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 낮은 정권교체'의 '위험 비용'

[김종구의 새벽에 문득]

2007년 12월 제17대 대선이 끝난 이틀 뒤 새벽 동네 목욕탕에 갔더니 탈의실에서 몇 사람이 선거 결과를 놓고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이명박 당선자의 열렬한 지지자로 보이는 그들은 "노무현 정권을 제대로 혼내줘 속이 다 시원하다"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자신들이 싫어한 정권을 몰아냈다는 환희와 의기양양함이 넘쳤다. 그로부터 10여년의 세월이 흐른 뒤, 이명박 전 대통령은 뇌물 수수, 배임, 횡령, 직권 남용 등의 혐의로 구속됐다. 그를 동정하는 여론도 별로 없다. 당시 대선 결과에 환호하던 사람들은 지금 어떤 심경일까. 이 전 대통령에 대한 언론 보도를 접할 때마다 그런 질문이 간혹 머리에 떠오르곤 한다.

새뮤얼 헌팅턴은 여야 간의 수평적 정권교체가 두 번째로 이뤄지는 것을 '민주주의 공고화'의 시점으로 잡는다. 이른바 '두 번의 정권교체 테스트'다. 이 기준을 적용하면 진보정권에서 다시 보수정권으로 넘어간 17대 대선이 우리나라 민주주의가 정착된 시점인 셈이다. 하지만 선거 양상은 이성적이고 성숙한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있었다. 세금폭탄, 퍼주기, 반기업-친노조 정권, 반시장주의, 한미동맹 훼손, 친북 반미 정권…. 대선을 앞두고 쏟아진 참여정부에 대한 무차별적 비난 속에서 '묻지마 정권교체론'이 선거판을 휩쓸었다. BBK 의혹 등 이명박 후보의 도덕적 결함이 확연했으나 정권교체론의 광풍을 막지는 못했다.

역사는 반복된다. 세금폭탄, 무능정권, 북한 굴종 외교, 퍼주기 복지, 친북반미 정권…. 글자 한자 틀리지 않는 똑같은 레퍼토리가 20대 대선에서도 난무한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는 고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표시하면서 마치 자신이 고인들의 진실한 후계자라도 되는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그런 발언에 앞서 색깔론까지 동원해 고인들을 집요하게 음해·모욕한 보수세력의 과거 행태부터 사과하는 게 도리 아닐까.

정권이 잘못하면 선거를 통해 교체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은 정치의 순리다. 그러나 여기에는 전제 조건이 있다. 교체하는 당과 후보가 전임 정권보다 조금이라도 나아야 한다는 점이다. 17대 대선 당시에도 "정권교체의 질이 문제"라는 말이 보수세력 내부에서도 나왔다. 뒤돌아보면 정권교체의 '질'은 낮았고 '위험 비용'은 생각보다 훨씬 컸다. 그런데 2007년 대선과 지금을 비교해보면 그때보다도 오히려 '질'이 훨씬 떨어져 보인다. 후보의 도덕성 문제는 일단 제쳐놓고 능력 면에서만 봐도 서울시장 등을 거치며 나름의 행정 능력을 인정받은 이명박 후보에 비하면 윤석열 후보는 여러 가지 면에서 크게 처진다. '질'은 더 낮아지고 '코스트'는 훨씬 커진 셈이다.

정권의 공과에 대한 평가 기준은 '시대적 과제'에 대한 인식의 정확성, 그 과제를 실현하기 위한 '효율적 전략'의 실행 여부다. 정권교체론 역시 이 기준에 맞춰 판별해야 한다. 정권교체를 주장하고 나선 후보가 당면한 시대적 과제를 얼마나 정확히 인식하고 있는지, 과제를 실현하기 위한 전략을 전임 정권보다 더 합리적 효율적으로 짜고 있는지를 따져 '예상 기대치'에 따라 정권교체의 적실성 여부를 판단하는 것이 이성적이다.

부동산 정책 실패는 이번 대선의 정권교체론을 지탱하는 첫 번째 항목이다. 현 정권의 부동산 정책이 기대에 크게 못 미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대타'를 자처한 야당 후보는 마땅히 부동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새롭고 합리적인 해법을 내놓아야 한다. 그런데 윤 후보는 "집 없는 사람이 민주당을 찍게 하려고 일부러 악의적으로 집값을 폭등시켰다"고 주장한다. '음모론'으로 부동산 정책 실패 원인을 찾으면 집값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는가. 부동산 문제는 풀기 어려운 고차방정식과 같다. 수요공급의 원칙을 넘어서 과거 정책의 후폭풍, 복잡한 심리적 요인, 글로벌적 요인 등까지 얽히고설킨 실타래와 같다. 머리를 싸매고 달려들어도 해법을 찾기 어려운데 문제 풀이의 '전제'부터 틀렸으니 올바른 '해답'이 나올 리 만무하다.

"민주당이 못사는 사람들은 자기편이라고 생각해서 양극화를 방치하고 조장했다." 양극화 문제에 대한 윤 후보의 진단 역시 음모론이다. 코로나 사태로 더욱 절체절명의 과제로 등장한 양극화는 이번 대선에서 상대적으로 논쟁이 실종된 의제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도 '성장'만을 강조하며 양극화 해소를 위한 적극적 해법을 내놓지 않는다. 그런데 윤석열 후보는 한술 더 떠 양극화의 원인을 정치적 음모론에서 찾는다. 양극화 해법을 찾으려는 노력은 당연히 없다. 시민단체 '불평등끝장 2022 대선유권자 네트워크'가 대선 후보들에게 불평등·양극화 해결방안을 물었더니 윤 후보 쪽만 답변서를 내지 않았다고 한다. '못사는 사람들이 어리석게도 민주당을 지지한다'는 윤 후보의 논리는 "빈곤하고 못 배우면 자유가 뭔지 모른다" 등 그동안 수없이 되풀이해온 '약자 비하 발언'의 연장선에 놓여 있다.

최근 열린 중앙선관위 주관 대선후보 2차 토론회에서 윤석열 후보는 민감한 질문마다 "필요하면 검토하겠다"고 답변했다. 사드 추가 배치, 미국 미사일방어(MD) 체제 참여, 한·미·일 군사협력 체결 등 외교안보는 물론 정치개혁 등 상당수 질문에 그런 식의 답변을 했다. 대선 후보라면 중요한 사안에 대해 '필요한지 필요하지 않은지'부터 판단하고 정책을 생각해야 하는데 "필요하면 판단해보겠다"는 어물쩍 답변이 많았다.

'유사시 일본의 한반도 개입' 발언을 둘러싼 논란도 이런 어법에서 비롯됐다. "유사시에 들어올 수도 있는 거지만, 꼭 그걸 전제로 하는 건…". 한미일 군사동맹 체결의 의미나 발언의 앞뒤 문맥을 감안할 때 누가 봐도 일본 자위대의 한반도 개입 허용을 '필요하면 검토하겠다'고 해석되는 발언이었다. 그래 놓고 이 발언이 문제가 되자 국민의힘은 또다시 "왜곡 허위"라고 주장한다. 미국 MD 체제 편입이나 한미일 군사동맹이 갖는 국제정치학적 민감성에 대한 윤 후보의 무지는 이미 많은 전문가들이 지적했으니 덧붙이지 않겠다. 다만 이런 어법을 지켜보면서 과연 그가 대통령이 되면 다른 국가와의 외교관계에서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상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상대국에게 말을 한번 뱉어놓고 그 발언이 문제가 되면 그때도 "진의가 왜곡됐다"고 늘 뒷북 수습에 쩔쩔맬 것인가.

정치지도자에게 가장 필요한 능력의 하나는 설득과 협상 능력이다. 이것은 국내 정치뿐 아니라 국제 관계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상대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잘 듣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입은 닫고 마음은 여는 것이다" "협상이라는 것은 누가 옳고 그르냐를 가리는 게 아니라, 협상 당사자들이 상대편 관점을 포용하는 데 합의하는 것이다"…. 좋은 협상의 조건에 대한 경구들이다. 그런데 윤석열 후보는 이런 미덕과는 동떨어져 있다. 야권 후보 단일화와 관련한 27일의 기자회견 모습은 이를 극명히 보여준다. 상대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니 협상이 진척될 리 없다. 마음은 닫고 입은 열었다. 자신은 옳고 상대편이 틀렸다고 책임을 전가했다.

정권교체론 하나로 시종일관 지탱하고 있는 윤석열 후보. 과연 그는 어느 대목에서 '정권교체의 질'과 '위험 비용'에 대한 신뢰와 안도를 주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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