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에게 한 번이라도 따뜻한 사람이었느냐

[김종구의 새벽에 문득]

2002년 12월19일 아침 <조선일보>는 '정몽준, 노무현을 버렸다'는 제목의 사설을 실었다. 제16대 대선 투표 개시를 불과 7시간 남짓 앞둔 18일 밤, 정몽준 국민통합21 대표는 갑작스럽게 '노무현 후보 지지 철회'를 선언했다. 노무현 후보를 한사코 반대했던 보수언론에는 신나는 사건이었다. 조선일보 사설은 "16대 대통령 선거의 코미디 대상(大賞)은 단연 '노무현·정몽준 후보 단일화'"라고 규정한 뒤 "지금 시점에서 분명한 것은 후보 단일화에 합의했고 유세를 함께 다니면서 노무현 후보의 손을 들어줬던 정몽준씨마저 '노 후보는 곤란하다'고 판단한 상황이다. (…) 우리 유권자들의 선택은 자명하다"고 썼다. '정몽준 대표마저 노무현 후보를 버렸으니 국민도 버리라'는 확실한 메시지를 담은 사설이었다.

그런데 국민은 오히려 조선일보 사설을 버렸다. 정 대표의 지지 철회에 대한 분노의 역풍이 거세게 불면서 선거는 결국 노 후보의 승리로 끝났다. 최소한의 상식과 순리를 외면한 정치에 대한 응징이었다. 합리와 이성에서 벗어난 언론 역시 질타의 대상이 됐다. 조선일보 사설은 시민단체 '대선미디어국민연대 선거보도감시위원회'가 뽑은 '19일자 오늘의 나쁜 기사'에 이어 '선거 기간 중 가장 나쁜 보도 5선'에 들어갔다. '코미디 사설 대상감'이라는 누리꾼들의 비판과 조롱도 쏟아졌다.

정치는 결코 산수가 아니다. '1+1=2'의 등식이 성립하지 않을 수도 있고, '2-1'의 답이 꼭 1이 아닐 경우도 있다. 정치의 오묘함이 여기에 있다. 후보 단일화 성사-파기의 결과는 좋은 예다. 세상일에는 어렵더라도 걸어야 할 정도(正道)가 있고, 아무리 욕망이 솟구쳐도 넘지 말아야 할 금도(禁度)가 있다.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배를 뒤집기도 한다'는 것은 정치에서 변치 않는 진리다. 사사로운 이익에 취한 나머지 금도를 어기지 않아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조선일보 2002년 12월19일자 사설.

20년의 세월이 흘러 정말 '코미디 대상'에 뽑힐 만한 사건이 벌어졌다. '정치인의 말 바꾸기'야 한국 정치의 익숙한 풍경이지만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의 말 바꾸기는 '비교 불가' 역대급 수준이다. "마음에 안 들고 무능한 (윤석열) 후보를 뽑으면 1년 만에 손가락 자르고 싶어질 것" 등의 '사자후' 메아리가 채 사라지기도 전에 '윤석열 후보 지지를 위한 사퇴'를 발표했다. 계속 직진 신호를 보내며 질주하다 갑자기 중앙선을 넘어 유턴을 해버린 셈이다. 아마도 '초단시간 중앙선 침범 역주행' 부문에서 쉽게 깨지지 않을 신기록으로 남을 것이다.

노무현-정몽준 후보 단일화를 '16대 대선 코미디 대상'이라고 폄하했던 조선일보는 이번에는 '尹 결단과 安 용단으로 단일화, 정권교체 여론 따른 순리다'는 제목의 사설을 실어 극찬했다. 야권 후보 단일화가 아무리 반가워도 안 대표의 납득하기 어려운 '표변'에 대한 비판도 적당히 가미해가며 기뻐하면 좋을 텐데 그렇지 않다. 20년 전 '대선미디어국민연대 선거보도감시위원회'는 조선일보 사설을 '나쁜 보도'로 선정한 이유에 대해 "정몽준씨의 행태에 비판을 가하는 대신, 정몽준이 노무현을 버렸으니 국민도 버리라고 노골적으로 선동했다"며 "언론사 간판을 달고 있는 한 최소한의 양식이 있어야 한다"고 비판했다. 이를 현재에 원용하면 "안철수씨의 행태에 비판을 가하는 대신, 안철수가 윤석열을 지지하니 국민도 지지하라고 선동했다"는 비판도 가능하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20년 전에는 시민단체의 이런 눈물겨운 선거보도 감시 노력이라도 있었으나 지금은 그런 노력조차도 발붙일 수 없을 만큼 참혹한 언론 환경이니 씁쓸할 뿐이다.

2002년과 2022년 상황은 데칼코마니처럼 비슷하다. '국민통합21 내홍' 기사가 '국민의당'으로 당명만 바꿔 다시 등장했다. "더는 신뢰할 수 없다" "당 대표의 일방적인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다" "당을 떠날 수밖에 없는 현실을 통탄한다"…. 과거의 목소리인지 현재의 목소리인지 분간할 수 없다. 이번에도 역풍의 기미는 곳곳에서 확연하다. 관건은 역풍의 강도다. 20년 전의 강풍이 이번에도 불 것인가. 쉽게 짐작하기 힘들다. 대선 결과와 관계없이 안철수 대표의 정치생명이 종말을 고했다는 것 말고는 아직은 모든 것이 안개 속이다.

선거는 결국 더 간절하게 원하는 쪽이 이긴다. 더 간절하고, 절박하고, 절체절명의 위기의식을 지닌 쪽으로 승리가 돌아간다. 조선일보로 대변되는 수구보수 세력도 무척 간절하고 절박하다. 더는 진보 정권이 나라를 운영하는 꼴을 보지 않겠다는 간절함이 절절히 넘친다. 그것은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노무현 후보가 도덕적 결함이 있어서 기를 쓰고 반대했는가? 자신들이 반대하는 후보의 조그만 약점과 빈틈만 있으면 부풀리고 왜곡해 타격을 가하는 것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본질은 같다. 그것은 간절함을 넘어 '악착같음'이라는 단어가 더 적절할 것이다.

정권 탈환을 추구하는 세력의 집요함은 과연 나라의 미래에 대한 진정한 걱정과 희망에서 나오는 것일까. 꼭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다. 실질적 민주주의의 증진, 경제적 양극화 해소, 평화와 안보, 사회적 통합, 생태와 환경을 최우선으로 하는 정책 전환 등 우리가 마주한 시대적 과제에 대한 후보들의 인식과 능력, 그리고 과제를 실현하기 위한 정책의 효율성과 적실성에 대한 평가는 관심 사항이 아니다. 알맹이는 사라진 정권교체 깃발만 나부낀다.

그러면 다른 반대편 쪽 유권자들의 간절함과 절박함은 어떤가. 대선 초반부터 그런 간절함이 별로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 이번 선거다. 다만 투표일이 가까워지면서 변화의 흐름이 엿보이고, 안철수 후보 사퇴도 하나의 기폭제가 됐다. 결국 이번 선거는 유권자들이 지금의 시대적 좌표를 어떤 지점으로 인식하느냐에 달려 있다. 우리 사회가 민주주의의 증진과 후퇴, 경제적 양극화 완화와 심화, 사회적 통합과 분열, 평화와 대결, 생태·환경 보호와 훼손 등의 갈림길에 마주하고 있다고 판단할지, 또 그런 인식의 강도가 어느 정도 절박할지에 따라 선거 결과가 판명날 것이다.

생각해보면 '인간에 대한 애정'이야말로 정치를 지탱하는 최대의 힘이다. 인간에 대한 사랑이 결여된 정치는 어느 순간 무너질 허무한 바벨탑일 뿐이다. 며칠 전 친한 선배 한 분이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는, 안도현 시인의 그 유명한 시 '너에게 묻는다'를 패러디한 시를 문자로 보내왔다. 정치의 요체, 선거의 본질을 다시금 생각해보게 해주는 것 같아 '후보에게 묻는다' 패러디 시를 소개한다. '대한민국 유권자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힘없는 국민에게 한 번이라도 따뜻한 사람이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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