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 철폐' 상징 투투 대주교 선종, 전세계 애도

노벨평화상 수상, 동성애 차별 철폐 운동도

넬슨 만델라와 더불어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차별 철폐의 상징인 노벨평화상 수상자 데스몬드 투투 성공회 명예 대주교가 26일(현지시각) 타계했다. 향년 90세.

<워싱턴 포스트>는 데스몬드 투투 지적재산권 신탁 대변인인 로저 프리드먼을 인용해 투투 대주교의 사인이 암 합병증이라고 보도했다. 투투 대주교는 1997년 전립선암 진단을 받고 투병 중이었다. 시릴 라마포사 남아공 대통령은 성명을 내고 "데스몬드 투투 명예 대주교의 선종은 우리에게 해방된 남아공을 남겨준 뛰어난 세대와의 고별 중 하나"라며 "그는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애국자였다"라고 말했다.

1931년 남아공의 작은 마을 트랜스발에서 태어난 투투 대주교는 1961년 사제가 되었다. 이후 영국 런던의 킹스칼리지에서 신학을 공부한 뒤 귀국해 남아공의 인종차별 철폐 운동에 앞장서 왔다. 그는 1976년 인종차별에 반대한 소웨토 흑인 학생 시위를 경찰이 무자비하게 진압한 것에 대해 "백인 소수 정부는 인종차별적이며, 신의 뜻을 거스르고 있다"고 비판했고, 1984년 노벨위원회는 그가 "명징한 시각과 두려움 없는 자세"를 가진 "모든 아프리카 자유 투사를 위한 단결의 상징"이라며 노벨평화상을 수여하기도 했다. 그는 1988년 유엔(UN)에서 "아파르트헤이트는 나치즘 만큼이나 부도덕하고 사악한 것"이라고 연설하며 아파르트헤이트의 부당함을 세계에 알리는 데 힘썼다.

<알자지라>는 투투 대주교 전기를 쓴 스티븐 기시를 인용해 "그는 남아프리카의 마틴 루터 킹이었다. 그는 압제자들을 미워하지 않았으며 언제나 사람들의 도덕적 양심에 호소하고 대화의 힘을 믿었다"고 보도했다.

1994년 넬슨 만델라가 남아공의 첫 흑인 대통령이 된 뒤 투투 대주교는 국가와 국민을 통합하기 위한 운동인 '무지개 국가'를 제안했고, 1995년 아파르트헤이트 시대의 인권 침해를 조사하기 위한 진실화해위원회(TRC) 위원장으로 임명됐다. 이 위원회는 3년에 걸친 조사를 통해 희생자 약 2만1000명의 증언을 들었다. 위원회는 가해자 처벌보다 진상의 완전한 규명과 화해, 피해자의 회복을 목적으로 했다. 피해자에게 배상금을 지불하며 정치적인 인권 침해를 온전히 고백한 가해자의 사면을 허용했다. 

<프랑스24>는 처벌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비판에 대해 투투가 "(보복적이고 징벌적인 것이 아닌) 다른 종류의 정의가 있다. 형벌이 아니라 치유, 조화, 화해와 함께 불균형을 교정하고 깨진 관계를 회복하는 회복적 정의"라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이 매체는 TRC 전직 위원이자 인권 변호사인 두미사 은체베자가 2015년 <AFP>에 "사람들은 사면이 값싸다고 말한다. 단지 감옥에 안 가서 그렇단 말인가"라며 "사실 사면은 형사 사법 시스템을 통하는 것보다 더 무거운 정의의 일종이었다. 사면을 신청한 사람은 변호사와 동석한 상태에서 자신이 저지른 짓을 자세히 고백한다. 그것은 종신형으로, 씻어낼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 사실을 전했다. 

남아공의 TRC는 한국의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등 심각한 분쟁을 겪은 나라들이 내부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꾸리는 기구의 기준이 되었다.

아파르트헤이트를 청산하고 다수 흑인의 정부인 아프리카민족회의(ANC)가 집권한 뒤에도 투투 대주교의 비판정신은 그치지 않았다. 그는 새로운 흑인 정치 엘리트들에게 너무 큰 권력과 부가 집중돼 있으며 집권 정부가 대다수 민중의 빈곤을 해소하지 못하고 있다고 규탄했다. 성범죄 혐의를 받던 제이콥 주마(2018년 부패혐의 등으로 사임) 전 남아공 대통령에 대해서는 후보 시절부터 사퇴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계속해서 아프리카민족회의의 강한 비판자로 남았던 투투 대주교는 주마 전 대통령 재임 당시인 2013년 서거한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의 장례식에 초청 받지 못하는 '해프닝'을 겪기도 했다. 당시 집권당이 그를 장례식에서 배제했다는 비난이 커지자, 대통령 쪽은 투투 대주교가 "당연히 초대되었다"며 수습하기도 했다.  

투투 대주교의 목소리는 인종차별 철폐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교단의 동성애 차별을 강하게 반대하는 사제였다. 그가 2013년 남아프리카에서 동성애자 권리를 증진하는 유엔 캠페인에 참여하며 "동성애를 혐오하는 천국에 가느니 다른 곳(지옥)에 가겠다"고 말한 사실은 유명하다. 그는 당시 "나는 아파르트헤이트 철폐 운동에 참여할 때 만큼이나 이 운동에 열정적이다. 나에게 그 둘은 같은 레벨이다"라고 말했다. 

남아공은 1996년 채택된 헌법에서 세계 최초로 성적 지향에 따른 차별을 금지하는 명문화된 조항을 두었고 투투 대주교는 이를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남아공은 2006년 동성혼을 법적으로 인정하기도 했다. 투투 대주교의 딸은 2015년 여성과 결혼하며 남아공 사제 서품을 포기해야 했지만, 투투는 딸을 축복했다.

자국의 인종차별 철폐 뿐 아니라 전 세계 인권 신장을 위해 목소리를 냈던 투투 대주교의 별세에 전 세계의 인사들이 애도를 표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신과 인민의 진정한 봉사자였던 대주교가 돌아가신 것을 알고 가슴이 무너졌다. 그의 유산은 국경을 초월하고 시대를 초월해 울려퍼질 것"이라고 했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투투 대주교는 나와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멘토이고 친구이고 도덕적 나침반이었다. 그는 자국이 정의와 해방을 위한 투쟁을 했지만 동시에 모든 곳에서 일어나는 부정의를 염려했다. 그는 유머를 잃지 않았고 적에게서 인간성을 찾으려는 의지를 잃지 않았다. 나와 미쉘은 그를 그리워할 것이다"라고 애도했다.

마틴 루터 킹의 딸 버니스 킹은 "전 지구적 현자, 인권 지도자, 이 땅의 강력한 순례자였던 이의 죽음에 슬픔에 잠겼다"고 했다. 와셀 아부 유세프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PLO) 상임위원은 "투투 신부는 팔레스타인 대의의 가장 큰 지지자였다. 그는 언제나 팔레스타인이 자유를 쟁취할 권리, 그리고 이스라엘의 점령과 아파르트헤이트(인종분리 및 차별)를 거부할 권리를 옹호했다"고 했다.

넬슨 만델라 재단은 "그는 걸출한 인간이었고, 사상가였고, 지도자였고, 목자였다"라고 전했다.

▲26일(현지시각)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 세인트조지 성당에 놓인 데스몬드 투투 대주교의 사진과 추모의 꽃. ⓒ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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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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