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곤 포르노'는 사람을 도구화하는 최악의 후원 독려 방식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이미지가 가진 자의 언어로만 정의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나는 엄마가 ○○단체면 좋겠어."

어느 날 유치원에서 돌아온 아이가 뜻밖의 이야기를 했다. 아이의 엉뚱한 이야기에 아이의 엄마는 왜 그런지를 되물었다. ○○단체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국제아동구호단체였기 때문이다. 아이는 낮에 유치원에서 선생님이 보여준 ○○단체의 영상을 열심히 설명했다. 엄마는 아이의 이야기를 유심히 듣다 나중에 해당 영상을 보고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프리카 말라위의 열 살 소년 라멕은 할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다. 아버지는 돈을 벌기 위해 먼 곳에 떠나있고 라멕은 늘 아버지를 그리워한다. 영상은 라멕이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단체를 찾아가 도움을 청하고, ○○단체와 함께 먼 곳에 있는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떠나는 여행길을 보여준다. 그 이후는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감동의 부자 상봉이 이루어진다."

아이 엄마는 아이에게 영상에 대해 어떻게 설명해주어야 할지, 앞으로 유치원에 어떤 메시지를 주어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우리는 해당 영상의 목적과 의도는 이해할 수 있지만 메시지의 전달 방식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데 깊게 공감하였다. 영상은 라멕이란 아이의 삶의 단편, 그중에서도 고통의 단편만을 전시하는 방식을 취한다. 이 방식이 과연 적절할까? 우리는 너무 쉽게 타인의 고통을 이용하여 후원을 모집하는 것에 익숙한 것은 아닐까? 이 영상을 통해 과연 우리는 어떤 인권의 행간을 읽어내야 할까?

이 홍보영상의 목적이 시민의 관심과 후원의 유도, 인식 변화와 같은 선한 의도에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는 않는다. 또한 현실적으로 인권을 옹호하는 활동에 필요한 재원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후원 요청을 홍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해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타인의 삶을 분절하여 전시하고,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것 자체를 정당화할 수 없다. 영상을 통해 아이들은 과연 어떤 핵심 메시지를 배울지 상상해보자. 이런 식의 홍보영상이 아이들에게 공감과 연대의 필요성을 알려줄 수 있을까? 아니면 혹시 "더 나은 환경에 있는 나"의 위치에서 타인의 "고통과 불행"을 동정하는 경험을 주는 것에 그칠 뿐일까.

"당신은 이 아이의 고통을 멈출 수 있는, 해결할 수 있는 구원자!"

그러니 우리와 함께 하자, 후원하자는 메시지는 수많은 단체가 사람들의 지갑을 여는데 종종 이용하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절대적으로 후원, 구원이 필요한 누군가를 전시하고 당신에게 구원자적 위치에 함께할 것을 독려하는 것이다.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빈곤 포르노이다.

빈곤 포르노(Poverty Pornography)란 모금을 유도하기 위해 가난 등을 자극적으로 묘사하여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는 영상이나 사진 등을 말하며(네이버 지식백과 시사상식사전 참고), 이러한 후원 독려 방식은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이런 접근 전략은 유효한 홍보수단으로 이용된다. 이는 아마도 시민의 반응과 선호와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우리가 불편한 현실을 직시하고, 차별과 폭력을 근절하기 위해 인권 의제를 자기문제화하는 과정은 쉽지 않다. 빈곤 포르노는 나와 다른 위치에 있는 사람의 고통을 전시하고, 나에게 감정적 동정을 일으키며 경제적 지원을 요청한다는 점에서 쉽다. 인권 의제에 대해 항상 연대할 수 없다는 나의 부채감은 후원을 통해 "단체가 대신할 것이다"라는 안도감을 주는데 용이하다. 후원 문화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러한 사람들의 인권에 대한 부채감을 상업적으로,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후원 독려 문화에 대해 좀 더 비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빈곤 포르노는 후원을 독려하기 위한 여러 가지 방식 중 사람을 대상화하고 도구화하는 가장 최악의 방식이다. 어떤 사람의 삶이라도 단순히 고통이나 즐거움 등 하나의 서사로만 이루어질 수 없다. 인간과 그 인간의 삶은 복잡하고 다양하고, 다채롭다. 그러나 빈곤 포르노는 목적 – 즉, 인권 옹호 활동을 위한 더 많은 참여와 후원 – 을 위하여 누군가의 삶에서 고통의 일면만을 잘라내어 마치 그것이 그 사람의 삶의 전체인 양 전시하는 방식으로 타인의 삶을 왜곡한다. 그리고 그 삶이 얼마나 비참하고, 고통스러운지, '더 나은 삶에 있는 당신'이 알아야 한다는 부채감을 부여하며, 선민의식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잘못된 연대를 요구한다. 결국 우리는 동료 시민으로 문제에 다가가기보다는 타인의 삶을 나의 기준에서 평가하고, 일부의 선민의식에서, 일부의 부채감을 덜기 위해 동정으로 점철된 빈곤 포르노의 소비자가 되고 만다.

사람의 인식을 변화시키고, 사회의 목소리를 모아나가는 일은 인권옹호의 가장 핵심 동력이고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이러한 가치를 이해하고 역량을 키워나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 받아야 한다. 아쉽게도 우리의 교육 과정, 사회화 과정에서 이런 부분이 충분히 다루어졌나를 따져보면 아마도 초라한 성적표를 마주할 것이다. 빈곤 포르노는 우리가 동료시민으로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게 어떤 연대를 해야 하는지, 어떻게 모두의 인권을 옹호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지 못한다. 실제로 매일 교육 현장에서 내가 듣고, 상담하고, 경험하는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필요한 인권 교육의 부재를 뚜렷하게 드러낸다.

빈곤 포르노를 통해 사회적 소수자와 약자에 대한 편향적이고 왜곡된 이미지를 각인한 사람들은 그들을 "불행하고 불쌍한", "나와 다른" 누군가로 타자화하게 만들며, "더 나은 삶을 살아가는 내가 구원해야 할" 어떤 대상으로 치부하게 한다. 인권에 대하여 이제까지 그 어떤 세대보다 더 높은 감수성을 갖춘 시대임에도 우리가 인권 의제에 선택적으로 연대하고, 사회적 소수자와 약자에게 피해자적, 불쌍한 이미지를 요구하는 아이러니를 보인다. 무엇이 문제일까?

빈곤 포르노를 통해 전달되는 왜곡된 인권의 메시지는 우리에게서 인권의 언어를 빼앗아 간다. 그래서 인권은 소위 기득권 혹은 엘리트들의 전유물로만 머물거나, 선민의식에서 누군가에게 도덕적 우월함을 과시하기 위한, 자신의 교양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 과정에서 사회적 소수자와 약자의 삶은 분절되고, 왜곡되고, 과장되어 전시됨으로써 후원을 위한 도구로 전락한다. 사람과 연대하기 위해 그 대상을 전시하고 인간성을 박탈하는 방식을 사용하는 이 모순된 상황을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 어떤 목적의 순수성을 가지더라도 그 표현과 관점, 이미지가 인권의 본질을 왜곡하거나 가진 자의 언어로만 정의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모든 시민이 학습하고 발달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시선을 정제하고, 끊임없이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사고할 수 있도록 알려주어야 한다. 아이들이 사회를 바라보고 접하는 모든 '첫 순간'이 인권의 가치로 채워져야 하는 것은 기성세대의 의무이자 사회의 책무임을 기억해야 한다.

누군가의 삶을 타자화하고, 인간을 도구화하는 것에 너무 익숙해진 우리 사회를 성찰하기 위해 박주영 판사의 말을 곱씹어 본다. "기록 너머 사람, 정의 건너 사랑" 언제나 사람, 사람이 먼저다.

*내가만드는복지국가는 의제별 연대 활동을 통해 풀뿌리 시민의 복지 주체 형성을 도모하는 복지단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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