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바다' 토벌 시작, '애기 빨치산' 운명은

['박헌영의 아들' 원경 대종사 이야기] 22~23화

22. 소년 빨치산

병삼이는 이제 10살 남짓한 어린 나이였지만 단순히 어른들을 따라다닌 것은 아니었다. 그는 나름 임무가 있는, 소년 빨치산, '애빨(18세 미만의 어린 빨치산을 부르던 말로 애기 빨치산의 준말)'이었다. 그 임무는 세 가지였다. 하나는 보급투쟁, 두 번째는 척후병, 세 번째는 연락병이었다.

"병삼아, 우리 먹을 된장이 떨어졌구나. 마을에 가서 된장 좀 얻어 와라."

병삼은 지리산 깊은 곳에 있는 아지트로부터 호위부대와 함께 마을 입구까지 내려왔다. 마을 입구에 다다르면 호위부대는 숲속에 숨어 있고 병삼이 혼자 마을로 들어갔다.

"꼬마 스님, 웬일이세요?"

"저와 상좌스님이 지나가다가 연곡사 쪽에서 지내고 있는데 먹을 것이 떨어져 된장 좀 얻으러 왔습니다."

"상좌 스님은 어쩌고?"

"발을 다치셔서 움직이기가 어려워서요."

"꼬마 스님이 고생이 많네요. 조금 기다리세요."

아주머니는 뒤뜰로 가서 된장을 퍼왔다.

"된장, 여기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무관세움보살!"

정찰도 병삼이 가끔 맡은 중요한 임무였다.

"병삼아, 이번에도 우리가 마을에 작전을 나가니 네가 먼저 가서 정찰을 해라."

"예, 아저씨."

"경찰이나 군인들이 나타나면. 지난 번 같이 연락해야 한다."

"알았어요."

"참, 쑥솜(쑥을 말려서 비비면 남는 솜)은 챙겼지?"

"아참"

"이 놈아, 그것 안 가지고 가면 어떻게 연락을 하려고!"

산 아저씨는 눈을 크게 뜨고 혼을 내는 시늉을 했다.

병삼은 이현상 부대와 같이 작전대상인 마을로 내려온 뒤 먼저 마을로 들어가 동네 어린이들과 금세 사귀고 놀았다. 숨바꼭질도 하고, 등 타기도 하고, 땅 따먹기도 했다.

"아니 저기 군인 아저씨들 오네!"

"아이고, 오줌 마려, 나 오줌 좀 누고 올께."

놀다가 군인이나 경찰이 나타나면 병삼이는 오줌 누러간다고 핑계를 대고 아무도 없는 외진 곳으로 달려갔다. 안전한 곳에 도착하면 옷 안에서 챙겨온 쑥솜을 조금 꺼내, 돌 위에 놓고 다른 돌로 그 돌을 치면 불이 붙었다.

"경찰이나 군인이 나타났구나!"

병삼이 붙인 불을 보면 빨치산들은 경찰이 와 있다는 것을 알고 철수하거나 이들을 대비했다. 

연락병도 병삼이 가끔 수행한 임무였다. 정말 중요한 전달사항이 있으면 이현상은 의심을 받지 않는 병삼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도록 했다. 목적지가 먼 경우 병삼이만 혼자 보내기가 껄끄러워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어 의심을 덜 받는 한산스님과 같이 보냈다. 이때도 편지는 의심을 덜 받은 병삼이 소지했다. 병삼은 한산스님과 며칠을 걸어 전북도당이 있었던 전북 순창 회문산까지 가서 주요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왔다.

▲ 원경스님이 소년연락병으로 다녀왔던 순천 회문산의 전라북도 빨치산사령부(이제는 역사관으로 변했다)를 나오고 있다. ⓒ손호철

23. 석실과 네이팜탄

"언제 봐도 멋이 있단 말이야."

병삼은 해발 800미터에 있는 와운마을의 상징인 천년송을 올려다보며 감탄사를 터트렸다. 그는 와운마을을 지나 뱀사골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뱀사골 계곡이 가까워지자 커다란 바위가 나타났다.

"이 바위가 맞나?"

병삼은 예전에 한산스님과 함께 왔던 기억을 되살렸다.

이 바위가 맞는 것 같은데 계곡에는 비슷한 바위가 많아 자신이 없었다. 바위 뒤로 돌아가자 바위사이로 작은 틈새가 보였다. 석실이 맞았다.

석실은 거대한 바위사이에 작은 방이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천하의 은신처이다. 남부군은 이곳을 주요 인쇄소로 사용해 남부군의 기관지인 <승리의 길>, 전북도당이 발행하는 <빨찌산>도 이곳에서 만들었다.

▲ 빨치산들이 인쇄소로 사용했던 뱀사골의 석실 ⓒ손호철
▲ 석실에서 인쇄한 전북도당의 기관지 <빨찌산> ⓒ손호철

석실로 들어가자 남부군 선전대원들이 유인물을 만들고 있었다.

"아저씨, 이거 이현상 아저씨가 갖다 주래요."

"수고했다."

해가 지기 전에 아지트로 돌아가기 위해 병삼은 벽소령 쪽으로 바삐 걸음을 옮겼다.

'원자탄 이외에 인류역사상 가장 비인도적인 폭탄.' 전쟁학자들은 네이팜탄에 대해 이 같이 말한다. 값이 싸 대량생산이 쉬우면서도 폭탄을 투하하면 삽시간에 불이 붙고 잘 꺼지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는 화학물질에 휘발유를 섞어 만들기 때문에, 빨치산들은 이를 '휘발유통'이라고 불렀다.

51년 11월 휴전선을 중심으로 전선이 교착화되고 빨치산들이 견디기 어려운 겨울이 시작되자 이승만 정부는 전면적인 빨치산 동계 토벌작전에 들어갔다. 쥐잡기 작전이라고 이름 붙인 이 작전에 따라 토벌대는 지리산을 동서남북에서 포위해 포위망을 좁혀갔다. 52년 1월 17일 토벌대의 토끼몰이에 쫓기던 유격대와 피난민 2000여 명이 이현상이 은신해 있었던 빗점골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하동 화개면) 대성리 골짜기, 즉 대성골에서 포위당했다. 평상시는 분산되어 있던 유격대와 피난민이 좁은 지역에 몰리자 군은 폭격을 감행했다.

"휘발유통이다!"

사방에 네이팜탄이 떨어지며 화염이 솟아올랐다. 사방에 사지가 찢긴 유격대와 피난민의 시신이 나둥글었다. 이날 폭격과 토벌대의 공격으로 1000여 명이 죽거나 포로가 됐다. 1963년까지 지리산에서 빨치산으로 활동했던 최후의 빨치산 정순덕도 네이팜탄으로 5일간 대성리 계곡이 불타올라 바위틈새에 선 채로 5일을 버텼다고 한다. <남부군>의 작가 이태도 이 전투에서 본대를 잃어버리고 산속을 헤매다가 토벌대에게 잡히고 말았다. 이현상 부대만 해도 이날 공습으로 그 규모가 400명에서 150명으로 줄고 말았고, 이후 예전과 같은 힘을 행사할 수 없었다.

▲ 지리산 포위작전으로 빨치산을 한군데로 모은 뒤 네이팜탄으로 공격해 사실상 궤멸시킨 하동 대성리계곡 ⓒ손호철

"대장님, 저희가 길을 뚫을 테니 대장님은 빨리 빠져나가십시오."

"고맙네. 다음 세상에서 보세."

이현상은 경호대원들의 결사투쟁 덕분에 포위망을 벗어날 수 있었다.

"아저씨! 스님!"

"병삼아, 지난번처럼 나를 잃어버리지 말고 잘 따라와라!"

병삼은 불바다 속에서 이현상 아저씨와 한산스님을 놓치지 않으려고 죽을힘을 다해 달렸다. 수많은 전쟁의 현장을 경험한 병삼이지만, 이날의 광경은 지금까지 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지옥 그 자체였다.

"개자식들!"

이현상은 토벌대가 지리산의 남쪽인 대성골에 집중되어 있어 북쪽은 경비가 허술할 것이라고 판단해 일단 북으로 피하기로 했다. 그는 한산스님, 병삼을 데리고 백무동 루트를 따라 벽송사 쪽으로 이동했다. 벽송사가 가까워지자 벽송사의 상징인 엄청난 거목이 눈에 들어왔다. 벽송사도, 이곳에 있었던 빨치산 야전병원도 다 불 타 없어졌다.

▲ 함양 벽송사에서 원경스님(왼쪽에서 두번째)이 심지연(원경스님 좌), 최갑수 교수(원경스님 우) 등과 지리산에서 쓰러진 빨치산 등 희생자들을 위해 천도제를 지내고 있다. ⓒ손호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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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철

화가를 꿈꾸다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로 진학했다. 독재에 맞서다 제적, 투옥, 강제 징집을 거쳐 8년 만에 졸업했다. 어렵게 기자가 됐지만, '1980년 광주 학살'에 저항하다 유학을 갔고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일하며 진보적 학술 활동과 사회운동을 펼쳐왔다. <국가와 민주주의>, <한국과 한국 정치>, <촛불혁명과 2017년 체제> 등 이론서와 <마추픽추 정상에서 라틴아메리카를 보다>, <레드 로드-대장정 13800KM 중국을 보다> 등 역사 기행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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