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당 활동의 '완전한' 자유를 허하라

[장석준 칼럼] 양당 정치의 한계, '탈-정당' 아닌 '지역정당'·'정당연합'으로 극복해야

한 달 전 지방선거에서 광역의원은 12% 넘게, 기초의원은 10% 가까이 투표도 없이 당선됐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이 낸 광역의원 후보들이 각각 호남과 영남에서 선거도 치르지 않고 당선증을 받았고, 많은 기초의원 2인 선거구에서 두 당 후보들이 사이좋게 나란히 당선됐다. 대한민국 지방의원 10명 중 1명이 시민들에 의해 선출되지 않고 양대 정당에 의해 임명된 셈이다.

그러고 나서 한 달 뒤, 5년 동안 절치부심하다 대선에서 신승을 거둔 여당은 권좌에 복귀하자마자 당내 권력 투쟁에 여념이 없다. 젠더 갈라치기로 당권을 쥐었던 대표와 그 이름도 낡고 구린 '윤핵관'들이 혈투를 벌인다. 그들이 내세운 대통령은 지지율이 벌써 30% 대로 곤두박질치는 중이고 스태그플레이션형 경제 위기의 어두운 그림자가 엄습하는데도 말이다.

반대편도 사정은 그리 다르지 않다. 두 선거에 내리 패배하고서 새 대표 선출 절차에 돌입한 거대 야당에서도 치열한 내전이 펼쳐지려 한다. 그런데 도대체 싸우는 이유를 잘 모르겠다. 이념, 노선 차이는 잘 드러나지 않고, 감정싸움만 두드러진다. 그리고 이 싸움에 더 많은 시민을 동참시키려고 안간힘을 쓴다. 정치는 점점 더 굿판을 닮아간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상연되는 이 모든 부조리극에는 공통의 키워드가 있다. 바로, '정당'이다.

'탈-정당 민주주의'론이 대두하지 않을 수 없는 시대

정당이 문제다. 정치학 교과서에는 정당이 문제 해결 수단이라고 되어 있는데, 지금 우리 현실에서는 오히려 정당이 온갖 문제의 본산이다. 시민들이 대의민주주의에 보다 효과적으로 참여하기 위한 수단이 정당이라는데, 실제로는 정당이 시민과 대의민주주의의 거리를 늘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소수 엘리트들이 정치권력을 놓고 저희끼리 싸우기 위한 수단이 되어 있고, 시민들은 오직 이런 소수의 이권 다툼을 위해서만 동원된다.

그래서 '정당 없는' 민주주의가 대안이라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시민들이 굳이 정당이라는 매개 수단을 거치지 않고 결정 과정에 직접 참여하는 체제가 21세기 민주주의로 더 어울린다는 것이다. 바야흐로 네트워크 시대이므로 이제는 그럴 만도 하다는 것이다.

양당 독점 정치의 부패와 퇴행이 너무도 심각한 데다, 이에 도전한다고 큰 소리 치던 우파 쪽 시도(안철수 세력)나 좌파 쪽 시도(진보정당)가 모두 양당 독점 정치에 투항하거나 지지부진하다. 그러니 '탈-정당 민주주의'론이 나올 만도 하다. 게다가 정당 정치가 우리보다 훨씬 더 발전했다는 서유럽 국가들조차 신자유주의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형국이라, 이런 목소리가 더욱 힘을 얻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탈-정당 민주주의가 바람직하고 실현 가능한 대안일 것 같지는 않다. 적어도 예측 가능한 미래 안에는 그렇다. 이유는 간단하다. 지금에 와서 정당이 애물단지가 됐다지만, 19세기 말-20세기 초에 정당이 대중에게 절실히 필요한 수단이 된 그 요인들은 지금도 전혀 바뀌지 않았다.

정당이라는 조직 자원이 없을 경우에 대의민주주의라는 장에서 대중은 늘 관료나 지식 엘리트, 자본 소유 계급에 절대적으로 불리하기만 할 뿐이다. 우여곡절과 시행착오 끝에 그나마 이들에 대항할 조직 자원으로 발견된 것이 대중정당이었다. 독일 사회민주당을 필두로 산업자본주의의 노동 대중이 정당으로 결집하면서 비로소 보통선거제도가 도입됐을 뿐만 아니라 선거제도 자체가 계급들이 서로 겨뤄볼 만한 무대가 됐다.

지금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자본 소유 불평등, 지식 독점과 격차 등이 해소되지 않은 상황에서 정당이라는 요소 하나만 사라지고 만다면, 대의민주주의는 곧바로 반민주 체제로 돌변할 것이다. 노동조합 같은 시민사회 기관들이 잔존하더라도 결말은 마찬가지다. 이들이 정치적 대항력을 형성하려면, 어쨌든 모종의 '정당'을 형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역정당론의 문제제기는 지역정치 수준을 넘어선다

오늘날 민주주의에서 무엇보다 정당이 문제이지만, 그렇다고 정당을 배제하거나 우회할 수는 없다는 이 궁지. 이러한 궁지를 감안할 때, 탈-정당 민주주의론보다 더 현실적이면서도 풍부한 영감과 고민을 던져주는 문제제기는 지역정당론이다.

"지방의원 10% 무투표 당선" 신화를 남긴 지방선거가 끝나자 지역정당론이 새삼 언론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역정당의 문제의식은 결코 요즘 급조된 게 아니다. 서울 은평이나 영등포 등에서 이미 지역정당운동을 벌이는 이들이 있고, 이 운동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해온 윤현식 지역정당네트워크 연구위원 같은 이들이 있다.

이들의 주장은 어찌 보면 간단하다. 정당법 제17조는 5곳 이상에 광역시도당을 두어야 정당으로 등록할 수 있다고 규정하며, 제18조는 광역시도당의 당원이 1000명 이상이어야 한다고 못 박는다. 또한 제3조는 중앙당이 반드시 수도에 소재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이런 정당법 조항들에 따라 대한민국에서는 서울에 중앙당을 둔 전국정당만이 인정된다. 특정 광역시도에만 조직이 있거나 시군구 차원에서 활동하는 정당은 존재할 수 없다. 지역정당이 불허되는 것이다.

지역정당론자들은 이런 정당법 조항들을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창당 시점부터 5곳 이상의 광역시도에 각 1천 명 이상의 당원을 확보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정당을 '쉽게' 만들지 못하게 진입장벽을 세워 놓는다는 의미다. 지역정당을 불허하는 규정에 담긴 철학은 무엇인가? 지역주의 정치를 막자는 고육지책? 그보다는, 정당은 시민들이 '함부로' 만들어서는 안 되는 조직이라는 사고가 더 강하게 감지된다. 시민과 정당의 사이가 '너무 가까워서는' 안 된다는 생각. 이것은 도대체 무슨 민주주의인가?

지역정당론과 그 운동은 이런 원론적 문제제기에서 더 나아가, 우리의 눈길을 한국 민주주의 역사의 결정적 순간 중 하나로 이끈다. 그것은 앞의 정당법 조항들이 제정되던 순간이다. 이 조항들은, 아니 정당법 자체가 1962년 12월에 박정희 군사정부에 의해 처음 제정됐다. 정당법은 쿠데타에 성공한 지 불과 1년밖에 안 된 시점에, 그러니까 아직 요식적인 선거조차 거치지 않은 '순수한' 군사정부가 만든 법이다.

그 전에는 정당법 자체가 없었다. 4월 혁명 직후에 제정된 '신문 등 및 정당 등의 등록에 관한 법률'이 있었고, 그 안에는 현행 정당법 조항들 같은 경직되고 세세한 규제는 전혀 없었다. 그저 정당 등록 절차만 정해 놓았고, 등록 요건에는 '당명', '강령', '당헌'만 있었다. 그러니까 군부 쿠데타가 있기 전에 대한민국에서 활동하던 정당들(보수정당이든 혁신정당이든)은 지금보다 훨씬 더 '자유'란 말에 부합하는, 정당 활동의 자유를 누리고 있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중요한 가설 하나를 세워봄직하다. 제6공화국의 양당 독점 정치는 그 뿌리가 5.16 군사 쿠데타가 강요한 정당 질서에 있다는 것이다. 민정 이양을 앞두고 군사 쿠데타 세력은 한편으로는 스탈린식 공산당을 모방하여 저들 나름의 당-국가 체제를 이끌 민주공화당을 창당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당법을 신설하여 정당 활동의 자유를 제약했다.

이때부터 시민들의 정치 참여를 불온시하고 대중의 일상세계에서 정치를 최대한 배제하려는 박정희 세력의 철학이 한국 사회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대중이 정당이라는 무기를 자기 것으로 되찾으려는 시도는 끊임없이 억압됐고, 이런 기억이 차곡차곡 쌓일수록 시민들의 자생적 정당 혐오 역시 강해졌다. 오늘날 국민의힘-더불어민주당의 양당 독점 정치는 대통령제나 승자독식 선거제도 같은 제도적 요인들에 의존할 뿐만 아니라 이렇게 오랫동안 축적된 역사적 경험에도 기반한다.

지역정당론과 그 운동은 한국 민주주의의 이러한 흑역사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박정희 정당법의 청산을 통해 정당 활동의 '완전한' 자유를 허할 것을 요구하며, 정당이 시민들이 손쉽게 활용할 수 있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는 지당한 주장을 앞장서서 외친다. 그렇기에 지역정당의 문제의식은 결코 한국 지역정치의 왜곡을 교정하는 대증요법에 그치지 않는다. 한국 민주주의를 60여 년 묵은 악몽과 망각에서 구해내려는 근본적 처방이다.

탈-정당이 아니라 정당 형태의 변화를 향해 

그런데 정당 활동의 '완전한' 자유를 누리려면, 지역정당만으로는 부족하다. 정당연합 또한 필요하다. 정당연합이란 복수의 정당들이 공동의 이념, 정책, 목표를 위해 마치 하나의 정당처럼 선거 등에 함께 대응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을 제외한 많은 나라에서는 굳이 이렇게 설명을 달지 않아도 좋을 만큼 정당연합이 이미 친숙한 일상이 되어 있다. 몇 주 전 프랑스 하원의원 선거에서는 좌우를 막론하고 대다수 정치 세력이 정당연합 형태로 선거에 임했고, 콜롬비아 대선 당선자인 구스타보 페트로도 '역사적 협약'이라는 정당연합의 후보였다.

논리적으로 생각해봐도, 지역정당이 있는 곳이라면 반드시 정당연합도 있어야 한다. 지역마다 활동하는 여러 정당들이 전국 정치에 영향을 끼치려면, 서로 소통하고 연대해야만 한다. 지역정당들끼리 교류할 수도 있고, 전국정당들과 지역정당들이 협의기구나 연합조직을 만들 수도 있으며, 전국정당들의 네트워크와 지역정당들의 네트워크가 서로 협력할 수도 있다. 이들이 선거에 공동 대응하고, 공동 집권할 수 있어야 한다. 이래야만 정당 활동의 '완전한' 자유라 할 수 있다.

21세기에 정당 정치가 진화해가야 할 방향이 여기에 있다. 정당은 현대 자본주의의 변화된 조건에 맞춰 유연하고 기민하게 민의에 부응하기 위해, 경직되고 방만한 중앙집권적 조직 형태에서 벗어나야 한다. 시민들이 노동조합이나 협동조합을 만들 듯이 정당을 만들 수 있어야 하고, 이런 정당들이 시대의 요구에 맞춰 결집과 결별을 반복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럴 때에만, 정당이 대의민주주의의 발전된 형태를 이루는 필수 구성요소 중 하나로 남을 수 있다.

많은 나라의 정당 정치가 오래 전부터 이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으며, 이것은 대한민국 제6공화국에 꼭 필요한 출구이기도 하다. 즉, 민주주의의 전반적 위기 속에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탈-정당이나 아니라 정당 형태의 급진적 변화다.

물론 대한민국에서 지역정당이나 정당연합이 자유롭게 활동하려면, 기존 정당법, 선거법이 대폭 개정돼야 한다. 지금까지 모든 정치 개혁이 그랬듯이, 양당 독점 정치가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이게 도대체 어느 세월에 가능할까.

하지만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다. 제도 개혁 이전에라도 실험은 시작돼야 하고, 실험들이 왕성히 벌어져 하나의 도도한 흐름을 이룰 때에만 비로소 제도 개혁도 성사될 수 있다.

바로 이 대목에, 진보정당들이 해야 할 역사적 과업이 있다. 마치 2000년대 초에 민주노동당이 한국 정치에 본격 대중정당 모델을 처음 도입했듯이, 이제 진보정당들은 지역정당-정당연합 실험에 자신을 개방해야 한다. 정당법, 선거법이 바뀌기 전이라도 자당 지역조직들이 독자적인 지역정당 형태로 활동하거나 아니면 지역정당들과 자유롭게 연대할 수 있도록 열어놓아야 한다. 또한 과거와 같은 방식의 진보정당 대통합을 무작정 반복하려 하기보다는 다양한 수준에서 진보정당들의 협력과 연대를 시도해야 한다.

어쩌면 양당 독점 정치는 양대 정당과 똑같은 형태의 중앙집권적 정당을 만들고 키워서는 타파할 수 없는 것일지 모른다. 대중정당이되 두 당과는 조직 형태나 활동 방식이 전혀 다른 정당을 통해서만 드디어 경쟁다운 경쟁이 가능해지지 않을까.

말하자면, 진보정당운동은 다시 '실험'의 시대에 진입해야 한다. 역사 속에서 좌파의 생명력은 항상 새 시대를 여는 '실험'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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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준 전환사회연구소 기획의원은 오랫동안 진보 정당 운동의 정책 및 교육 활동에 참여해왔으며, 자본주의 위기에 맞선 진보적 사회과학을 재구성하고자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에서 연구 및 출간 사업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레프트 사이드 스토리 : 세계의 좌파는 세상을 어떻게 바꾸고 있나>, <사회주의>, <장석준의 적록 서재>, <신자유주의의 탄생 : 왜 우리는 신자유주의를 막을 수 없었나>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국가 대 시장 : 지구 경제의 출현>, <안토니오 그람시 : 옥중수고 이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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