에 들어왔던 것이 사진 속 구덩이의 3개의 바위였습니다. 구덩이에 수백 명이 묻혀 있다 해도 70년이 지났으니 뼈들은 다 삭았을 테지만 저 바위만은 남아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유해발굴이 다 끝난 텅 빈 구덩이에서 저 바위들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3개의 바위를 마침내 찾아냈고 사진 속 장소를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한국에서 진실을 보았다(I saw the truth in Korea)

영국 매체인 <데일리 워커>의 앨런 워닝턴 기자는 한국전쟁 직전 베이징에 특파원으로 와있었습니다. 전쟁 소식을 듣고 한국에 들어온 그는 골령골 학살 직후 현장을 방문해 사진을 남겼습니다. 앨런 워닝턴은 한국전쟁을 취재했던 수많은 외국 특파원 중에 몇 안 되는 공산측을 따라다녔던 특파원이었습니다.

앞서 <픽처 포스트>가 미군을 따라 다녔다고 하면 <데일리 워커>의 앨런 워닝턴은 인민군을 따라 다녔습니다. 앨런 워닝턴은 골령골 학살 직후 대전을 점령한 인민군과 함께 골령골 현장에 방문하여 취재했고 사진과 함께 1950년 8월 9일 자 <데일리 워커> 1면 기사로 나갔습니다.

앨런 워닝턴 기자는 몇 차례의 기사를 내고 다시 베이징으로 돌아가서 16쪽짜리 팸플릿인 '나는 한국에서 진실을 보았다(I saw the truth in Korea)'를 만들었습니다. 사진에는 매장지 위로 팔과 다리들이 삐죽 튀어나온 참혹한 장면들이 담겼습니다.

워닝턴 기자는 미군들이 피다 버린 담배, 밧줄, 탄피들이 즐비한 것을 보며 이 책임은 결국 미군에 있다는 것을 고발하였습니다. 그 팸플릿에 실리자는 않았지만 2021년에 발굴된 위닝턴의 사진에는 미군이 현장에 버린 빈 담뱃값과 탄피를 찍은 사진도 있습니다.

뼈들이 우리에게 건네는 말들

수십 년 동안 말없이 땅속에 파묻혀 있으면서 삭아있던 이 뼈들이 아무 말을 하지 않으리라 생각하지만 그 뼈들이 우리에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유해와 함께 출토된 여러 유품을 통해 가해자가 누구이고 피해자가 누구인지 엿볼 수 있습니다. 탄피들을 통해 주된 학살의 주체가 군인이었음을 알 수 있고 M1카빈 소총의 탄피도 나오는 것으로 봐서 경찰 또한 학살의 주범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45구경 탄피들은 지휘관들이 사용했던 권총의 탄피들로 확인 사살에 사용됐던 것들입니다.

비슷한 단추들이 많이 나오는데 이것은 대전형무소 재소자들 것으로 추정이 되고, 두개골에 난 총구멍이 작은 것으로 보아 근접사살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치아 상태로 나이를 추정할 수 있는데 미성년자들의 희생도 확인되며 골반뼈 DNA 검사와 2학살지에서의 비녀와 꽃 모양 단추로 다수의 여성 희생자도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이라 불리는 산내 골령골에는 전쟁 시기 각지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자들을 추모하고 위령할 수 있는 평화공원이 세워질 예정입니다. 혹시나 뼈가 묻혀 있는 상태에서 건물을 지으면 안 되기 때문에 유해들을 빠짐없이 발굴해 내는 과정을 올해까지 진행하며 내년에는 본격적인 공원 작업에 착수할 예정입니다.

전쟁 시기 우리 국민이 겪었던 원통함과 아픔은 아직도 유해를 찾지 못한 유가족들을 통해 지금까지 고스란히 전해오고 있습니다. 학살의 진실을 찾고 책임자로부터 진실된 사과를 받을 때까지 많은 분들이 골령골을 찾아오고 기억해 주셨으면 합니다.

대전산내사건희생자유족회 전미경 회장의 이야기

대전 산내 학살의 피해자는 형무소 재소자, 보도연맹 관련자, 부역 혐의자로 나눌 수 있습니다. 대전산내사건희생자유족회 전미경 회장의 아버지는 대전이 다시 수복된 이후 부역 혐의로 낙인찍혀 무고하게 사형선고를 받고 집행당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국가의 잘못임을 인정받아 최근 어렵게 명예 회복을 받았습니다. 아래는 전 회장의 이야기입니다.

▲ 대전산내사건희생자유족회 전미경 회장 ⓒ평화통일시민행동

나의 아버님의 고향은 충남 서천으로 3남 2녀의 장남이셨다. 바로 아래 삼촌은 연희전문대를 다니시며 좌익활동을 하셨다. 아버님 또한 아버님의 외삼촌이 상해 임시정부의 고위직으로 계셨기 때문에 연락원으로 활동하셨고 마을 청년들이 아버님을 많이 따랐다. 중학생 때 결혼하여 총명한 아들을 낳았지만 우익단체들이 아들을 독살했다. 1948년 오빠가 죽던 해에 내가 태어났다.

좌익활동을 하신 아버지는 산에 숨어 지내시다 내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허벅지까지 닿는 눈을 헤치고 집에 오셨다. 그때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지서로 끌려가셨다. 이틀 전 아기를 낳은 어머니가 지서에 쫓아가 아버지를 석방하면 같이 집에 갈 것이고 안 그러면 거기서 죽겠다고 항의를 하셨다. 그러니 경찰이 아버지를 석방했다.

태어날 때부터 약하게 태어나고 잘 먹지도 못해 바스러질 것 같은 나를 안고 아버지는 좌익활동을 하지 않고 농사만 짓기로 결심하셨다. 1949년 여름에 도민증이 나왔다. 당시에 젊은 사람들은 도민증이 없인 다니지를 못했다. 연희전문대 다니던 삼촌은 도민증이 없어 우리 집 방구들을 파고 숨어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아무리 생각해도 삼촌이 방구들에서 나올 방법이 없으니까 장에 가서 쌀을 팔아 노비를 마련해주고 도민증을 삼촌에게 쥐여 주었다. 아버지는 삼촌에게 어디 가서든 꼭 살아남아서 다시 만나자고 했다.

삼촌은 교수님을 따라 월북을 했고 대신 아버지가 쫓기게 되었다. 아버지는 산으로 피신을 했고 1951년에 두 돌이 지났는데도 서 있지도 못하던 내가 벽을 붙잡고 잠깐 섰다는 이야기를 듣고 잠깐이라도 나를 보기 위해 집에 오셨다가 체포되었다.

열흘 정도 있다가 경찰이 아버지가 다음날 대전으로 넘어간다고 알려주어 어머니가 새벽에 밥을 해서 20리 길을 걸어 아버지가 계신 경찰서에 찾아갔다. 경찰 뒷마당의 트럭에 혼자 실려 있던 아버지는 아기가 우는데 뭐하러 왔냐며 죄가 없으니 금방 풀려날 것이라며 어머니보고 빨리 집에 가라고 했다. 아버지 성화에 돌아선 어머니는 아버지가 못 보는 남의 집 처마 밑에서 아버지가 실린 트럭이 출발하는 것까지 지켜봤다. 그것이 아버지와의 영원한 이별이었다.

우익단체에서 우리 재산을 다 내주면 아버지를 석방해 주겠다고 하여 할아버지가 대전형무소로 찾아갔다. 심한 고문으로 온몸이 부어 얼굴조차 알아보기 힘들었던 아버지는 할아버지에게 자신은 죄를 지은 것이 없으니 절대 우익에게 재산을 넘기지 말고 며칠만 기다리라 했다.

며칠을 기다려도 아버지가 안 나오자 할아버지가 다시 대전형무소로 찾아가 면회 신청을 하니 그런 사람이 없다 했다. 당황한 할아버지가 어쩔 줄 몰라 하니 간수 한 명이 조용히 불러내 며칠 전 골령골로 갔는데 거기 가면 다시는 못 오니 3월 2일에 제사나 지내라 했다.

할아버지는 내가 성년이 될 때까지 내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말씀을 안 해주셨다. 동네 친구들이 빨갱이 자식이라며 구박을 해도 아버지는 꼭 살아서 돌아오실 줄 알았다. 동네 어른들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네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데 네가 이런 고생을 하며 사느냐 하며 안타까워하셨다.

빨갱이 자식이라며 손가락질 받거나 가슴에 상처가 남을 때마다 일기를 써서 2017년에 시집(전숙자, 진실을 노래하라, 인권평화연구소)을 냈다.

다섯 살 때 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가 상의해서 어머니를 재혼시키셨다. 나는 어머니가 나를 버린 줄 알고 어머니와 외가댁을 미워했다. 그래서 어머니는 우리 집에 얼씬도 못 하셨다. 그런데 내 나이 50쯤, 어머니가 찾아오셨다. 아무리 자신이 싫어도 오늘 저녁 하루만 같이 자고 가자 하셔서 어머니를 여관방에 모시고 하루 저녁 같이 자려고 누웠다.

어머니는 밤새 아버지가 어떻게 자라셨는지, 어떻게 결혼을 하셨는지 그리고 어떻게 아버지가 돌아가셨는지 말씀을 해주셨다. 그리고 돌아가셔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다. 어머니께 잘해드리지 못한 것이 지금까지도 가장 큰 후회다.

결혼 후 남편과 별거를 하고 아이 셋을 데리고 미용실에서 살면서 미용기술을 배웠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을 알고서는 애들 교육비 아니면 절대 만 원짜리 한 장 깨지 않고 살았다. 아버지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3천만 원짜리 적금을 들었고 그 적금을 타서 꼭 묻어 놓은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나섰다. 아버지의 관련 서류를 찾는 데까지 10년 걸렸다.

아버지의 판결문은 육군본부에 있었다. 동생을 피신시킨 죄로 체포되셨는데 판결문에는 우익인사를 죽였다는 누명을 쓰고 사형을 선고받으셨다. 판결문이 30장이 되었는데 다 한문이라 읽을 수가 없었다. 그때만 해도 아무한테나 보여 주고 도움을 청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지역의 농민회를 찾아갔다. 농민회에서 저녁에 한문 선생님을 모시고 와서 밤새 번역을 했다. 기가 막혔다. 사람을 얼마나 고문을 했으면 안 죽인 사람을 자신이 죽였다고 했겠는가.

그 이후로 낮에는 부여에서 미용실을 하고 밤에는 소머리국을 끓여 밥을 해서 서천으로 갔다. 노인정을 돌아다니며 연세 많으신 분들에게 당시를 수소문해서 듣고 아버지가 죽였다고 하는 분의 딸을 만나 판결문이 거짓이라는 증언을 듣게 되어 아버지의 억울함을 풀어 드렸다.

하지만 국가에서는 지금까지도 사과하지 않았다. 나는 일생을 아버지 사건에 묻혀 산다. 한국전쟁이 나와 아버지, 우리 가족 일생을 다 집어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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