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갈 수 없다면 모스크바에 있는 맥도날드로 오세요."
1990년 1월 소련에 처음 문을 연 미국의 대표적 패스트푸드 업체 맥도날드의 당시 텔레비전 광고 문구다. 단순한 햄버거가 아니라 '냉전의 끝과 같은 맛'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맥도날드가 16일(현지시각)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이유로 러시아에서 완전히 철수하기로 했다.
크리스 켐프친스키 맥도날드 최고경영자(CEO)는 직원들에게 보낸 서한에서 "30년 동안 러시아에서 우리의 존재는 '버거 외교'부터 '맥도날드 평화이론'에 이르기까지 음식을 넘어선 영감을 줬다. 맥도날드는 소련의 개방 그 자체였다"며 러시아에서 철수하는 데 고민이 컸다는 점을 시사했다. 그는 소련에 맥도날드 매장을 낸 것이 "맥도날드 역사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순간 중 하나"였고 "푸쉬킨 광장에서 빛나는 (맥도날드의 상징) 황금 아치는 철의 장막 양쪽 많은 이들에게 새 시대의 시작을 알렸다"고 덧붙였다. 켐프친스키는 그러나 "우크라이나 전쟁이 야기한 인도주의적 위기를 무시하는 것은 불가능했다"며 철수 결정의 이유를 밝혔다. 맥도날드는 현재 세계 100개가 넘는 국가에 3만9000곳 가량의 매장을 운영 중이다.
맥도날드의 소련 진출은 우연한 사건이 배경이 됐다. 냉전 중이었던 1976년 캐나다 몬트리올 올림픽 당시 러시아 선수들이 선수촌 내부에서 효율적인 수단을 찾고 있을 때 맥도날드가 '빅맥 버스'를 대여해주기로 한 것이 계기다. 맥도날드는 이날부터 소련에 매장을 낼 방법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다고 한다. 맥도날드가 지역 농부들과 관계를 맺으려 애쓰고 소련의 개방화가 진행된 14년 뒤에야 모스크바에 첫 매장을 낼 수 있었다.
첫 매장이 모스크비 중심부 푸쉬킨 광장에 문을 연 1990년 1월31일 매장 밖에는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수천 명의 대기열이 몰렸다고 한다. 당시 <워싱턴포스트>(WP)는 아침 10시 개점을 앞두고 사람들이 450미터나 줄을 서 있었다고 보도했다. 줄 서 있던 시민 중 한 명인 무역협동조합 노동자 빅토르 콘드라트예프는 매체에 "줄이 길다고 누가 신경이나 쓰겠나? 우린 줄 서는 데 익숙하다. 몇 시간, 가끔은 며칠이나 줄을 서야 하니까"라고 말했다. 런던에 거주하는 정치철학자 블라드 벡슬러는 9살이었던 당시 2시간이나 줄을 서 몇 주 동안 모은 돈으로 치즈버거·감자튀김·코카콜라를 샀다고 <AP> 통신에 전했다. 그는 "'서방 사람들이 어떻게 일을 더 잘하는지 한 번 가서 보자'는 마음이 있었다"고 덧붙였다. 개점일 맥도날드는 제품을 3만개나 팔았다.
서방 매체들은 900석을 갖춘, 당시 세계 최대 맥도날드 매장에 대한 소련인들의 기대가 높았다고 전했다. 소련 노동자 평균 임금과 크게 다르지 않은 시간당 1.5루블의 임금에도 630개 일자리에 2만7000건의 지원서가 도착했다. 결코 저렴하지 않은 가격에도 매장은 문전성시를 이뤘다. <워싱턴포스트>는 "미국에선 빅맥 하나를 사기 위해 노동자들이 평균적으로 20분 일하면 되는 데 비해 소련에서는 2시간30분을 일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사무직 노동자인 크사나 바셔크는 이 매체에 "여기 매일 오는 건 감당이 안 된다. 우리 기준으로는 고급 레스토랑"이라고 말했다.
매체들은 방문객들이 "내일이라도 문을 닫을지 모른다"며 아이들이나 동료들에게 자랑할 목적으로 맥도날드 로고가 새겨진 일회용 컵이며 햄버거 포장지를 버리지 않고 싸 들고 돌아갔다고 전했다.
개점 당시 6개월 안에 철수하게 될 거라는 비관적 예측이 나오기도 했지만 러시아 맥도날드는 30년 넘게 사업을 영위해 러시아 내 약 850개의 매장을 운영하고 있었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지난해 매출의 9%를 올렸다. 맥도날드가 러시아에서 고용하고 있던 노동자는 6만2000명에 달한다. 맥도날드는 지난 3월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에서 계속 매장을 운영한다는 전세계 소비자들의 비난을 받으며 러시아 내 영업 일시 중단을 선언했다. 맥도날드 쪽은 우크라이나에 있는 108곳 매장은 전쟁 때문에 운영되지는 않지만 급여는 전액 지급되고 있다고 밝혔다.
미국 자본주의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대표적 브랜드 중 하나인 맥도날드의 소련 진출은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전 대통령이 취한 개방 정책의 대표적 예로 꼽힌다. <뉴욕타임스>(NYT)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은 1996년 맥도날드가 진출해 있는 나라들끼리는 전쟁을 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황금 아치 이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프리드먼은 이 현상이 일어나는 이유로 맥도날드가 진출할 정도로 중산층의 소비력이 탄탄한 나라의 국민들은 더 이상 전쟁을 원치 않는다는 점을 지적했다. 맥도날드를 유치했다는 것은 기업인들이 큰 투자를 할 수 있을 정도로 해당 지역이 안정적이며 경제적으로 발전했고 무역에 개방적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맥도날드 평화론은 국가의 개방성이 커 글로벌 경제와 융합될수록 국가간 경제적 의존도가 높아져 전쟁 가능성이 적다는 세계화와 평화 사이의 관계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사용돼 왔다. 이 이론은 2008년 러시아와 조지아 전쟁 때까지 대체로 유효했다.
"서방과 러시아가 서로에 대한 입맛을 잃고 있다"
러시아 맥도날드의 상징성이 컸던 만큼 철수에도 "소련 고립 시절로의 귀환"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기업분석회사인 글로벌데이터의 닐 손더스 이사는 철수가 "러시아의 새로운 고립을 뜻한다"며 서방 기업들이 "민주주의와 자유 원칙에 입각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고 봤다.
BBC 러시아 편집인인 스티브 로젠버그 맥도날드의 철수를 "시대의 종말"이라고 평가했다. 1990년 모스크바 맥도날드 개점일에 줄을 섰다는 그는 "그 미국 햄버거들은 소련이 서방을 포용한다는 상징이었고 따뜻한 음식은 냉전을 끝내는 데 도움을 줬다"며 "지금은 완전히 다른 시간이다. 러시아와 서방은 서로에 대한 입맛을 잃고 있다"고 썼다. 그는 "맥도날드의 철수는 이 패스트푸드 대기업이 이제 예전의 정상적인 상황이 돌아오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는 것, 러시아 정부가 우크라이나에 대한 '특별군사작전'으로 부르는 것이 장기적인 상황 변화를 야기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분석했다.
맥도날드는 러시아 사업 전체를 현지 구매자에게 매각할 계획이고 절차가 끝날 때까지 러시아 직원들에게 급여를 지급할 예정이며 매각 뒤 고용승계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러시아 국영 <타스> 통신은 구 맥도날드 매장이 6월께 새로운 이름으로 문을 열 것이며 메뉴며 공급업체, 일자리도 유지돼 "사실상 이름만 사라지는 것"이라고 보도했다.
러시아를 떠난 기업은 맥도날드 뿐만이 아니다. <타스>는 프랑스 자동차 회사 르노가 16일 르노 러시아 지분 100%를 모스크바시 정부에 넘겼으며 2008년부터 전략적 파트너십 계약을 맺고 있던 현지 자동차 업체인 아브토바즈의 지분 68%도 러시아 국영 자동차개발연구소(NAMI)에 양도했다고 보도했다. 러시아를 철수한 주요 외국 기업이 국유화된 첫 사례다. 앞서 4월 러시아 쪽은 매수 예상 비용이 1루블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르노 쪽은 매각 비용에 대한 사실 확인을 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BBC는 르노가 이 계약으로 회사가 약 22억유로(약 3조원)의 손실을 부담해야 한다고 보도했다. 2월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뒤 에너지·식음료· 금융 등 전 분야에 걸친 기업들의 러시아 사업 중단이나 축소가 이어지고 있다.
켐프친스키는 직원들에게 보낸 서한에서 러시아를 떠나며 그저 "안녕"이 아니라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이라고 말하자"며 아쉬운 인사를 남겼지만, 러시아인들은 이미 맥도날드를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은 마음은 버린 듯 하다. 이제 아무 곳에서나 쉽게 패스트푸드를 살 수 있는 러시아에서 16일 시민 알렉산더 비시냐코프(35)는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맥도날드가 떠나게 놔두라. 사실 맥도날드가 철수하게 돼서 기쁘다. 이제 러시아 소유의 패스트푸드 매장을 이용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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