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트아동복지회를 세운 해리 홀트의 딸인) 말리 홀트는 제가 양아버지에게 성적 학대를 당했다는 사연을 담은 이메일에 아주 이상한 반응을 보였어요. 제가 기자라고 하니까 1970년대에 한국에서는 아이들은 많이 죽었는데 (미국으로 입양 보내져서) 살아있는 걸 기뻐해야 하고, 좋은 교육을 받고 직업도 있으니 좋지 않냐고 답했어요. 제가 입양으로 인해 성적 학대를 경험했고 그로 인해 평생 고통 받고 있다는 사실은 제가 교육을 받고 기자가 됐다는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얘기죠. 입양에 대한 자신들의 신념에서 벗어난 이야기들은 전혀 들으려고 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1970년생인 입양인 카오미 리씨가 2015년 자신을 입양 보낸 홀트아동복지회에 편지를 썼을 때 일어난 일이다. 그는 홀트아동복지회의 사회복지사에게 자신의 입양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홀트가 양부모 조사 등을 어떻게 했는지 질문하는 이메일을 보냈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가 홀트의 이사회 등 '윗선'으로도 알려지기를 원했고, 말리 홀트 당시 이사장의 이메일 주소를 받아 이메일을 보내게 됐다(홀트 전 이사장은 2019년 사망했다).
이 사연은 카오미 씨의 팟캐스트 '어댑티드(Adapted)'에서도 소개됐다. 미국에서 방송기자로 일하고 있는 카오미 씨는 2016년 7월부터 지금까지 한국을 방문한 해외입양인 120여 명을 인터뷰한 팟캐스트(http://adaptedpodcast.com)를 운영하고 있다. 영어로 된 이 팟캐스트는 현재 10만 명 이상이 다운로드를 받는 등 입양인들에게 큰 호응을 얻고 있다. 그 중 일부는 한국어로도 번역해 게재했다(한국어판 : http://adaptedpodcast.com/ko/home-2/).
한국을 방문 중인 카오미 씨는 25일 서울 중구에 위치한 한 레지던스에서 <프레시안>과 인터뷰를 가졌다. 그는 이 팟캐스트를 시작하게 된 이유에 대해 입양인으로서 자신이 겪어야만 했던 일들로 설명했다.
"제 입양서류에 따르면, 저는 태어난지 11일 만에 평택군청에서 발견됐다고 합니다. 제가 어떻게 거기에 도착했는지, 누가 발견했는지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제가 태어난지 11일 밖에 안됐는지 알았을까요. 제 한국 이름은 '이소라'라고 합니다. 한국에서 굉장히 유명한 가수 이름이라는데, 제가 태어날 당시엔 흔하지 않은 이름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이름은 입양기관이 아니라 제 엄마가 붙여준 게 아닐까 싶어요. 바다와 연관된 이름처럼 저는 바다를 건너 입양됐지만요. 이 허술한 기록 중에서도 어느 것이 진실이고, 어느 것이 거짓인지 저는 알 수조차 없습니다."
그는 고아원으로 보내졌고, 이틀만에 홀트아동복지회로 넘겨졌다고 한다. 경찰 등에서 기아를 발견했지만 그 부모를 찾아주려는 노력은 전혀 하지 않고 일사천리로 고아원을 거쳐 입양기관으로 보내진 것에 대해 그는 "이미 정해진 절차를 밟은 것 같았다"고 말했다. 카오미 씨는 이후 위탁가정에서 지내다가 생후 6개월에 미국 미네소타주의 한 목사 부부에게 입양됐다.
"지금에야 코로나19 때문에 동양인을 상대로 한 증오범죄에 대한 인식이 생겼지 그때는 다들 의식조차 하지 않았죠. 한국 아동을 서구로 입양을 보내게 되면 당연히 인종차별을 경험합니다. 게다가 백인인 입양부모들은 그 문제를 전혀 공감하지 못하죠. 자신들은 경험하지 않으니까요. 저는 미네소타주 시골마을에서 살았는데, 그 마을에서 동양인만이 아니라 유색인종이 저 밖에 없었습니다. 제 입양부모는 평생 미국 밖을 나가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만큼 다양성에 대한 생각이 부족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인종간 입양에 적절한 분들인지 입양기관에서 따져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홀트아동복지회 뿐만이 아니라 미국 자매기관인 홀트인터내셔널에도 제 입양과 관련해 문의를 했는데, 미국의 입양기관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입양부모들에 대한 조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고 입양 사후 관리도 하지 않았습니다. 홀트는 종교에 기반한 기관이었고, 양부는 목사이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죠."
카오미 씨는 목사인 아버지에게 11살에 성적 학대를 경험했고 이 일은 그에게 가족에게조차 말해서는 안 되는 '비밀'로 '침묵'을 강요당해야만 했다. 이 경험은 평생 남성과의 친밀한 관계를 맺기 힘들게 만드는 상처가 됐다.
"아버지는 목사였고, 마을에서 존경받는 명사였는데, 저는 아버지의 어두운 비밀을 알고 있었죠. 당시 저는 제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몰랐고, 양어머니에게도 말할 수 없었죠. 어머니도 제게 어떤 말도 하지 않았어요. 저는 이 경험을 개인적인 경험으로, 가족 안에서의 비밀로 침묵 당할 것을 강요당해왔습니다. 너무 어린 나이에 인간의 어두운 면을 보게 된 것은 제 자아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었죠. 그런데 제가 팟캐스트를 하면서 입양인들로부터 그들의 입양 경험을 직접 들으면서 입양부모로부터의 성적 학대가 저만이 아니라 꽤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됐죠."
제대로된 검증과 교육, 사후관리 없이 아이들을 원하고 입양 수수료를 지불하면 사실상 누구나 입양이 가능한 입양 시스템에서 입양인들은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어려움을 알아서 감당해야 했고, 이는 입양인들에게 평생 트라우마로 남았다.
그는 대학 시절 교환학생으로 홍콩에서 한 학기를 공부하게 되면서 처음으로 아시아를 방문했고, 그때서야 마침내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이후 자신의 해외입양인 정체성에 대해 고민을 하기 시작했고, 2016년 한미교육협회의 후원을 받아 풀브라이트 시니어 연구자로 한국에서 1년간 머무르면서 입양인들의 목소리를 직접 전달할 수 있는 팟캐스트를 시작하게 됐다.
"해외입양과 관련한 한국 언론의 관심은 주로 가족 찾기에 집중돼 있습니다. 입양인과 친생부모 가족들의 눈물 겨운 재회를 보여주고 아름다운 결말이라고 생각하죠. 그러나 입양인들 입장에서 재회 그 이후의 과정도 풀어야할 난제입니다. 언어 장벽, 서로 다른 문화 때문에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물론 카카오톡으로 명절이나 생일 때마다 인사를 전할 순 있습니다. 그러나 이건 진짜 관계가 아니라 '카카오 관계'에 불과하지요.
저는 심리 치료사가 아니지만, 제 팟캐스트에 출연한 입양인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더 편안해진다, 무거운 짐을 덜어놓은 것 같다고 합니다. 저에게도 이 자체가 큰 치유가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정말 많이 놀라는데 출연자들이 자신의 사생활이라고도 할 수 있는 입양 경험에 대해 기꺼이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경험이 가족 안에서 일어난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입양 시스템의 문제이며, 이에 대해 입양기관과 한국 정부는 더이상 모른 척 해서는 안된다는 뜻이지요."
카오미 씨는 자신의 팟캐스트를 포함해 더이상 '아동'이 아니라 '성인'이 된 입양인들이 한국 사회에 대한 요구와 압력이 더 커질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지난 9월부터 덴마크 입양인들을 중심으로 해외입양인들이 직접 진실화해위원회에 입양 당시 인권 침해 여부를 판단해달라는 조사 신청서를 제출하고 있다. 3회에 걸쳐 조사 신청서를 제출하면서 신청자 수는 306명으로 늘었고, 입양 국가도 노르웨이, 스웨덴, 미국 등으로 확대됐다. 카오미 씨도 신청서를 접수했다고 한다. 그는 입양기관이 가족찾기를 할 수 있는 유일한 '단서'인 입양기록을 갖고 있기 때문에 입양인들이 입양기관을 상대로 문제제기를 하기 힘들어한다며 입양기록을 국가가 관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언어 때문에 한국에선 일자리를 구하기 힘들어 이주를 생각하지 못했던 입양인들 중에서 은퇴 후 한국에서 살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는 입양인들도 많습니다. 한국 정부와 입양기관들은 입양을 보내면 그걸로 끝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이제 자신의 목소리와 돈과 힘을 가진 성인이 된 입양인들이 한국으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온 입양인들에게 많은 한국 사람들이 묻습니다. '너는 여기 왜 왔니? 입양간 나라로 가서 가족들과 함께 풍족한 삶을 즐겨라.' 자신의 뿌리와 연결되고 싶어하는 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입니다. 나를 낳아준 부모를 모른다는 사실을 그대로 둔채 자신의 삶을 즐길 수는 없습니다. 그 상실은 항상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한국을 방문하기 전까지 추석 명절에 대해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한국에 와서 처음 경험한 추석은 정말 놀랍더군요. 상점마다 가족 방문을 위한 선물세트가 넘쳐나고 편의점을 제외하고 서울의 모든 가게가 셧다운 된 것 같았습니다. 입양 서류에 따르면 제 고향은 평택인데 서울에서 기차로 1시간 밖에 안 걸리는 곳이더군요. '어쩌면 평택에서 내 가족들이 다 모였을 수도 있겠구나, 나를 빼고, 나라는 존재를 모르고. 내게 고향은 너무 가깝지만 너무 멀구나.' 당시 내가 느꼈던 감정입니다. 입양인들에게 한국은 고국이지만 우리는 한국으로부터 분리돼 있습니다."
'굶어죽지 않고 살아 남았고 좋은 교육을 받았으니 잘된 것 아니냐'는 대답을 한 홀트 전 이사장을 포함해 해외입양에 대한 이런 인식에 대해 카오미씨는 되물었다.
"제가 한국에서 자랐다면 지금쯤 마트나 식당에서 일하면서 가난하게 살았을 수도 있겠죠. 그러나 가족이 있을 수 있고, 그들과 행복하게 살았을 수도 있습니다. 저는 싱글이고, 입양을 통해 겪은 일들로 인한 트라우마로 종종 깊은 우울감에 빠집니다. 어떻게 이게 더 나은 삶이라고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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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홍기혜
onscar@pressian.com
프레시안 편집·발행인. 2001년 공채 1기로 입사한 뒤 편집국장, 워싱턴 특파원 등을 역임했습니다. <삼성왕국의 게릴라들>, <한국의 워킹푸어>, <안철수를 생각한다>, <아이들 파는 나라>, <아노크라시> 등 책을 썼습니다. 국제엠네스티 언론상(2017년), 인권보도상(2018년), 대통령표창(2018년) 등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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