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과근무 그만! 미국 노동자들의 '조용한 멈춤'

대량 해고·추가 업무에 인플레 겹친 탓…"당연한 주장에 '꼬리표'" 비판도

미국 워싱턴D.C.에서 교통분석가로 일하던 페이지 웨스트(24)는 입사 1년이 채 안 된 시점에서 더 이상 초과근무를 하지 않기로 했다. 업무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 머리카락이 빠지고 수면 부족에 시달리는 날이 계속됐기 때문이다. 그는 주 40시간을 넘겨 일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추가로 업무 교육을 이수하거나 동료들과 어울리는 시간도 없애기로 했다. 그는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나는 내가 일하기로 돼 있는 시간만 근무하고 받은 만큼만 일하며 그 외에 추가로 더 일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코로나19 대유행 때 노동자들을 대량 해고한 뒤 이후 오히려 노동자들의 사직과 구인난을 겪고 있는 미국 노동시장에서 최근 '조용한 멈춤(quiet quitting)'이 화두다. 이는 실제로 직장을 그만두지는(quitting) 않지만 정해진 시간과 업무 범위 안에서만 일하고 초과 근무를 거부하는 노동 방식을 뜻한다.

<워싱턴포스트>(WP) 등 미 언론은 '조용한 멈춤'이 지난달 뉴욕에 거주하는 기술자 자이드 칸(24)이 소셜미디어(SNS)에 올린 짤막한 영상을 계기로 대중의 관심을 받게 됐다고 설명했다. 칸은 영상에서 "최근 '조용한 멈춤'이란 용어를 배웠다"며 "이는 직장을 완전히 그만두는 게 아니라 맡겨진 일 이상의 업무를 멈추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영상에서 "일이 곧 삶이 아니며, 당신의 가치는 당신의 성과로 결정되는 게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영상은 300만건이 넘게 조회됐고 4500건에 이르는 댓글이 달렸다.

기업들이 이 현상에 주목하는 이유는 코로나 대유행 이후 미국 노동시장이 구인난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 유행 초기에 해고된 노동자들이 완전히 은퇴하거나, 육아 등 돌봄 노동 탓에 복직을 하지 못하는 등의 이유로 노동자들의 노동시장 복귀는 더딘 상황이다. 남은 노동자들은 해고의 충격, 심한 업무강도와 전염병으로 인한 위험이 가중되며 노동권 보호를 위한 노동조합을 꾸리고 있다. 대기업 아마존·스타벅스 등에도 노조가 들어섰다.

노동자들의 힘이 강해지는 것을 경계하고 있는 기업들은 '조용한 멈춤'에 "꼬리표"를 붙이기 바쁘다. <워싱턴포스트>(WP)는 기업 조직 전문가들이 '조용한 멈춤'이 그저 "업무 몰입도 저하"의 다른 이름이며 "전형적인 의욕 부진 현상"이라고 평가한다고 보도했다. 매체는 전문가들이 이것이 생산성 저하 및 동료들의 불만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본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다른 전문가들은 이 같은 해석은 "명백한 거짓"이라고 반박한다. 여성 리더십 전문가인 캐시 카프리노는 미 CNN 방송에 '조용한 멈춤'이 최소한의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계약된 업무 범위를 넘어서고 수당을 받지 못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코로나 이후 일보다 건강과 행복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가치관이 이동한 탓에 '조용한 멈춤' 등의 현상이 일어났다는 주장도 있지만, 보다 실질적인 노동 환경 변화가 배경에 있다는 해석도 나온다. CNN은 전문가들이 고용주가 코로나 이후 일어난 대량 사직을 고려하지 않은 탓에 남은 직원들에게 추가 업무가 부과됐다는 점을 지적했다. 더구나 노동자들은 인플레이션 탓에 실질적인 임금 하락까지 경험 중이다. 기본 근무시간에 대한 보상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는데 초과 근무까지 하고자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조용한 멈춤'을 2008년 금융위기 뒤 고조된 경제적 위기감을 바탕으로 미국 사회에 자리 잡은 '허슬 문화(hustle culture)'에 대한 반발로 보는 시각도 있다. 허슬 문화는 개인 생활보다 업무를 중시하고 초과 근무를 기꺼이 받아들이며 열정적으로 일하는 것을 높이 평가하는 직장 문화다. 2018년 전기차 기업 테슬라 최고경영자(CEO) 일론 머스크가 더 오래 일할 것을 권장하며 "주 40시간 일해선 세상을 바꿀 수 없다"고 발언한 것이 대표적이다.  

수당이 지급되지 않는 초과 근무를 하지 않겠다는 정당한 주장을 굳이 '조용한 멈춤'이라는 용어로 만든 것은 "반노동적 꼬리표"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나온다. 미디어 컨설팅 기업을 운영하며 노동 관련 뉴스레터를 발행하는 에드 지트론은 미 NPR 방송에 이 용어가 "직원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추가 보상 없는 과로 문화를 통해 이익을 얻는 기업의 방식에서 유래했다"며 "'조용한 멈춤'은 '적게 일하는 것'이 아니다. 정확히 받은만큼 일하고 추가적인 의무를 지지 않으며 할당된 시간을 초과해 일하지 않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트론은 이 현상의 배경을 "코로나 대유행 뒤 기업이 막대한 이윤을 챙기는 동안 수십 만 명이 해고되는 것을 보며 사람들이 사회가 노동자보다 기업을 더 존중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라고 설명하며 '조용한 멈춤'은 "상사를 위해 무료로 초과근무를 하지 않는 노동자를 회사의 돈을 훔치는 것으로 치부하는 선전"이라고 비난했다.

'조용한 멈춤'을 "업무 몰입도 저하"로 평가하고 있음에도 대량 사직과 구인난이 해소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기업들은 직원들을 '진짜 사직'으로 내몰지 않으면서 '업무 몰입도'를 끌어올릴 방법도 찾으려 하는 것으로 보인다. <워싱턴포스트> 등 외신들은 고용주의 관점에서 더 많은 휴가 사용을 장려하는 등 직원들의 소진을 막을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반면 지트론은 이 현상을 타개하고 싶다면 "초과 근무에 수당을 지급하면 될 일"이라고 일축했다.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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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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