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이 있는 자는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으나, 힘이 없는 자는 굴복할 수밖에 없다."
현실주의 역사서로 이해되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나오는 유명한 현실주의 연설이다. 정의와 도덕이라는 가치보다는 군사력이라는 힘이 당시의 국제관계를 지배했다.
이처럼 현실주의(realism)는 투키디데스, 니콜로 마키아벨리, 토마스 홉스 등 여러 사상가들이 수세기에 걸쳐 구축한 사상적 토대 위에 20세기에 들어서 현대적 국제정치 패러다임으로 정립되었다. 현실주의에서는 국가들의 생존을 보장해 줄 수 있는 상위의 기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근원적인 안보의 문제가 비롯된다고 본다.
현실주의자들에게 있어 국가의 가장 소중한 가치는 영토보전, 국민보호, 주권유지 등으로 정의되는 '안보'다. 무정부 상태인 국제체계에서는 생존에 대한 보장을 담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실주의적 시각에서 무정부상태는 무질서 상태로 갈등과 분쟁이 항시적으로 도사리고 있는 홉스적 공간(Hobbesian anarchy)이다.
따라서, 안보를 지키기 위한 핵심적인 수단은 국력(Power)이며, 국가가 군사력을 증강하는 등의 일련의 행위는 자조(self-help)적이다. 자국민을 보호해야 하는데 무정부상태에서 타국은 위협이기 때문이다.
또한 윤리나 도덕을 찾아볼 수 없는 국제체제에서 평화를 유지하는 방법은 다른 국가가 자국에 침입하지 않도록 힘의 균형(balance of power)을 맞추는 것이요, 이에 따라 국가들은 안보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일상적으로 국력경쟁(power struggle)에 휘말리게 된다.
이같은 국력경쟁은 일견 소모적이다. 국방기술품질원이 발간한 '2020 세계 방산시장 연감'에 따르면 2019년 전 세계 국방비 지출 규모는 1조9170억 달러로 추정된다. 이는 1988년 이래 가장 높은 수준으로 전년 대비 3.6% 증가한 수치다. 68년 동안 정전 상태인 한국의 국방비는 어떠할까? 지난 12월 2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2022년 국방예산은 2021년도 대비 3.4%가 증가한 54조 6,112억 원이다. 2005년 국방예산 20조원 시대가 시작된 지 15년 뒤인 2020년 이후 한국의 국방예산 50조원 시대는 2년째 유지되고 있다. 코로나19시대 지방의료원 거점병원(증축 설계비) 예산은 고작 15억 원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분단으로 인한 비용이 너무도 크다.
193개의 UN회원국이 국제연합(UN) 헌장 서문에서 약속한 것처럼, 각 국가들이 "관용을 실천하고 선량한 이웃으로서 상호간 평화롭게 같이 생활하며, 국제평화와 안전을 유지하기 위하여 우리들의 힘을 합하며, 공동이익을 위한 경우 이외에는 무력을 사용하지 아니한다(to practice tolerance and live together in peace with one another as good neighbours, and to unite our strength to maintain international peace and security, and to ensure, by the acceptance of principles and the institution of methods, that armed force shall not be used, save in the common interest,)"는 약속을 지킬 것이라는 신뢰가 있다면, 2조 달러에 달하는 전세계 국방비는 코로나19 국제협력이나 빈곤퇴치, 기후변화 등 전지구적인 분야에 사용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국가들이 국력경쟁을 멈추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는 배신, 즉 속임수에 대한 두려움이다. 상위의 권위체가 부재한 무정부 상태에서는 상대국이 약속한 의무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효과적으로 처벌하기 어렵고 큰 피해를 입을 위험이 있다. 특히 안보 분야에서 배신을 당할 경우 국가의 존망이 위태로울 수 있다. 또 다른 협력 저해요인은 상대적 이득에 대한 고려이다. 무정부 상태에 놓인 국가들은 협력을 통한 이득이 상대방에게 더 많이 돌아가서 자신의 상대적 국력이 감소하지 않을까 우려한다. 상대국이 증가된 국력을 이용해 자국의 안보이익을 침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국가들은 이득의 균등한 분배를 요구하며, 그 결과 협력의 여지가 줄어든다.
특히 현실주의가 바라보는 이익의 문제는 '죄수의 딜레마(prisoners’dilemma)'와 '제로섬 게임(zero-sum)'으로 파악할 수 있다. 죄수 양자 공히 협력을 통해 공동의 이익을 추구할 수 있지만, 상대방을 일방적으로 배신하는 경우에는 협력하는 것보다 더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다. 제로섬 게임이 의미하는 현실주의가 추구해야 하는 이익은 바로 '상대적 이익(relative gain)'이다. 이런 상황에서 국가는 아무리 상대방이 배신하지 않는다는 확신이 들고, 또 협력으로 인한 이익을 기대할 수 있다고 해도 상대국이 더 많은 이익을 가질 수 있다는 우려로 협력을 거부할 공산이 크다.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의 대표적인 이론가인 존 미어샤이머(John J. Mearsheimer) 시카고대 교수의 말처럼 "한국은 한 치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지정학적 환경에 살고 있다." 그래서인지 한반도의 평화를 지키고, 평화를 만들어 가는 것이 참으로 쉽지 않다.
2018년 4월 27일 <판문점선언>에서 "남과 북은 정전협정체결 65년이 되는 올해에 종전을 선언하고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며 항구적이고 공고한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남·북·미 3자 또는 남·북·미·중 4자회담 개최를 적극 추진"하기로 약속했다. 2018년 6월 12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무위원장의 싱가포르 정상회담에 대한 공동성명>에서도 "2018년 4월 27일 판문점 선언을 재확인"한다고 했다.
하지만 "1953년 7월 27일 10시에 한국 판문점에서 영문, 한국문 및 중국문으로써 작성"된 정전협정을 68년 만에 끝내고, '종전선언'을 체결하자는 한국의 제안은 혈맹인 미국으로부터 사실상 거부당하고 있다. 한반도 통일보다는 분단으로 인한 미국의 이익이 더 크고, 한반도 통일 시 대(對)중국 견제의 전초기지인 주한미군이 철수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혈맹이자, 전세계 군사력 1위인 '패권국가' 미국은 종전선언을 반대할 이유가 없다. 이미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은 종전선언은 '정치적 선언'일 뿐이며, "종전선언과 주한미군 철수라든지, 한미동맹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여러 차례 공개적으로 발언했다. 심지어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 역시 2018년 9월 초에 평양을 방문한 문재인 정부의 대북 특사단에게 "종전선언은 한미동맹의 약화나 주한미군 철수와는 별개"라고 말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2021년 8월 31일 아프간 철군연설에서 "첫째, 우리는 결코 도달하지 못할 목표가 아니라 명확하고 달성 가능한 목표로 임무를 설정해야 한다. 둘째, 우리는 미합중국의 근본적인 국가안보 이익에 분명히 초점을 맞춰야 한다.(First, we must set missions with clear, achievable goals — not ones we’ll never reach. And second, we must stay clearly focused on the fundamental national security interest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고 했다.
이같은 바이든 대통령의 외교목표는 한국 역시 마찬가지이며, '한반도 평화의 입구'인 종전선언은 남북미 3국이 합의한 '명확하고 달성 가능한 임무'이자, 한국의 '근본적인 국가안보 이익'이다. 혈맹으로서 미국의 전향적 태도를 기대한다.
한상범 국회 보좌관은 국회 외교통일위원회에서 오랫동안 활동하며 한반도 문제, 국제 통상 문제 등을 다뤄온 전문가입니다.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전체댓글 0